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이야기를 듣노라니 ‘독짓는 늙은이’며 영화 ‘취화선’이 떠올랐다. 화가 장승업이 실제로 가마에 몸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에서 불 끓는 가마로 몸을 던지는 배우의 모습이 인상깊게 남았나보다. 물레를 돌리고 묵묵히 가마를 채워가는 도공들의 모습은 글과 미디어로 재현된 가마 혹은 도공들의 모습 때문인지 수도승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뭔지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흙을 매만졌을 이름 없는 수많은 도공들의 삶에 깊은 연민을 드러낸다. 저자는 역사 속 이야기와 함께 사금파리 조각들에서 가마터의 분위기며 도공의 인상까지 상상해낸다. 아마도 저자는 인생의 전환기에서 도자기를 만나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가마와 도공을 마음 속으로 만나며 느림의 자유에 대한 철학을 굳힌 듯 하다. 저자는 아마도 당시의 도공이 되어 마음 속으로 흙을 다지고,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불을 때지 않았을까. 이 책에 소개된 가마터를 보자면 왠지 ‘깨진 청자’라는 말에 짝처럼 대구라도 이루듯 터만 남아 있다. 저자는 이미 생을 다한 가마터를 찾고 사금파리들을 만나고 사금파리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금파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역사 속 그림들이 이야기를 하는 냥 재미있기도 하고 풍요롭진 않아도 과거를 추억하는 그 내용이 현재를 좀 씁쓸하게 여겨지게 한다. 표지의 사진처럼 모든 사금파리들이 영롱한 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갑발에 붙은 사금파리의 모습도 책을 어느 정도 읽고서야 ‘갑발이구나, 붙은 청자였구나’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책에 등장하는 청자들은 형태를 짐작하기 힘들다. 자기이름을 소리낼수도 없을만큼 훼손된 상태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귀하고 비싸다는 청자의 빛을 볼 수 있는 사금파리는 몇 안된다. 그나마 온전한 빛은 표지사진의 그것이 최상이고, 온전한 형태는 진안의 가마터 할머니에게서 ‘빅딜’을 통해 받은 사발 정도이다. 온전하다 싶으면 박물관에 진열된 자기가 분명하다. 온전하지 않아서 아쉽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게는 진열되고 박물된 자기보다는 이젠 빈 터만 남아 있는 가마터라도 찾고, 그 자리에 아직 남아있는 사금파리에게서 역사와 도공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 소중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이런 저자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가마터 여행의 발걸음에 나를 동참시켰을 것이다. 이 책은 가마터 발굴과 역사 속의 청자를 알리는 두껍고 큰 사이즈의 도록들에서 벗어나 일반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데도 의미가 있다. 발굴된 정보 중심의 도록 같았으면 깨진 조각만 남아 형태도 상상하기 힘든 사금파리의 온전한 모습을 그림으로라도 제시했거나 그나마 좀더 온전한 형태가 남은 청자가 모델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인생의 전환점에 있는 저자의 이야기로 시작해 가마터를 찾는 발길과 에피소드와 청자의 역사적 배경이 주를 이룬다. 자연스레 역사적 배경의 시간적 순서를 따르는 가마터 이야기에는 가마터의 현재의 모습과 사람들이 담겨있다. 정보와 학술적 용어로 가득한 도록들보다 실제로 무게도 가볍고 내용도 저자의 감수성에 무게가 실린다. 여행서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서 우리나라 기행소개서처럼도 느껴지고 생활 밖에 있던 우리나라 청자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도 되었고 유럽과 아시아 자기의 역사를 맛볼 수도 있다. 또, 청자 가마와 발굴된 자기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할 듯 하다. 발굴된 자기들은 잘 보존되고 관리되고 있는가. 적법한 조사과정이었는가. 수익사업으로서의 가마터 발굴과 조사 등이 연관되면서 유물 자체로서의 대우에 대해 궁금하고 염려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개인의 자산이 아닌 역사 자체의 자산으로 여겨지길 기도해본다. 이러한 저자의 메시지도 이 책의 주요목적의 하나가 되었겠지만 책을 덮는 지금도 자기들보다 더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저자의 도공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글귀 전체에 드러난 현대인의 정서에 대해서다. 아마도 나는 지금을 사는 우리가 저자의 여행마냥 도공의 하루하루를 상상해보고 도공의 욕망이 자유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해보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