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에겐 아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다지 생생한 존재는 아니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알 수 없는그림자 같은 사람, 유순하고 늘 웃는 사람, 아내의 결혼 예찬과 지극한 사랑 뒤에 필요한 배경처럼 서 있는사람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엄마의 영원한 절망에 꼭필요한 도구 같은 느낌으로 존재했다. 마치 아빠와 같이 산 이유가 오직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정신적 고뇌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이렇게 된 게 예정된 운명인 듯 보일 지경이었다. 이 일은 나에게도 세상을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 P119

이튿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데이비를 깔아뭉개기 직전 ‘말도 안 돼‘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도러시는 그 말을 들었다는 걸. 그의 속에 있던 엄마가 내 안의 엄마를 들었다. - P134

나는 1번 애비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랑했고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창가에 앉아서 온종일 이웃들을 바라보곤 했다. 매장 직원들은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누가 동네 사람이고 누가 외지인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의 등식은 간단하다. 익명성을 잃는 대신 보호를 받는다. - P136

거리는 인간들의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 사람들의 지혜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다. - P143

자전거 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즐거움 그 자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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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측 없이 내 안에서 막연한 기대감이 솟구쳐 올라오지만 언제나그렇듯 기대감이란 녀석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대로 곧장 또렷하게 올라오지 않고 무엇 때문인지 중간에 모양을 바꿔 다시 안으로 방향을 틀더니 시들시들해지다 명을 다해 버린다. 우울하게도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과정이다. - P71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 - P72

우리는 엄마와 딸이 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 P72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인생을 어떻게든 이치에 맞게 끼워 맞추면서 수긍하려고 한다. - P73

난생 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 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 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 P85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 안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 P87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 P93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 P95

아빠를 애도하는 일은 엄마의 직분, 엄마의 정체성, 엄마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 P118

엄마가 볼 때 당신은 남편을 잃었기에 더 차원 높은 인간,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되었고 감정은 더욱 심오해졌으며 수사는 더 풍부해졌다. 아빠의 죽음은 의식과 신조를 제공하는 하나의 종교였다. 일생에 단 하나뿐이던 사랑은 정통파 유대교와도 같았고 엄마는 탈무드를 기록하듯 그 안에서 율법과 유산을 찾아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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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 P23

창문 바깥쪽 삶에 대한 엄마의 끊임없는 평가는 내가 처음으로 맛본 지성의 열매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세간에 떠도는 말을 정보로 변형시킬 줄 알았다. - P24

엄마가 그 골목에서 일어나는 세상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인생은 조금 더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지고,
더 흥미로워졌다. 나는 우리 모녀와 창문 밖의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곤 했다 - P25

우리 부모님은 내가 생각해도 행복한 부부였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품위 있으면서도 애정이 넘쳤다. 결혼의 행복이야말로 천상의 행복이라는 엄마의 이상은 엄마와 내가 숨 쉬는 공기마다 들어차 있었고 엄마는 그로 인해 엄연히 있을 수 있는 현실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만 들어버렸다. 문제는 엄마가 당신의 결혼 생활에 내려진 축복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갖는 바람에 그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는 세상의 모든 결혼을 무시하고 폄하했다는 점이다. 엄마가 나에게 백 가지 방식으로, 천가지 방식으로 가르쳐 준 유일무이한 교훈이란 여자의 삶에선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점이었다. - P36

우리 엄마의 존재감은 강력했지만 커너 아줌마의 존재감은 부드러웠다. - P41

얘들아, 감정이 모든 걸 좌우한단다. 무엇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인생이 풍족할 수도 빈곤할 수도 있어. 감정을 고양시키면 큰 재산이 되기도 하고 그게 싹 사라져버리면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인생이 되기도 하는거야 - P44

나는 애착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 아주 어린시절에 알게 되었다. - P51

엄마가 바라는 것들은 단순하지만 절대 타협할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엄만 그것들을 물이나 공기처럼 필수 불가결한 무언가로 여긴다. - P64

