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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김종진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는 공간을 스스로 형성한다. 이 공간이란 시간과 접목하여 각 찰나가 개개의 ‘공간’의 개념이 되기도 함을 전제하고, 따라서 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른 개인적 경험으로서의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의 공간개념 또한 경험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띄고 있으며 이는 건축을 통해 ‘공간지워짐’의 한계를 넘어서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저자가 제시하는 그림 안에서 사진 안에서 그리고 스스로 경험을 통해 공간의 표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및 간접 체험해온 공간에 대한 감정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스스로만의 공감대를 작가, 건축가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은 건축학자로서 공간을 건축에만 제한하지 않고 피아제가 공간에 대한 인식을 건축적 행위로 본 것에 동의하는 매우 폭넓은 공간에 대한 사유라는 점이다.  


이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일수 있으며 체감하는 공간, 상상된 공간일 수도 있다. 나는 저자가 이 공간을 설명코자 하이데거를 끌어들인 이유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공간의 문제와 밀접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존재란 공간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위치조차 상대적인 것이어서 공간과 다른 존재로서만이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니 공간 자체만으로는 그 의미를 말할 수 없으며 그 공간을 체험하는 인간의 감정 또한 같은 공간을 달리 해석할 가능성을 남긴다.  


이 책에서는 곳곳에 tip을 달아 기존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하게 추가되는 공간이미지를 보거나 상상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괴테가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라고 말했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가 르코르뷔지에에 의해 건축으로 표현되었었다는 것도 이 부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음악의 건축적 표현이란 어떤 것일까. 누가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 명제는 아마도 르코르뷔지에 말고도 많은 건축가들의 이상이었을 수 있으며 우리는 우연히 어디에선가 음악적 건축, 음악으로서의 건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는 공간에 대한 체험을 오감체험의 장으로 전제함으로써 건축 또한 시각적인 것에서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여러 감각으로 다시 보게 한다.
하나의 벽은 누군가에게는 아이들의 자라는 키를 표시하는 시공간으로서 체험되는 공간이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나무처럼 내 등을 받쳐주던 여가의 시공간으로 남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김영갑의 제주도 사진과 김아타의 사진작업처럼 순간, 혹은 몇분, 몇시간의 시공간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공간 또한 존재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개개인의 그리고 매순간순간의 체험으로서의 공간에 대해 이렇듯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융의 경험을 얘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적어낸 글들을 조금 더 가깝게 이해하려면 나만의 고유경험과의 유사성에서만 약간이나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감대란 아주 약간의 유사감정만으로도 형성된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보다 작가와 설치가의 의도에 가까워지려면 직접 체험해보는 공간 또한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보는 자의 감정상태, 기후, 건강 모든 변수가 순간순간 다른 것처럼 그 누구에게도 같은 감흥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빛과 어둠에 대한 사회적 언어가 있다면 영화적 언어 정도가 아닐까. 영화 속 영웅들의 시련-통과의례 장면은 보통 어두운 시공간으로의 입성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모든 시련을 이겨낸 후 영화의 엔딩은 해가 뜨고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어쩌면 이러한 시공간 설정은 실제 시간적 배경을 그렇게 지정했다 하더라고 우리의 인식 속에 시련과 빛의 정도의 상관성에 대한 깊은 보편성에 의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적 배경으로서라기 보다 캐릭터의 현재 상황과 심리상태를 미장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심리적 시간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공간에 대한 사적인 에세이인 동시에 건축이 형성하는 공간과 인간의 교감에 대한 깊은 질문을 하게 하는 건축학자의 화두던지기이도 하다. 저자가 끊임없이 등장시키는 공간의 빛에 대한 사유가 가장 그렇다. 나는 저자의 의도대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또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둠을 배제해버린 현대 건축보다는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부아 도이에 성과(76p) 콜롬바 무제움(171p), 저자가 영국에서 우연히 발견한 성의 폐허(161p), 토로네 수도원(215p), 뒷 표지에도 제시된 저자의 ‘헛간’ 이 그것이다. 저자가 영감을 받아 결국은 만들어낸 공간 ‘헛간’은 그의 공간에 대한 사유, 건축에 대한 가치관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둠이 존재할 때만이 빛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의 산란을 감상하게 하는 고유한 공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는 듯 하다. 또 저자가 영감을 받았을 수많은 저 사례들은 오래된 그림자의 냄새가 날 것 같은 그 공간들은 약간의 경외감과 숭고함 경건함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과장되게는 미세한 공포와 설렘 내지는 떨림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감정을 오가며 사람들에게 조금씩 레벨의 차이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빛만이 존재하는 건축양식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더욱 건축으로 형성되는 공간, 내부를 인식하기 보다는 외부와 형태를 중시하고 시각적인 감상에 치우쳤던 것은 아닐까.

이는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일 뿐 아니라 수많은 건축학도와 건축가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단적으로 스미스 부부의 오래된 집과 전몽각의 ‘윤미네 집’ 사진처럼 사람이 일상을 살아내는 그 공간에 시간과 생활, 그리고 기억이 쌓이면서 공간에 대한 각각의 감성들이 발생한다. 공간 또한 체험으로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며 이러한 일상과 체험은 어떻게 생겼는지가 중요한 건축물, 사물로서의 공간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집’에서는 수많은 집신들이 등장한다. 도시의 재개발 지역 옥탑방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주인공은 어렸을 적 떠나야 했던 집과 그 집을 추억한다. 잊고 있었던 집에 대한 기억들은 지금은 누군가에게 폐가로 보일 공간도 옛 시공간으로 되돌리는 힘을 가진다. 집신들은 그 집에 대한 오랜 기억과 추억이다. 집이 그 기능을 잃고 인간에 의해 포기되고 헐릴 때 집신 또한 소멸된다. 마치 사랑을 잃을 때처럼 기억과 시공간이 부정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단적으로 우리의 ‘집’을 생각한다면 공간의 의미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으며 일상과 체험으로서의 공간, 훼손이 아닌 다른 표현으로서의 재건축과 인간과 자연 중심의 공간 표현이 그립고 절실하다는 생각이 더욱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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