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한 사람씩 받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누가 보낸 것일까. 흥미진진하다. 사건의 주인공은 자신의 목적을 이룬 후 사건의 전모를 밝힌 글을 쓰고는 죽음에 이른다. 어린 소년 소녀들의 장난스러운 행동이 한 소녀를 죽음으로 이끌고 소녀의 부모의 삶은 그대로 무너져 버린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주인공 역시 자신의 딸을 사고로 잃게 된 후 자신을 비롯한 여덟 명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 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악을 악으로 갚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도 억울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고
백인들은 반란을 일으킨 흑인들을 죽음으로 처벌하기 원했고, 흑인들은 계속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죽는 편이 나았다. 자유인으로서 죽는다는 것은 반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 P105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당히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켈피의 눈은 마치 우리가 저지른 진짜 범죄의 전모를 알기라도 하듯이,기계 파괴범의 눈이 죽는 순간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좇았다. - P107
그것은 나와 그들과 모두를 가두어놓은 이 깨진 세상에 대한 나 자신의 공포였다. - P108
진실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먼지 속에, 불쾌한 점액과 딱지와 오물 찌꺼기 속에, 악마와 더불어 천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이 모두가 지상과 우리 안에 사로잡혀 있고, 이 모두가-나와 여러분과 우리의 - 한차례 맥박 속에, 또한 내가 물고기 육신을 가지고 구현하고 이루려는 모든 주제 안에 담겨 있다. - P111
식민지 예술이란 새것을 낡은 것으로, 미지의 것을 기지의 것으로, 대척지"를 유럽으로, 경멸스러운 것을 존경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희극적인 요령이다. - P85
그림 한 장에 그런 힘이 있었다는 것이, 간판이 아니라 마치 우리 머리 위에 걸린 마담 기요틴 그 자체라도 되는 듯 그 그림이 나와 카푸아 데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헛수고‘는 우리를 한데 묶어서 파멸시켰다. - P94
말하건대 이 유형지에는 죄수를 묘사한 그림이 단 한 점도 없으며, 그런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가 매우 가혹한 처벌 대상으로 금지되어 있다. - P60
한 장의 그림, 한 권의 책은 기껏해야 한 채의 빈집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는 열린 문에 불과할 뿐,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나머지 부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최대한 만들어서 채워넣어야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여기서 일어난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P60
물론 킹이 좀더 외향적이고 남들을 좀더 허물없이 대했다면 나는 그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는 팝조이와 잘 지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내가 사교 생활의 명백한 이점을 들어가며 독려해도, 그에게는 나의 똥던지기나 팝조이의 구타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이것이 그의선택이며,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안다. 참나무가 버드나무처럼 휘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킹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어이 친구 잘 만났어!" 따위의 입에 발린 말이 아닌 다른 무엇이다. - P66
나는 온갖 것을 탐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살아 있음을, 이름 모를 마을에서 이름 모를 여자에게서 나온 이름 모를 인간이 아님을, 이 빠진 노친네들이 뱃밥에서 뽑아낸 근질근질한 이야기와 싸구려 소책자를 뒤져 하느님에게서 훔친 딱지투성이 옛 노래만이 나를 키운 자양분 전부가 아님을 입증하려면 무슨 힘이든 움켜쥐어야 했기 때문이다. - P75
진정한 악당이 다 그렇듯이. 나 또한 빤한 도둑질을 넘어서는 규모의 발상 앞에서는 그만 깜빡 속아넘어갔던 것이다. - P77
나는 또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표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 정확히 말하자면 장바뵈프 오듀본 자신이 아니라 장바뵈프 오듀본이 쏘아맞히지 못한 새들로부터- 배웠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반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암흑가의 영국인으로 사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익혔고, 나중에 영국의 암흑가로 돌아갔을 때는 미국인 모험가로 행세했다. 또 이곳 밴디먼스랜드에서는 설령 삼류라 할지라도 ‘외지에서 온 예술가- 물론 여기서 외지란 유럽을 뜻한다-만큼 환대받는 존재가 없는 듯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유럽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부당하게 학대받은 순진하고 촌티나는 식민지인을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P78
나는 오듀본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이 된 동물에게서 그 본질적인 익살, 긍지나 진실함 내지 야만성, 어리석음이나 광기를 찾아내는 법을 배웠다. 그에게는 그 무엇도 단순한 표본이 아니었다. 온 생명이 그에게 소재의 백과사전이었고, 유일하게 곤란한 과제가 있다면 -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음을 그도 인정했다-각각의 소재가 드러내는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최대한 정직하게 정확히 표현하는 일이었다. - P78
삶의 수치스러운 몰락에 기진한 나는 콩가의 어두컴컴한 거실에 있는 오래된 적갈색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어느덧 깊이 잠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한 가지 끈질긴 의문이 무한 루프처럼 재생되고 있었다.나는 누구냐....? 그 질문은 묻고 있었다. 나는 누구냐......? - P46
그때 나는 풀잎해룡의 무시무시한 평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상상했지만, 한 일생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 평정의 이유, 즉 일체의 선도 일체의 악도 똑같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인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하는 풀잎해룡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괘념치 않는 듯 보였다. - P51
삶이란 등에 지고 다니며 그 안에서 살다 죽는 무의미한 등딱지에 불과할 뿐이니. - 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