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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본격 미스터리의 묘미는 작품 속에서 '덮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치열한 두뇌싸움 뿐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도 한바탕 지적 게임이 벌어진다는데 있다. 이 작품은 폐쇄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이 한정된 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독자의 두뇌 게임을 유도하는 정형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외양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완벽한 '도서 추리(Inverted mystery)'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도서'란 용어는 도치서술(倒置敍述)의 줄임말이고, 도서 추리는 처음부터 범인이 밝혀지고 그가 주도면밀한 범죄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묘사한 후, 완벽하다고 여겨졌던 범행이 폭로되어 지는 과정을 그리는 미스터리의 한 형식을 말한다. 일반적인 미스터리가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방법이 무엇인지가 핵심이라면, 도서 추리는 이러한 것들이 이미 초반에 드러나기 때문에 진실을 덮으려는 필사적인 방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심리 묘사 등이 얼마나 치밀하게 묘사되는가에 작품의 성패가 갈린다.
졸업 후 제각각 생활하던 대학 동아리 선후배 일곱 명이 서양식 대저택을 개조한 으리으리한 고급 팬션에 모인다. 오랜만에 다 함께 모여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기를 기대하지만, '후스미'는 후배인 '니이야마'를 살해한다. 그는 이 모임을 살인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마침내 그것을 실행한 것이다. 방문을 잠가 놓은 채로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니이야마'에 대해 모두들 비염약 때문에 깊은 잠이 든 탓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단 한 사람 '유카'만은 달랐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덮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은밀하고도 치열한 知와 知의 대결로 이어진다.
날카로운 직관과 냉철한 지성을 가졌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후스미'와 '유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서로 닮았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후스미가 겉으로 보이는 차가운 이성의 내면에 뜨거운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반면에, 유카는 감정마저도 냉철한 이성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학창시절 이것을 분명히 깨달았던 후스미는 유카와 연인관계로 진전시키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둘을 범인과 탐정으로 갈라 놓는다.
'이시모치 아사미'는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 수는 있지만, 미스터리의 장르적 장치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재능이 있다고 느껴진다. 한정된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한 '밀실살인'이라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는 소재를 흥미롭고도 안정적으로 잘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소설은 흥미로운 본격 미스터리지만, 거의 모든 공력을 미스터리 그 자체에만 집중하다보니 아쉬운 부분도 눈에 보인다.
먼저, 탐정격으로 등장하는 유카는 천재성이 지나쳐 그녀의 논리적인 추론과정 조차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이고, 마치 '논리기계'를 곁에 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쉬움이 많았던 부분은 후스미가 니이야마를 살해한 동기가 일반적인 독자들의 정서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2006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랭킹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에 이어 2위로 밀린 이유로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 미스터리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동기 따윈 필요없어!'라고 외치지는 않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