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은 형식상 답변이었으나 맥락상으론 질문이었다. 일을 맡을 것이냐, 말 것이냐.
당연한 질문이었다. 마땅히 내가 먼저 의사를 밝혀야 했다. 서로 헛심을 쓰지 않으려면 ‘일을 맡는다‘와 ‘이야기를 듣는다‘는 같은 말이었다. - P19

가상세계에선 하고 싶은 일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벌도 받지 않는다. 도덕적 부담을 짊어질 필요도 없다. 나보다 잘난 것들이 내 손에 죽길 바란다면 총을 들면 된다. 몇 놈이 아니라 대륙 단위로 쓸어버리고 싶다면 전쟁을 일으키면 된다. 불량하고 불건전한 환상을 원한다면 술과 약의 세계가 소망을 이뤄줄 것이다. - P19

승주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도 못지않았다. 우리 둘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랐다. 승주를 향할 땐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보듯 했고, 나를 향할 땐 마당 잣나무 보듯 했다. 인간관계의 상호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버지를 마당가 회양목 울타리 정도로 여겼으니까. 울타리긴 울타리인데 누구나 넘볼 수 있고 누구든 뛰어넘을 수 있는, 울타리 같지 않은 울타리.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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