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숨기고 싶은 그들만의 세계사 - 망각의 20세기 잔혹사
정우량 지음 / 리빙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연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폭격으로 정세가 시끄럽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보도가 하도 편파적이다 보니 그 정세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쉽지 않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작고 주변의 이슬람 국가에 폭 둘러싸여서 불리한 입장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이제 그들의 언론 플레이와 숨겨진 진실을 알고 나니 이스라엘은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어제 오늘은 용산 철거 과정에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철거로 인해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숨지는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고 해서 마음이 참 착잡하다. 예전의 상계동 철거민 때도 그랬고 달동네 철거 때도 그랬고 언제는 안 그랬는가마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에도 똑같은 수단과 똑같은 방법의 우격다짐 진압으로 일관하는 것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져서 더 그렇다.
<숨기고 싶은 그들만의 세계사> (2008, 정우량 지음, 리빙북스 펴냄)에는 '망각의 20세기 잔혹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까만 바탕 위에 도드라진 세계 전도에는 굵고 깊은 균열이 나 있다. 대륙을 관통하고 이리저리 갈라놓은 균열들은, 벌써 그 잔혹함이 의도적으로 잊혀진 채 얕은 흙으로 살짝 가려진 상태인 것이다. 이미 잊혀졌으나 잊지 않았어야 하는 것들이 전쟁과 대량학살, 혁명과 쿠데타와 스캔들이라는 두 항목 아래 조목조목 나열되고 있다.
저자인 정우량님은 국사학과와 저널리즘을 전공하였고, 3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는 동안 절반 이상을 국제 문제를 다루는 분야에서 일한 후 정년퇴직하였고, 유럽 각국의 역사와 정치, 경제, 문화에 두루 관심이 많다고 했다. 저자는 '현재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하는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구명'(6쪽)하기 위해서, 그간의 수련과 공부를 통해 이 책에 실린 각 사건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넓고 깊게 다루고 있다.
1장 '전쟁, 대량 학살' 항목에서는 스페인 내전, 타이완 학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독일 드레스덴 폭격, 미국의 필리핀 정복, 홀로코스트, 오키나와의 비극을 다루었다. 전쟁 중에, 또는 식민지 건설을 위해 일어난 강자의 약자에의 학살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저자가 홀로코스트 항목의 마지막에 이야기하듯,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에 대한 학살처럼 말이다.
2장 '혁명, 쿠데타, 스캔들'은 1973년 칠레, 1953년 이란, 체 게바라, 1968년 혁명 등 혁명과 쿠데타를 이야기하고, 콜걸 크리스틴 킬러,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 등 국제 규모의 스캔들 이야기가 들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실상 잘못 알려진 것들이 아라비아의 로렌스, 윈저공 이야기 들에서 느꼈고, 잘 모르고 있었던 칠레와 이란의 쿠데타에서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역사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하나의 사건은 단독으로 발생해서 진행되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에 의해 일어나고 수많은 결과를 남기며 사라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나라에 국한해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라면 그 구조를 살피기도 쉽지 않겠다.
저자는 이 책에 실은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간간이 등장하는 흑백 사진들도 당시의 분위기를 추측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가 소화해준 역사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는 것도 힘들긴 했지만, 벌써 조용히 잊혀지기에는 너무 귀중한 사건들을 다시 한번 짚어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