소도시 여행의 로망 - 대한민국 빈티지를 만나다
고선영 지음, 김형호 사진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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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이미 연지동에 살 때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곤 했었다. 바로 이곳이야! 집을 나와 여기까지 내가 걸어온 골목과 골목,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온 만큼 또 걸어야 하는 다른 골목과 골목, 이 사랑스러운 것들, 그런데 이게 어찌 부산인가. 연지동이지! 아니 이게 어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인가. 내가 어릴 때부터 살고 싶었던 나만의 읍이지. 그래, 연지읍인 거야! 그 순간 부산은 우리 연지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 너머의 거대한 도시로 멀어져버렸다. 산책을 하며 고조된 어떤 뜨거운 감정이 그렇게 나의 동네를 연지읍이라고 애틋하게 호명하게 하던 것이다. 연산 9동의 일부도 그렇게 연산읍이 되었고…. 하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만덕읍은 나의 그런 세 번째 읍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재작년 겨울 이사를 왔던 때부터 바로 만덕읍이라고 호명했던 것은 아니다. 작년 어느 결에야 읍이라고 입에 붙기 시작했다. 1년 넘게 걸렸다. 뭐, 연지동이 연지읍이 되는 데는 약 3년, 연산 9동이 연산읍이 되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지만….(부산일보 1월 27일자 33면 중 일부) 

지역 일간지에 실린 소설가 김곰치 님의 [작가들의 도시마을 보고서 - 나는 마실간다] 한 대목을 읽다가 멈칫거렸다. 필자는 비록 작은 동네긴 하지만 그래도 초거대도시인 부산광역시에 소재한 곳에다가 읍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 호칭을 붙였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심산이기에 연지읍, 연산읍, 만덕읍이라는 이름으로 그곳들을 부르는 걸까? 하여 다시금 꼼꼼히 짚어보니 그제야 연유가 그려졌다. 작가는 애틋한 정감이 가는 동네, 그래서 마음결 아릿하게 빨아들이는 곳을 읍이라 명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선영의 [소도시 여행의 로망]에 나오는 해운대 달맞이길 갤러리 투어 편과 감천동 도보여행 대목을 읽으며 바로 자그마한 우리 읍 얘기구나 하는 감이 단번에 들었다. 우리 피붙이들과 정겨운 이웃들이 부대끼는 곳, 어쩜 퇴락한 아니 아직 인간의 숨결이 남아 있는 마음의 길을 자박자박 걸어가며 생각의 결을 자아낸 것이니 말이다. 때론 옛 정취에 각별한 감흥을 느끼기도 하고 더러는 작가들의 예술혼에 경탄하기도 하며 천천히 둘러보며 뭉클해 하는 곳, 거기가 바로 김곰치 작가가 말한 읍이 아닐까?

첫 편에 나오는 안동 46번 시내버스 투어 편도 마찬가지였다. 안동 하면 그래도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중심도시인데 버스가 들리는 곳은 궁벽한 시골, 한적한 마을 일색이었다. 그런 곳이 소도시, 아니 읍이라는 아련한 이름으로 불리기에 딱 적합한 곳이리라. 특히 내가 들린 적이 있는 병산서원을 소개한 부분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곳은 생각만 해도 아늑하기만 하다. 마을 초입부터 비포장도로로 속세와 절연되어 있고 건너편으론 유장한 강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 위론 높다란 단애가 서슬 퍼렇게 가로막혀 거의 절해고도를 연상시키는 곳인데 그런 마을에 오순도순 정겹게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나그네들이라고 건성으로 대하지 않고 진정으로 반겨주고 있었으니. 이런 곳이 바로 세상사 더러운 풍진이 범하지 못하는 마음속의 읍이 또 아닐까.

그런 읍에선 자연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만 그 보다 먼저 사람의 온기, 인간의 냄새에 흠씬 취하고 말 것이다. 

처음 여행을 할 땐 새로운 곳이면 다 좋았다. 다음엔 멋진 풍경을 찾아 다녔고, 시간이 흐른 뒤엔 맛있는 식당과 잘 지은 리조트 따위에 관심이 갔다. 그 다음엔 한적한 길을 걸었고 바람과 하늘과 나무를 눈에 담았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뒤에는 결국,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집착하게 됐다. 풍경 속 그네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말을 걸고 싶어져 안달이 났다. 그래서 동네를 유람하기 시작했다. (프롤로그 my vintage road 중에서)

그렇게 사람이 풍경으로 비치는 게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니 온정을 간직하고 있는 소통의 대상으로 다가오고 시간의 켜가 쌓여 있고 자잘한 이야기를 아득하게 품고 있는 곳, 그런 동네가 바로 소도시, 아니 우리들의 읍인 것이다. 작가는 참 살갑게도 다가가 빈티지한 시간들을 나누었다. 하여 그녀는 읍형 인간이라 하겠다. 소도시 풍경에 절로 녹아드는 따뜻하고 곰살스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그런 심성이 부럽기도 했다. 내게 없는 능력을 그녀는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삶, 여행을 로망으로 간직하고는 있지만 성큼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주저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아직은 풍광이나 위락시설, 아니 좀 더 봐 준다 쳐도 겨우 바람과 하늘과 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단계에 머물고 있기에 말이다. 왠지 사람들과는 겉돌기만 하는 것 같고. 아직은 소도시 여행, 그 인간적인 읍으로 들어가 부대끼며 내면을 깊게, 넓게 확장시키는 여정에 오르기엔 가슴이 덜 여물었달 밖에. 하여 한번 더 고선영 작가가 걸었던 길, 아니 마음결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음미해보려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경로를 되짚어가며 그대로 따라 걸어보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소도시 여행에 어울리는 읍 주민이 되어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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