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경제 수첩 양철북 청소년 교양 1
크리스티아네 오퍼만.한대희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는 아이들이 돈이나 경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돈을 밝히는 모습은 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어른들이 나무랐다. 일년에 한 번 세뱃돈을 받으면 엄마가 관리해 주겠다면서 약간의 과자값을 남기고 모두 가져가셨으니,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어느 집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용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라던 우리 어린 시절은 어느덧 지나고, 이제는 서점의 아이들 코너에 경제 관련 서적들이 늘어서고, 열두살에 부자가 되었느니 용돈을 제대로 쓰는 법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다. ‘안빈낙도’에서 벗어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구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처럼 바뀐 세대를 위해 어른들도 경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거시적, 미시적인 공부를 할 필요가 생겼다.

<청소년 경제 수첩>은 체계적으로 경제 현상을 가르쳐주는 방식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물을 법한 경제 현상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생산과 소비, 노동과 소득, 저축과 투자, 나라의 경제, 세계의 경제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 각 장마다 20여가지의 경제 현상을 설명한다. 독일의 크리스티아네 오퍼만이 쓴 책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다시 쓴 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최근 경제현상을 많이 다루고 있으므로 실생활에 바로 적용이 되겠다.
경제라고 해서 돈과 상품이 오고가는 설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는 사회, 정치,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새만금 간척사업의 경제성을 설명하면서 환경을 이야기하고, 저축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면서 저축이 항상 미덕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양면성을 이야기한다.
제목은 청소년 경제 수첩이지만 경제에 대해 어려워하는 어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부의 증식을 위한 재테크에만 한정되어 경제를 생각하지 말고, 전체적인 경제의 대략적인 면을 보는 기회로 삼으면 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참 일본 소설이 많이 들어왔고 지금도 들어오고 있는 중에, 요즘은 ‘위화, 쑤퉁 등을 비롯해 류헝, 모옌, 차오원쉬안 등 여러 중국 소설가들의 작품이 들어온 조용한 중류(中流) 열풍’이라는 기사가 뜰 정도로 중국 소설도 꽤 눈에 띈다. 위화의 작품들 중에서 예전에 읽은 <허삼관 매혈기>는 생계를 위해 피를 파는 허삼관의 이야기였다. 웃어넘길 수 없는 삶의 신산함이 가족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중국인들이 아주 길하게 생각한다는 빨간색 표지를 넘겨 보니 저자인 위화의 사진과 이력이 실려 있다. 아주 수더분하게 생기셨다.
서문은 이번 한국어 개정판 서문, 1996년에 처음 펴낸 한국어판 서문, 1993년의 저자 서문 등 서문만 해도 세 편이 실려 있다. 각 편마다 시기와 대상이 달라서 서문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을 보면 이 책의 원제는 활착(活着)이라고 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활착은 농업 용어로서, 옮겨 심거나 접목한 식물이 서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또는 그런 일을 뜻한다. 사람의 인생도 식물의 한살이와 같아서 뿌리를 내리기까지가 참 어렵고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와 열매도 튼튼하게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활착은 한 사람의 역사에서 참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인생>은 액자소설과 같은 형식이다. 시골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팔자 편한’ 직업을 가지게 된 나는 시골 길을 가다가, 밭갈이에 꾀를 피우는 늙은 소를 나무라던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난다. 소를 잠깐 쉬게 하면서 나무 그늘에 함께 앉은 나는 푸구이의 인생에 대한 길고 상세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나라만큼이나 격변이 많았던 중국의 근현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푸구이 가족의 모습은, 개인의 힘없음과 더불어 이념의 폭력, 가족의 소중함을 누누히 이야기한다. 굶어죽을지라도 가족이 헤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업고 갔던 펑샤를 다시 데리고 오는 모습,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겨우 얻어온 쌀을 한줌 남에게 주고서 아까워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딸의 소식을 듣기 위해 성안에 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 아이를 혼내고서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아버지의 모습 등은 참 사실적이면서 감동적이었다.

푸구이, 자전, 펑샤, 유칭, 얼시, 쿠건 등의 낯선 이름들은 배경이 중국임을 끊임없이 환기시켰지만, 이들의 모습과 생활, 문화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와 정말 비슷해서 그만큼 친숙했다.
아흔이 넘은 우리 할머니가 일제 시대와 전쟁을 나던 때의 말씀을 하시던 중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많은 아이들을 키우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보이신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그 많은 고생과 시련이 탈색되면서, 잘 견뎌온 당신이 대견스럽기도 한 마음에 한 줄기 눈물로 배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나도 위화의 <인생>을 읽으면서 푸구이 노인의 끝없는 고난과 그 중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배려에 슬며시 눈물을 흘리게 되었으니, 내 눈물은 경험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들의 삶에 빠져들게 만든 위화의 문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끝까지 사랑을 놓지 않은 푸구이의 모습은, 소설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르겠으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2시간에 걸쳐 한 사람의 인생을 죽 지켜본 듯한 기분좋은 피곤함으로 책을 덮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 풍경들
김원일 지음 / 작가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작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작품이 쓰여지던 시대의 상황과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고 하지만, 단편적인 독자의 눈으로는 한단계 필터를 거치고 소설적 상상이 들어간 작품 안에서 작가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육성이 고스란히 들어간 이런 책이 반갑게 다가온다.
김원일 선생님은 느낌표 추천도서로도 유명해진 ‘마당 깊은 집’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난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세세한 묘사와 더불어 시절의 간난함을 느끼게 해 준 묘사는, 그의 삶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생명력이 있었음을 다시 알게 되었다.

