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은 형식상 답변이었으나 맥락상으론 질문이었다. 일을 맡을 것이냐, 말 것이냐.당연한 질문이었다. 마땅히 내가 먼저 의사를 밝혀야 했다. 서로 헛심을 쓰지 않으려면 ‘일을 맡는다‘와 ‘이야기를 듣는다‘는 같은 말이었다. - P19
가상세계에선 하고 싶은 일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벌도 받지 않는다. 도덕적 부담을 짊어질 필요도 없다. 나보다 잘난 것들이 내 손에 죽길 바란다면 총을 들면 된다. 몇 놈이 아니라 대륙 단위로 쓸어버리고 싶다면 전쟁을 일으키면 된다. 불량하고 불건전한 환상을 원한다면 술과 약의 세계가 소망을 이뤄줄 것이다. - P19
승주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도 못지않았다. 우리 둘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랐다. 승주를 향할 땐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보듯 했고, 나를 향할 땐 마당 잣나무 보듯 했다. 인간관계의 상호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버지를 마당가 회양목 울타리 정도로 여겼으니까. 울타리긴 울타리인데 누구나 넘볼 수 있고 누구든 뛰어넘을 수 있는, 울타리 같지 않은 울타리. - P32
고통을 대가로 침묵을 가르쳐주는 이 천재적인 기구는 말에게 재갈을 물리듯 입안에 쑤셔넣는 단단한 목재튜브인데, 무지막지하게 쑤셔넣다가 이를 뽑아버리기 일쑤였다. - P124
신분 상승을 위한 ‘세라섬의 사닥다리‘를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는 죄수의 행동이나 갱생 의지나 악행의 반복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좋든 나쁘든 오로지 운의 소관이었다. - P125
그의 눈은 크고 촉촉했으며, 이런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꿈꾸는 듯했다. 그 눈이 다른 몸에 달려 있었다면 시적이거나 신비로운 성격까지 암시했겠지만, 여기서 드러난 건 타인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냉담함뿐이었다. - P127
권위를 상대하는 가장 쉬운 길은 확실히 묵인이다. - P121
죽음은 지칠 대로 지친 몸들과 하감으로 뒤덮인 영혼들이 내뿜는 강렬한 악취 속에 있었다. 죽음은 괴저가 일어난 팔다리와 폐결핵에 걸려 너덜너덜해진 피투성이 허파의 독기 속에서 올라왔다. 죽음은 구타의 지독한 악취 속에, 사방에 침범해 서서히 퍼지는 습기 탓에 벌써 허물어지는 신축 건물 속에 숨어 있었고, 거듭된 강간으로 썩어가는 괄약근에서 스며나왔다. 죽음은 삭아가는 진흙과 소름 끼치는 원한의 사무친 냄새에서 올라왔고, 젖어서 기우듬해진 벽돌담 속에, 채찍으로 벗겨진 살갗에서 올라오는 김 속에,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무수한 비명과 살인이 내뿜는 고약한 날숨, 그와 뒤섞인 말 못할 공포의 눈물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 P122
아홉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한 사람씩 받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누가 보낸 것일까. 흥미진진하다. 사건의 주인공은 자신의 목적을 이룬 후 사건의 전모를 밝힌 글을 쓰고는 죽음에 이른다. 어린 소년 소녀들의 장난스러운 행동이 한 소녀를 죽음으로 이끌고 소녀의 부모의 삶은 그대로 무너져 버린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주인공 역시 자신의 딸을 사고로 잃게 된 후 자신을 비롯한 여덟 명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 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악을 악으로 갚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도 억울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고
백인들은 반란을 일으킨 흑인들을 죽음으로 처벌하기 원했고, 흑인들은 계속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죽는 편이 나았다. 자유인으로서 죽는다는 것은 반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 P105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당히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켈피의 눈은 마치 우리가 저지른 진짜 범죄의 전모를 알기라도 하듯이,기계 파괴범의 눈이 죽는 순간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좇았다. - P107
그것은 나와 그들과 모두를 가두어놓은 이 깨진 세상에 대한 나 자신의 공포였다. - P108
진실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먼지 속에, 불쾌한 점액과 딱지와 오물 찌꺼기 속에, 악마와 더불어 천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이 모두가 지상과 우리 안에 사로잡혀 있고, 이 모두가-나와 여러분과 우리의 - 한차례 맥박 속에, 또한 내가 물고기 육신을 가지고 구현하고 이루려는 모든 주제 안에 담겨 있다. -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