엄마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 세상 살면서 늘 혼란스러운 건 엄마가 아니라 나다. - P68

"요즘에는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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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건물을 떠올릴 때마다 여자들만 기억난다. 그곳 여자들 모두가 드러커 아줌마처럼 상스럽거나 우리 엄마처럼 외고집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법이 없었고넘어온 삶의 고개를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행동만 보면 세상사를 다 꿰고 있는 듯했다. - P7

엄마가 싫어하는 건 현재다. 엄마는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즉시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 P12

솔직히 말하면, 이탈리아나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에서, 때로 같은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외부자스러움‘은 우리의 개성과 흥미를 북돋아주었고, 우리를 어떤 식으로건 정의했기에, 겉으로는 두려워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가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짜릿해하기도 했다. - P17

소수자는 저절로 침묵하게 된다. - P18

사회적 자아라는 외과와 남들이 모르는 자기기자신이라는 본질 사이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던 엄마는 그 안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상냥하면서도 냉소적이었고 예민하면서도 대범했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서도 꼬장꼬장했고, 가끔씩 스스로 정이 넘쳐서라고 생각하는 거칠고 심술맞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사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약해지는 마음, 그것을 다잡았을 때 짐짓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 P19

우리 집은 언제나 현관문이 닫혀 있는 집이었다. (현관문은 사생활을 중시할 만큼 교육받은 사람들과 문을 반쯤 열어놓고 사는 무식쟁이들을 구분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었다) - P19

엄마는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같은 사건이라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 P19

엄마는 주변 이웃들과 비교하면 당신이 한층 ‘개화된‘ 생각과 감정이 더 성숙한 사람이라고 확신했으니 깊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개화됐다‘는 엄마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였다. - P20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말에 담긴 느낌을 받아들였다. 그 말에 딸려오는 그 모든 표정과 몸짓, 그 안에 담긴 모든 미묘한 욕망과 의도까지도 내 것으로 깊이 흡수했다. 엄마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 전부 미개하다고 생각해. 동네 아줌마들 말은 다 한심해. 엄마의 말과 생각은 얇고 흰 원단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염료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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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거나, 혐오하는 소리에는 일관되고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다. - P95

모든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공포를 갖고 태어난다고들 한다. 높이에 대한 공포와 큰 소음에 대한 공포다. - P96

신체 기능, 특히 감염 전파의 위험과 연결된 신체 기능은 우리에게 경계심을 유발한다. 이런 종류의 반응은 우리 의식 깊숙한 곳에 내장돼 수없이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자기 보호 수단으로 존재해 왔다. - P101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 포크로 접시 긁는 소리, 아동의 비명 등과 같은 다른 범주의 싫어하는 소리에도 공통점이 있다. 모두 강렬한 고음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이런 음향 프로필은 극단적인 고통을 나타낸다. 소음이 실제로는 고통과 관련 없음을 잘 알면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 P102

한 연구에서 인간이 다양한 동물이 내는 울음소리의 맥락을 얼마나 잘 파악하는지 조사했더니, 인간은 고통 속에 있는 동물이 내는 소리를 아주 잘 가려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계에서 보편적으로 통하는 신호가 있다면 비명일 것이다. - P102

우리의 감각은 세상을 경험할 수단을 제공하지만, 역으로 우리의 갑옷 사이로 난 틈새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의지력만으로 자신의 지각을 잠재울 수 없다. 그래서 민감한 귀가 오히려 불리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 - P104

실제로 소음은 측정 가능하고 놀라울 정도로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이 분야의 연구 대부분은 소음이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러 학교를 비교해 보면 배경 소음이 10데시벨만 증가해도 학업 성취도가 5퍼센트에서 10퍼센트 가량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 P105

또한 모든 학생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게 특히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핵심적인 이유는 여러 다른 원천에서 발생한 소음을 우리 귀가 파악하고 있고, 이 정보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뇌의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가서 인지 기능에 추가적인 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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