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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명한 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다. 이는 순서대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고, 꼭 끝까지 다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사람에 따라서 부정하다가 죽음을 맞을 수 있고, 5단계를 순조롭게 거쳐서 수용하면서 평화로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운명을 가졌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 자기가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이사카 코타로의 <종말의 바보>에서처럼 앞으로 8년 후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세상이 끝날 거라는 ‘강제적인 죽음’이 전지구적으로 선고되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불치병을 선고받는 것처럼 이들은 종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폭동과 살인, 혼란과 무법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 그 발표로부터 5년이 흘러서, 그사이 죽을 사람은 죽고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조용히 살아가는 힐즈타운의 여덟 이웃들이 <종말의 바보> 주인공들이다. 소란 중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즈넉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운동을 시작하는 고등학생이 있고 비디오 대여점을 이어가는 청년이 있고 축구모임이 생겨나고 슈퍼마켓이 다시 문을 여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다. 젊은이는 애인을 만들고 부부는 아이가 생긴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온기를 나누는 새로운 ‘가족’도 탄생한다. 맥놓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생활이 아니라, 우울함에 눌려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생활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얼마 남지 않아서 더 소중하고 더 평화로워야 할 소중한 시간이 된다.
앞으로 남은 3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다. 지금 간신히 얻게 된 평화로움은 어쩌면 ‘수용’이 아니라 ‘타협’일지도 모른다. 소행성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들은 더 우울해지고 수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헤치고 나온 이 가족들이라면 소행성이 정말 충돌하든 그렇지 않든 잘 해 나갈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다른 연작소설들에서도 카메오로 출현하는 이들을 자주 보아왔는데, 좀 늦게서야 읽은 <종말의 바보>에서 그 유기적인 연계성을 가장 강하게 느꼈다. 너무 우연이 남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으로 인해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의 따뜻한 이야기를 통해 종말에 대해, 이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종말의 바보’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