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0년 12월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요즈음의 시류와는 동떨어진 독특한 사랑 법을 일깨워주고 있는 정호승 님의 절절한 시편들이 가슴을 미어지게 합니다. 그의 시는 가벼움, 밝음 그리고 즐거움, 더 심하게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랑 법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찌 보면 전근대적인 심성 같기도 한 방식으로 그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며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들은 읽혀지기에 거북하고 부담이 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그의 시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감정 이입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우리 삶의 원형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그의 시를 읽다보면 때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슬픔이 기쁨에게')고 잇속만 따지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사고 방식을 통탄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하지만 그늘이 배어있는 사랑의 극한치를 보여 주고 있는 시로 '성의'를 들고 싶습니다. 「지난가을 내내 어디서 노숙을 한 것일까/ 온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스스로 서울의 감옥이 된 창문도 없는 여자가/ 잠시 잠에서 깨어나 옷을 벗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고 또 벗어/ 아들에게 입히다가 다시 잠이 든다」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살아왔던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만드는, 또 그 최악의 여건 하에서도 아름답게 꽃피고 있는 사랑의 극한치, 슬픈 사랑의 최상급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절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을 정련시켜 순진무구의 경지로 몰고 가게 하는 그의 시들을 소리내어 읊조리다 보면 이제 그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겠나 하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