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는 수난을 당했다. 수많은 신도들의 죽음과 순교는 한국천주교의 초기 역사이다. 한국사회에 들어왔던 천주교의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지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그곳에 루이 델랑드가 도착하게 되었다. 수많은 박해 끝에 피폐해진 민심과 천주교를 위해 루이 델랑드는 한국 교회 요청과 순교자들의 나라 한국의 모습을 보고 파송되었다. 그는 1923년 4월 20일에 프랑스 마르세유 항에서 출발하여 중국, 일본을 거쳐 1923년 6월 5일 새벽 6시 15분에 부산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지의 땅, 한국 땅에 내리자 땅에 엎드려 기도하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땅을 밟을 때 땅에 엎드려 키스를 하는 것이 루이 델랑드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함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가 보았던 미지의 땅은 인상적이며 강인함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이지만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곳곳은 식민의 현장인 일본군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렇지만 이동하면서 바라본 풍경은 평온함이며 넓은 들녘에서는 밭을 가꾸는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분명 식민지이었지만 한국은 달랐던 것이다. 그는 조선인 신학생에 관한 것을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신학생을 양성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임에도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었다. 식민지하에 있는 식학교가 유지된다는 것이 어려웠다. 이러한 환경이었기에 선교사들이 신학생 양성이 미온적인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루이 델랑드 신부는 일본의 눈치속에서 조선의 교구활동과 선교활동을 주도할 수 있는 신학생 양성에 더욱 과감성을 가지고 시행해 갔다. 신학생들은 장차 조선인을 개화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중요한 인재들이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이 델랑드는 인재를 양성함에 최선을 다했다. 조선을 구하고 민중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들을 양성함에 중대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어둠의 땅에 한 줄기의 빛을 비추었다. 이책에서 루이 델랑드의 사역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인 저는 이 책에 가장 중요한 루이 델랑드의 사역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외형적인 사역으로는 신학교 사역이지만 내면적인 사역은 식민지에 있는 조선인의 발굴과 식민지 후에 활동할 조선인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임에 틀림 없음을 이 책에서 우리는 보게 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신뢰와 감동이었다. 그의 사역에는 일본의 감시의 눈이 항상 있었다. 일본의 감시속에서 때로는 주교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감시가 강화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감시는 철저히 이루어졌다.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다양한 성당의 모든 기능도 마비 시켜갔다. 루이 델랑드는 조선인을 끌어 안았다. 조선인의 고통을 그의 고통으로 여겼다. 아픔을 함께 했다. 그에게 주어진 사역의 과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의 가는 곳은 한줄기의 빛이었다. 이책은 개화시키에 많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오늘의 천주교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 땀이었다고 본다. 그는 포항의 작은 무덤에 잠들어 있다. 한반도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 우리는 가슴에 따뜻함을 보게 된다. 그의 마음은 오늘의 많은 인재를 한국에 뿌리 내리게 했다. 식민지의 감시속에서도 자기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며 섬겼던 루이 델랑드의 아름다운 사역의 길을 이 책에서 우리는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