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 양복을 사야 한다. 그것이 그로첸스키의 유령이 내게 하는 말 아니었을까? 나는 아이작을 창피하게 할 수 없었고 날 자랑스럽게 여기게도 할 수 없었다. 그애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 P129

새 양복을 차려입고 선반에서 보드카를 꺼냈다. 한 모금을 마시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알코올의 예리함이 슬픔의 예리함을 대체하는 것을 느끼며, 내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눈을 반쯤 감고서 백 번은 했을 그 몸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술병이 비고 나서는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빨리. 발을 쿵쿵 굴렸고 관절에서 뚝뚝 소리가 나도록 발길질을 했다. 내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춘 춤을 나도 추며 발을 쾅쾅 차고 쭈그리고 다리를 내뻗었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또 추어서 발이 까지고 발톱 밑에 피가 맺히는데도,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대로 춤을 추었다. 삶을 위해, 의자에 부딪히고 빙글빙글 돌다가 쓰러지면 일어나 다시 춤을 추었다. - P129

나는 세상이 날 맞을 준비를 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면 내가 세상을 맞을 준비를 못했다는 게 진실일 것이다. 나는 인생의 현장에 항상 너무 늦게 도착했다. - P130

우리에게 가능했던 인생과 우리의 지금 인생 사이에 놓여 있던 문은 우리 눈앞에서 닫혀버린 후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앞에서 내 삶의 문법은 이렇다. 경험 법칙에 따라, 복수형이 나오면 항상 단수형으로 고친다. 그 고귀한 우리라는 말이 무심코 흘러나오더라도 신속히 머리에 일격을 가해 비참함에서 벗어난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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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점보는 자기만의 시간대에서 살아갔다. 그는 일 분에 겨우스물다섯 번밖에 뛰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느릿느릿 움직였으며 춘희 또한,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의 세계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대신에 길 한쪽에 비켜서서 질주하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처럼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살이의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 P185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죠. 아무리 우물이 깊어도 반드시 바닥은있게 마련이에요. - P187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 P188

죽으면 사라지는 거야. 그리고 헤어지는 거지. 영원히. - P197

떠도는 자들의 소망이란 본시 소박하기 짝이 없어, 그저 입에 풀칠할 걱정 하지 않고 두 다리를 뻗을 데만 있으면 그들에겐 그곳이 바로 꿈에 본 내 고향이요, 복숭아꽃 흐드러진 정원이었던 것이다. - P200

춘희에게 금복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았으며, 춘희의 바람은 끝내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아득한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 P200

본시 뜨내기들이란 들어올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데다 염량빠르기로 치면 장사꾼 못지않았고 거칠기로 치면 건달 못지않았으며 음험하기로 치면 거간꾼 못지않았다. 또한 그들 가운데에는 뭔가 틈이 있으면 그 틈을 더욱 넓게 벌려 그 속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 P202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죽이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 일꾼들을 부추기고 충동질해서 그곳까지 끌고 온 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말엔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은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도 힘이 있었고 그 어떤 논리보다도 설득력이 있었으며 그 어떤 선전문구보다도 자극적이었다. 그것은 구호의 법칙이었다. 재청에 뒤이어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온갖 종류의 구호들이 쏟아져나왔다. - P205

금복은 자신에게 돌아온 엄청난 행운이 곧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 운명의 아이러니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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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들어보라고! 머리를 탁 때리는 생각이, 살아 있어서 이 얼마나 좋은가. 살아 있어서! 그러다 네게 말하고 싶어졌어. 무슨 말인지 알아?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브루노, 아름다운 것이자 영원한 기쁨이라고. - P118

세상이 더는 똑같이 보이지 않았다. 너는 바뀌고, 그러다 또 바뀌는구나. 개가 되고, 새가 되고, 항상 왼쪽으로 기우는 화초가 되는구나. 내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만큼 그애를 위해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것은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고,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고, 책을 쓴 것도 읽을 수 있는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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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 생생하게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을 외면했다. 때로 엄마는 물과 공기만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알려진 고등 생명체 중 그렇게생존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로서, 엄마의 이름을 딴 생물종이 하나있어야 마땅하다. - P72

언젠가 줄리언 삼촌이 해준 얘기에 따르면,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머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때로는 몸 전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뭇잎을 그리기 위해서는 전체 풍경을 희생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계를 지우는 것 같을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하늘 전체를 다루는 척 할 때보다 무언가의 4분의 1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부분을 다룰 때, 우주에 대한 어떤 느낌을 붙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엄마는 나뭇잎이나 머리를 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택했고, 어떤 느낌을 붙잡기 위해 세상을 희생했다. - P72

진화라는 개념은 너무 아름답고도 슬프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래로 지금까지 오십억에서 오백억 정도의 생물종이 생겨났는데, 그중 겨우 오백만에서 오천만 종 정도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니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종의 구십구 퍼센트는 멸종한 것이다. - P81

내가 자라서 절대로 하지 않을 것 한 가지는 사랑에 빠져 대학을 중퇴하고 물과 공기로만 버티는 법을 배워서, 내 이름을 딴 종의 시조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 P85

소포를 보내야 한다는 것, 내가 맘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드는 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당하지 않은 일이 아주 많다. - P94

나중에 아주 오랜 뒤에, 그는 두 가지 후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는데, 첫째는 그녀가 고개를 젖혔을 때 전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목에 자신이 만들어준 목걸이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잘못된 문장을 택했다는 것. - P98

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또한 어둡고 육중한 차이가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어서, 로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쓰다보니 더욱 그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하지만 리트비노프는 자신의 과거나 잃어버린 모든 것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 P102

인간의 최초 언어는 손짓이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언어는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으며, 손가락과 손목의 섬세한 뼈를 이용한 무한한 조합의 동작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미묘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 발휘되었던 섬세함은 그때 이후로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 P111

언어의 손짓과 삶의 손짓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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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 P149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이미 초래된 결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를 보태려는 사람들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가보다. - P151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에게 ‘적당히‘ 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라야 사랑이었고 증오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야 비로소 증오였다. - P154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 P154

금복은 역시 무언가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피어나는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엔 조금씩 생기가 돌고 부둣가 사내들을 안달나게 했던 그 향기도, 이전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풍겨나기 시작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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