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동양인의 사유 방식이나 학계의 지적 풍토는 사물이나 현상의 외연을 일견에 통찰하고 단계를 축약하여 거침없이 핵심을 꿰뚫어 본질을 밝히는 직관을 중시해 왔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초입부터 미리 제시되는 거대 담론을 안고 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논리 전개가 이루어지기 일쑤다. 그러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은 이러한 사고 패턴에 따른 논의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기대에 좀처럼 부응하지 않는다. '정체성'의 정체를 결코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급한 일부 논자들은 예단하기를 설익은 논리로 변죽만 울리다가 정작 '정체성'의 실체는 윤곽도 못 잡고 유야무야 마무리 될 잡문의 하나로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양의 학풍, 특히 대륙 계통의 연역적 방법론의 경우 느닷없이 주어지는 통속적인 답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제들을 하나하나 깔고 단계를 밟아나가며 여과식으로 압축하거나, 서서히 개념을 명료화해나가는 그리하여 자연스레 결론으로 이어질 논리 전개만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반화된 방법을 사용하여 제삼자에 의한 반복 시행의 경우에도 동일한 결과가 도출됨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한마디로 내용의 범주나 수준이 문제가 아니고 절차적 적합성이 학문적 성과 판별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물은 지극히 당연한 조그만 것이 되기 십상이다. 과욕을 부리다가는 일체가 부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구 학계에 있어서 대가연(大家然)하는 허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담백함, 성실성, 철저함 및 진지성 등이 학문적 정도이기 때문이다.

탁석산의 머리와 가슴은 서구의 지적 풍토에 뿌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구 학계의 미덕을 체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적 학풍에 익숙한 우리의 선입견에 따른 예단은 맥을 잘못 짚은 것이다.

탁석산은 그 동안의 '정체성' 관련 논의가 너무 안이하게 이루어져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본질을 규명하기보다는 그 각론적 현란함에 매달렸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정체성'의 정체에 대해서는 천착하지 않고 언저리만 들락거린 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은 형이상학적 난제라 여겨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상이라고 탁석산은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에 대해 결연히 정면 도전을 하고 나선 것이다. '정체성'의 실체를 밝히자면 사전에 전제로 깔고 미리부터 규명해야 할 것들이 많으므로 이에 대해 엄정한 단계를 밟으며 검토해 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암중 모색하듯이 여러 논의를 거친 연후에, 겨우 '정체성'은 개성이고 개성은 고유성과 창의성의 합이라는 것을 보인 다음 그러한 '정체성'이 갖추어야 할 기준, 곧 '정체성' 판단 기준으로 현재성과 대중성 및 주체성을 제시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물론 탁석산의 연구는 그 자체가 자기 완결적인 것이 아님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차후 이루어질 각계 각층의 다양한 '정체성' 연구의 전제와 방법론의 기초가 되어질 것이다. 이를테면 전통 신앙으로서 샤머니즘을 연구하여 한국 정신 세계의 핵심을 발견한다던가, 생명이 긴 대중 가요를 통한 한국인의 심성을 분석하여 '정체성'의 개념을 구성해 나가고자 할 때 그 준거이자 전제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정체성'의 실체 규명과 관련된 작업이 다방면으로 풍성하게 이루어지고, 또 그 결과로서 각 하위문화들의 총체적 연관하에 한국 정체성의 진면목을 구성해 내는 데 있어 판별식 역할을 해 낼 수 있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탁석산의 글은 이러한 후속 활동들의 선행 작업으로서 '정체성'의 토대와 근거 및 이념을 제공하고 있는 '정체성' 연구의 총론이자 체계적 접근의 출발점이 되는 시론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학문적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탁석산의 글은 저급한 잡문이 아닌 진정성과 학구적 철저함이 배어있는 격조있는 성찰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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