‘기억의 풍경들’의 초반은 뚜렷한 경향이 없이 날씨 이야기도 나왔다가 정치 이야기도 나왔다가 여자 이야기도 나오고, 제목에 충실하게 그의 기억 속의 풍경들을 이야기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들도 상당하고 세대 차이도 조금은 느껴진다. 접속사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건조한 문장 때문에 말이 턱턱 막히는 듯도 하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후반부, 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 슬슬 사라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좌익으로 사상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단신월북하고, 어머니와 4남매는 가난으로 어렵게 살아갔다.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고 건강도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던 작가의 삶은 이념과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토로하도록 만들었으니, 그런 주제의 편향성을 아쉬워할 수 없었다.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써야만 하기 때문에 쓰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작품과 연계하여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40여년의 문학 생활을 조용히 돌아보는, 일종의 짧은 자서전이 된 듯하다. 전쟁과 빈곤 외에 장애와 그림까지,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인 사랑보다 읽을 거리가 풍부하다. 가벼운 내용과 여성적인 필체를 선호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잘 읽히지 않을 수도 있음이 아쉽다.

예순을 넘긴 작가의 음성은 차분하고 낮았으며 깊이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김원일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쿨투라 CULTURA 2007.여름 - 제6호
작가 편집부 엮음 / 작가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나이가 들수록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던 때 30초 이상 집중하지 못하다가 점점 더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알았는데, 이제는 그 집중력 시간의 정점을 지나서 떨어지고 있는 시기가 된 것일까.
장편소설을 읽을 때는 잡고서 죽 읽어나가야지, 그렇지 않고 띄웠다가 읽으면 앞의 이야기를 조금은 잊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요즘은 단편집이나 에세이, 똑똑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좋다.
이런 종류에는 잡지도 들어간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꼭 패션잡지나 육아잡지, 주부잡지를 읽을 필요는 없다.

'쿨투라'는 일반 단행본만한 크기라서, 보통 A4 사이즈는 되는 일반 잡지에 비해 휴대가 간편하다. 그리고 낯익은, 좀 나이가 있는 저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교육에 대한 글을 써 주신 김진경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 전교조의 파동을 겪던 선생님께서 읽어보라고 주신 책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의 작가라서 참 반가운 마음에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는 그때와 비교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는 교육 현실이 참 암담하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신념을 올바로 지켜나가는 그의 뚝심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장승 이야기'는 잊혀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아쉬움으로 좀더 신경써서 읽었고, '바람의 딸' 한비야씨의 인터뷰는 약간 삐딱해 보이는 인터뷰어의 어투에 그리 공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좋은 기회였다.  
기행문도 있고 논설문도 있고 사진 이야기도 있고 인터뷰도 있고 공연 이야기도 있어서 지루할 새 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전문 기자들이 작성한 글이 아닌 것들도 끼어 있어서 어딘가는 서투르고 약간 버거운 면도 있다. 그러나 두꺼운 문학잡지의 평론이 어려운 사람이나 뭔가 내용이 있는 책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골라도 좋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명한 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다. 이는 순서대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고, 꼭 끝까지 다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사람에 따라서 부정하다가 죽음을 맞을 수 있고, 5단계를 순조롭게 거쳐서 수용하면서 평화로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운명을 가졌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 자기가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이사카 코타로의 <종말의 바보>에서처럼 앞으로 8년 후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세상이 끝날 거라는 ‘강제적인 죽음’이 전지구적으로 선고되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불치병을 선고받는 것처럼 이들은 종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폭동과 살인, 혼란과 무법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 그 발표로부터 5년이 흘러서, 그사이 죽을 사람은 죽고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조용히 살아가는 힐즈타운의 여덟 이웃들이 <종말의 바보> 주인공들이다. 소란 중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즈넉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운동을 시작하는 고등학생이 있고 비디오 대여점을 이어가는 청년이 있고 축구모임이 생겨나고 슈퍼마켓이 다시 문을 여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다. 젊은이는 애인을 만들고 부부는 아이가 생긴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온기를 나누는 새로운 ‘가족’도 탄생한다. 맥놓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생활이 아니라, 우울함에 눌려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생활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소중하고 더 평화로워야 할 소중한 시간이 된다.
앞으로 남은 3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다. 지금 간신히 얻게 된 평화로움은 어쩌면 ‘수용’이 아니라 ‘타협’일지도 모른다. 소행성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들은 더 우울해지고 수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헤치고 나온 이 가족들이라면 소행성이 정말 충돌하든 그렇지 않든 잘 해 나갈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다른 연작소설들에서도 카메오로 출현하는 이들을 자주 보아왔는데, 좀 늦게서야 읽은 <종말의 바보>에서 그 유기적인 연계성을 가장 강하게 느꼈다. 너무 우연이 남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으로 인해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의 따뜻한 이야기를 통해 종말에 대해, 이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종말의 바보’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