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통 두 개, 모탕, 벽에 걸린 갈퀴와 삽, 어쩐지 모든 것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말하는 듯하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모든 것이 그 자신처럼 나이들어,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요를 내뿜고 있다. - P43

물건들은 제각기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인해 무겁고, 동시에 가볍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 P43

그리고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 P43

그의 연장은 빠짐없이 제자리에 놓여 있다. 대부분이 오래되고 손때 묻은 것들인데 그 모든 것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럴 수가, 생각하며 요한네스는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어쩐지 원래 그대로이면서 전혀 다르다, 평소와 다름없는 물건들인데 왠지 귀해 보이며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묵직해 보인다. 여느 때보다 훨씬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 같으면서 전혀 무게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 P44

여기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을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고 있잖아,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 P45

요한네스는 언덕을 오르며 생각한다, 어쩐지 모든 것이 너무 다른걸, 사물들도 집들도 달라 보여, 더 무거운 듯하면서도 어쩐지 더 가벼워 보이고, 뭔가가 땅에서부터 그리고 하늘로부터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 P47

풀이 무성히 자라 막히다시피한 길을 걸어 만으로 내려간다. 거기 그의 배와 페테르의 작은 고깃배가 있고, 레이프의 배와 다른 배들도 계류밧줄에 묶여 있다. 멈춰 서서 만의 보트하우스들을 내려다보니 그것들 역시 어딘가 다른 느낌이다. 요한네스는 선 채로 눈을 감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보는 것마다 변해 있으니, 눈앞의 보트하우스들 역시 너무 무거운 동시에 믿을 수 없이 가벼워 보인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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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반드시 끝은 있는 법이야. ‘여기가 끝입니다‘ 라고 일일이 적어놓지 않았을 뿐이지. 사다리의 가장 높은 단에 ‘여기가 끝입니다. 이보다 위쪽에는 발을 얹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어?" - P187

"상식을 발휘하고, 눈을 똑똑히 뜨고 있으면 어디가 끝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아오마메가 물었다. - P187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엄격한 작업 뒤에는 육체의 접촉을 수반하는 따스하고 조용한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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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쪽의 감이 뛰어나. 매사에 재능이라고는 타고나지를 못했지만 감만은 넉넉히 갖고 있지. 외람되지만 그거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어. 이봐, 덴고 재능과 감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도 반드시 배부르게 살 수 있는건 아니야. 하지만 뛰어난 감을 가지고 있으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는 거야." - P144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일도 있어. 어른의 세계에서도 비슷하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는 그게 좀더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거야." - P158

"자신이 배척당하는 소수가 아니라 배척하는 다수에 속한다는 것으로 다들 안심을 하는 거지. 아, 저쪽에 있는 게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하고. 어떤 시대든 어떤 사회든 기본적으로 다 똑같지만 많은 사람들 쪽에 붙어 있으면 성가신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래, 소수의 사람 쪽에 있으면 성가신 일만 생각해야 하지." - P160

노부인은 미소 지었다. "세상에는 대신할 자를 찾을 수 없는사람이라는 건 없지요. 제아무리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도 그 후임자가 대개는 어딘가에 있는 법이에요. 만일 세상이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질 겁니다. 물론......" - P176

"나비와 친구가 되려면 우선 당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해요. 인간으로서의 기척을 지우고 여기서 가만히 자신을 나무나 풀이나 꽃이라고 믿는 거예요. 시간은 걸리지만 일단 상대가 마음을 허락하면 그다음은 저절로 사이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요." - P177

나비는 그 무엇보다도 허망하고 우아한 생물이랍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게 태어나 한정된 아주 조금의 것만을 조용히 원하고, 이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살그머니 사라져요. 아마도 이곳과는 다른 세계로 - P178

"우리는 잘못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노부인은 아오마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P181

"우리는 올바른 일을 했어요." 노부인은 말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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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건 문단을 조롱해주자는 거야. 어둠침침한 동굴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서로 칭찬하고 상처를 핥아주고 서로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저쩌고 잘난 소리를 주절거리는 한심한 자들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어. 시스템의 뒤통수를 치고 들어가 철저히 조롱해줄 거라고. - P57

문학의 세계에선 좋든 싫든 돈을 초월한 동기가 일을 굴러가게 하는 거야. - P62

세계에는 다양한 죽음의 방식이 있지만 아마도 이토록 편한 죽음은 없을 것이다. - P84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곳에 없다. 나는 동시에 두 개의 장소에 있다. 아인슈타인의 정리에는 반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살인자의 선이다. - P86

"수학이란 물의 흐름 같은 거야." 덴고는 말했다. "물론 까다로운 이론도 아주 많지만 기본적인 이치는 대단히 심플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최단거리로 흐르는 것과 같이 수학의 흐름도 한 가지밖에 없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보여. 나는 그냥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돼.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아. 의식을 집중해서 응시하고 있으면 자기 쪽에서 모두 분명하게 밝혀줘. 그렇게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는 건 이 넓은 세상에 수학밖에 없어." - P103

"글쎄, 실제 인생은 수학과는 달라. 거기서는 모든 일이 반드시 최단거리를 택해 흐른다고는 할 수 없어. 나에게 수학은 뭐랄까, 너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그건 내게는 아름다운 풍경 같은거야.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이야. 뭔가로 치환할 필요조차 없어. 그래서 수학 속에 있으면 내가 점점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때가 있어. 이따금 그게 무서워져" - P104

덴고는 말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언어를 사용하여 내 주위의 풍경을 내게 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환해나가. 즉 재구성을 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나라는 인간이 이 세계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그건 수학의 세계에 있을 때와는 상당히 다른 작업이야."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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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 P7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칼- 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 P7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 P8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ㅡ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P14

그녀의 삶이 격렬하게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일기장 뒤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꼬챙이 같은 언어들이 시시로 잠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한밤에도 몇 번씩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신경은 위태롭게 예민해졌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때로 달궈진 쇠처럼 명치를 눌렀다. - P15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P15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 P19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 P26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니다. 고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 P35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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