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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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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미술의 고상함으로 나체화와 누드화에 대한 인식은 음지에서 양지로 많이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처음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며 금기를 깬 몸의 재현에 대해 미술사에서의 전환점들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트파탈은 이렇게 미술사 내에서 몸에 대한 재현에 대한 미술사의 시선, 일반인의 시선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며 현재 우리가 몸의 재현에 대해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인류의 몸은 변화가 없는데 몸에 대한 재현은 그 노출정도 뿐만 아니라 재현의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으며 같은 몸도 그에 따라, 그리고 매우 주관적으로 각각의 시선에 따라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춘화라 치부하며 고상한 미술품의 대열에서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성애 혹은 나체화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에서의 누드는 호기심 어린 시각적 전유물로서의 춘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역사 속의 유물로 인정하고픈 많은 나체화들이 실상은 개인소장을 위한 춘화주문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 놀라울 것도 없다. 언제 어디서나 예술품의 가치는 시간이 흐르고 시대의 욕구에 의해 그 가치를 각각 인정받는 법이니 말이다.

 

저자의 작업을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술사에서의 몸에 대한 묘사, 성에 대한 묘사를 돌아보는 작업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에 의하면 피사체의 연출과 재현에 있어서 몸(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재현의 노출정도와 정숙한 분위기의 정도는 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그림들을 기점으로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왔다. 우리나라의 성애화, 풍속도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뭇 역사서를 통해 알 수 있듯 춘화는 당시에 절대 인정받지 못하는 저속한 민속문화였음이 분명하다. 메이저 예술가가 춘화를 그렸다면 이는 자신의 지위를 걸고 엄청난 금기를 위반한 것이 된다. 숱한 예술품을 수집할 능력이 되는 사대부들의 비난과 함께 당대 유교적 가치관에 반한다 하여 정치적 반역으로도 치부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민화 혹은 풍속화에서의 성애, 나체화가 보존작이 많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은 억압적인 역사를 반증하고 있는 것일게다. 유난히 성적 표현에 대한 억압이 심했던 유교적 가치관의 오랜 장기집권은 우리나라에서의 보존된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트파탈의 사례가 적은 이유로 충분했다. 나는 우리의 풍속화만이 음란함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물론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위태로울 만큼의 금기위반의 작업이었으며 민중 안에서 얼만큼 허용이 되었든지 간에 알려진 화공으로서는 계급없는 농담과 해학의 표현을 꾀했음은 분명하다. 당시의 사회적 계급과 가치관으로 볼 때 오히려 상대적으로 음란하다고 평가를 받는 것은 더했을 시기가 아닌가.

 

나체화, 누드, 혹은 성을 묘사한 미술사에서 작품이 가져온 논란 뿐 아니라 새롭고 흥미로웠던 미술사의 부분을 발견하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여러 예술과 권위적 시선에 대한 책이 있었으나 여성이 알몸을 그릴 권리가 없었던 시기를 묘사한 작품이 특히 눈에 띈 것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마치 알몸을 본다는 권력의 남성성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레옹 마티외 코셰로의 다비드의 화실 풍경은 미술계에서도 나체화에 대한 어느 정도의 남성적 시선의 목적을 인정하고 있다. 보고자 하는 욕구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여러 여성의 몸 재현을 비튼 것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디 시카고의 디너파티혹은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처럼 완연히 드러내버리기, 신비감을 없앤 신체로서의 여성의 몸은 아예 음모조차 없는 성기로 감추어 재현된 고대의 여성의 몸 재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비록 미술계 내에서 이제 몸에 대한 재현에 대한 정치적인 이슈는 여러 시각매체로 전이된 상태이지만 과거 미술에서의 몸 재현에 대해 저자의 방식대로 음란함의 시각적 기준에 대한 논란들은 현재 페미니즘 작업가들의 몸을 이용한 표현, 전위예술가들의 행위예술, 온갖 포르노와 그 구분조차 모호한 조형예술과 비디오 미술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표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피사체를 분절하여 보는 시각보다는 피사체를 재현하는 프레임 밖의 배경과 이미지 소비자로서의 우리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보다 풍부한 미술감상이 되지 않겠는가.

 

말했듯 현대사회에서의 몸에 대한 재현은 단 미술사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미술사 내에서의 몸 재현에 대한 논란의 전환점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시각매체의 등장과 실험적인 종합예술에 이르기까지 몸에 대한 재현의 허용성은 늘 뜨거운 감자이다.(최근 프로젝트 듀오 트러블 메이커의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논란에 대해서도 여러 시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작품 안의 묘사를 음란함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그것은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그만큼 예술계에서의 그 기준은 굉장히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저자가 야릇한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그에 동의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가 남성의 시각을 가지고 매우 솔직하게 대다수의 남성적 시선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음은 매우 가치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체화를 다루면서 성적인 표현이 빠진 해석을 만났던 지금까지의 여러 비평들이 이상하게도 느껴질 정도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그렇다.

 

저자의 연구는 그 주제가 굉장히 구체적인 듯 하지만 방대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글쓰기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미술에 대해서도 그렇고 종교화 혹은 신화화, 미술사별로 나누는 성애와, 동양에서의 춘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미술 등 저자 스스로도 본 연구가 굉장히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야기와 책의 규모는 매우 단촐하다. 일단 그의 1차 연구작업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저자가 앞으로 연구할 또 다른 키워드의 미술이야기가 기대가 되며 이러한 저자의 연구가 미술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도 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은 미술사에서의 나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소재로 글을 분류하고 있기도 해서 시간의 순서대로의 미술사를 기대할 순 없다. 그러나 평면미술 뿐 아니라, 조형예술과 만화, 광고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예술을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볼 수 있는여러 시각 예술에서의 몸에 대한 재현이 얼마나 다양하며 그 해석에 있어 우리가 얼마나 성적인 잠재의식을 발동시키느냐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이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책 중에 언급하는 그림의 위치를 00페이지로 명시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목차에서도 페이지를 볼 수 있으나 정작 본문에는 페이지 수가 빠져 있어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바로 다음 페이지의 그림을 명시하는 경우이므로 크게 그림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으나 내용 중 페이지수를 표기한 것은 불필요한 명시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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