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리스 로마 신화 1
한도훈 지음 / 은행나무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업인지라 늘 마음결 가다듬어 의연하게 다가가고자 스스로 다잡곤 합니다. 간혹 억장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교육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추스르려 마음먹습니다. 그래도 어이하지 못하고 뚜껑이 열릴 때면 되뇌는 말이 있습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언제부턴가 자기 암시를 걸듯 입에 올리곤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변화될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간곡하게 염원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열어갈 미래의 일정 부분은 나의 머리와 가슴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주제넘게 생각하며 말입니다.

요즘 들어선 우리 아이들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필이 꽂혔습니다. 이 총체적인 문명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은 생태론적 세계관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 감성적으로 자연을 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런 의식을 내면에 붙박이게 할까 고민하다가 가이아 이론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여 틈날 때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넣어 그럴듯한 얘기를 꾸미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곰곰 따져보니, 아뿔싸 나의 이야기는 온통 그리스 로마 신화 일색이라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무모하게 치닫는 성장지상주의에 대해서는 이카로스의 날개라고 공박하고 인간의 고달픈 숙명을 떠올릴 땐 시지포스 얘기를 처연하게 주저리주저리 엮어나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새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내면에 깊이 스며들어 의식의 일단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크게 예외는 아닐 터, 그러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책이 범람할 밖에요. 그런데 관련된 책은 무수히 많지만, 동양으로 치자면 가히 삼국지에 비길 정도로, 읽다보면 조금씩 마뜩찮은 구석을 대부분 지니고 있어 마음 한편 찜찜하기 일쑤입니다. 근자에는 만화 시리즈가 석권하였는데 그림으로 보여주니 오히려 발산적 상상력을 상당 부분 제약하는 듯하여 아쉬운 감을 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신화 원전을 그대로 소개한 책이나 관련 해설서도 꽤 출간되었는데 지루한 감을 떨칠 수 없거나 교훈적인 내용 일색이어서 또 그렇고 그런 거구나 하는 식상함에 책을 놓아버리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원작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 그리하여 머리와 가슴을 쏙 빨아들일만한 흡인력을 지닌 저작에 대한 목마름이 늘 있어왔다 하겠습니다.

이번에 나온 <소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러한 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줄 듯 합니다. 가볍게 읽히면서도 의미심장함을 견지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입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끌고 나감으로써 신화 자체가 갖고 있는 스토리 라인의 극적인 재미를 배가한 것은 물론, 신화가 지니고 있는 내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는 장치를 군데군데 깔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신화에 내재되어 있는 심원한 의미를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나름의 주제를 설정하여 산발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맥락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짚어볼 수 있는 것이 신화도 결국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대한 일깨움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가상적인 신들의 세계에 대해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모습과 생활에 빗댄 인간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 야망과 모략, 전쟁과 모험 등이 교차하는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바로 인간 세계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화라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진면목을 비로소 확인하여 존재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가는 가공으로서의 신화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라고 슬몃 권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또 하나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 신화는 인간에 의해 씌어졌다는 자각입니다. 이런 인식은 인간의 필요가 신화를 낳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터입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신화가 인간을 위해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굵은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발전을 고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신화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폴론의 태양마차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사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게 되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부터 인간 사회의 유지 존속에 꼭 필요한 정신적인 가치인 사랑의 감정을 배운 것을 의미 있게 자리매김할 밖에요. 그리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얘기에서 인간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인류의 의지에 열렬한 찬사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신화가 인간의 발전을 위한 합목적적 필요에서 인간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화도 결국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임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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