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 - 당신을 속여왔던 대중문화 속 주인공들의 엉큼한 비밀, 개정판
마크 슈미트 지음, 김지양 옮김 / 인간희극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크 슈미트의 꽤 오래전 스머프 읽기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마크 슈미트의 이름이 잘 알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와 게이즘으로서의 스머프라는 그의 해석은 꽤 회자되었고 그로 인해 불붙은 스머프 토론은 스머프들이 이성애자라는 전제 하에 스머펫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담론 또한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내에서 스마트폰의 아이콘으로 다시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스머프들은 캐릭터성이 부각되고 있을 뿐이지만 이렇게 현재 가까이에 있는 스머프 세계를 읽음으로써 여전히 유효한 사상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시기적으로 스머프가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지는 30여년이, 지면만화로 등장한지는 50여년이 되었다고 하지만 새롭게 스마트 폰으로 재등장한 스머프 세계를 읽는 마크 슈미트의 이야기는 현 세대들에겐 흥미로운 해석일 것으로 믿는다. 또 아직 국내에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3D 애니메이션 ‘스머프’가 2010년에 제작된 바 있다. 뉴욕의 스머프라 버섯모양의 집에 사는 우리가 아는 스머프 마을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그것도 트렌디한 뉴욕의 스머프라니,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더라도 아마도 이 영화는 마크 슈미트의 사회주의적 스머프 사회와 동성애에 대한 주장을 뒤엎는 스머프들이 될 것이 명백하다.

이미 08년 당시에도 여러 해를 거친 글을 엮었다는 시대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마크 슈미트의 비평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캐릭터라는 유동하는 의미 외에도 존재한다. 마크 슈미트의 비평방식은 주로 네러티브와 캐릭터 읽기에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만의 개성있는 시선을 유지한다. 이러한 마크 슈미트 식의 미디어 읽기가 미디어와 이미지를 읽고 글로 쓰는 연습을 하는 학생들에게 단초를 제공할 듯 하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도, 그리고 개성있는 이미지 읽기의 방향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학생들이 마크 슈미트를 참고할 때 디즈니의 공주 담론이나 브랏츠 인형 담론들이 이제는 결코 새로운 논의는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접해왔던 그리고 현재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미디어 이미지들이 대부분 마크 슈미트의 비평소재이기 때문에 그의 비평은 이해와 공감이 쉽다. 마크 슈미트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기보다는 그의 의견을 현시점에서 다시금 비평하고 다른 의견을 글로 옮기는 연습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마크 슈미트의 논리성보다는 마크 슈미트가 논제를 제시하는 새로운 시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마크 슈미트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동의를 구하기 보다는 독자에게 자신만의 시선을 찾는 단초를 제공하는 데 가장 큰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소 정치적인 몇권의 책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세계와 폭력에 관한 혼자만의 사유에 빠져있곤 했다. 그래서인지 마크 슈미트의 수퍼맨이야기가 영웅을 통한 또 다른 지배이데올로기 창출에 관한 생각을 부추긴다. 수퍼맨처럼 다소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때로 부도덕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영웅’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 폭력에 대한 폭력의 보복은 영웅에 의해서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폭력을 폭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숱한 헐리웃 영화에서도 학습되어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짓고 있기도 하다. 마크 슈미트의 ‘수퍼맨의 변명’ 편에서 제시된 미국의 예방적 선제공격이었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수퍼파워라는 옷을 입고 세계의 옳고 그름을 자국 내에서 결정했다는 의견은 특정한 비평가의 시선이라기보다 세계의 시민들의 다수가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내용이다. 그러나 감히 바지위에 팬티를 입은 미국에 대해 반발하는 목소리는 비실하다. 마크 슈미트의 눈치를 본다는 말처럼 국제사회에서 미국이외의 국가 차원에서 관심가져야 하는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예방적 선제공격의 대상 혹은 국제사회에서의 소외로 가는 비판에 휩싸일 위험을 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이관련 영어 표현들이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사용의 변화를 ‘사우스 파크’ 등의 미디어에서 읽는 작업 또한 눈여겨 본 부분이다. 엄연히 말하면 뉘앙스만 남고 의미는 전혀 다르게 변화하는 언어문화의 유동성은 언어파괴의 논란을 떠나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면서 우리가 인터넷의 발전을 필두로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신조어들에 대한 미디어 재현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듯하다. 또, 특히 한국에서 우리에게 마크 슈미트의 작업이 의미있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점은 그가 한국과 인연이 있으며 그로 인해 그가 읽어내는 한국영화들이 기존의 한국 평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논점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민족문화의 바깥에서 보는 우리의 영화읽기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반가웠다. 영화 ‘친구’와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영화를 조폭과 북한에 대한 한국인들의 같은 반응으로 읽는 마크 슈미트의 이야기가 새롭다. 마크 슈미트의 이야기가 국외의 반응을 대표하거나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외부에서 새롭게 우리의 민족성을 미디어에서 읽어내는 그의 작업은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보다 더 다양한 다른 외부의 해석들을 접하고픈 욕심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