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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 오래된 여행자 이지상 산문집
이지상 글.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매일매일 꽉 짜인 일상, 휴가라고는 여름에 일주일 정도가 고작이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기에는 경제적인 부담도, 돌아와서의 막막함도 엄청나다. 따라서 TV에서 보는 수많은 여행 인파나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여행 서적을 보며 언젠가 나도 떠날 날을 기약하기보다는, 그들의 자유와 나의 부자유와 그 사이의 우울함을 느끼게 되는 적이 많았다.
그래서 외국여행이 자유화된 1988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여행하고 글 쓰고 사진 찍으며 살아온, 오래된 여행자로 자처하는 이지상 님의 글을 읽어보고 싶었다. 내게는 사치로 생각되는 여행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적중했으니,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도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적용될 깨달음과 위안이 녹아 있었다.
여행과 현실 사이, 길에서 주운 빛나는 것들, 여행자로 살고 싶으세요?, 지금 그곳에서 행복해야 해의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진 안에는, 여행할 때의 마음가짐과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주옥같은 순간들, 여행가 또는 여행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 주는 말들, 돌아온 여행자에게 주는 말들이 들어 있다.
보통의 여행서에는 여행 떠나기 전의 준비 과정을 잠깐 이야기하고, 여행 중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지상 님의 이번 글은 구체적인 테마로 떠난 여행서가 아니라 산문집으로, 그간의 오랜 여행에서 느낀 감상들이 주를 차지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여행 중, 여행에서 돌아온 후까지 모두 다루는 것이다.
그는 내려 놓는 것의 가벼움과 여행지에서 보석 같은 순간을 만나는 즐거움, 먼 길에서 느끼는 외로움, 한계 효용 체감에 따른 설레임의 감소, 돌아와서의 현실 적응의 어려움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글들은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서를 찾아읽는 적극적인 여행자들 뿐만 아니라 떠나기를 귀찮아 하고 주변 배경이 없이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떠나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볍게 감싸 안는다.
항상 북적거리고 현란한 축제에 참가하고 사막을 건너고 정글을 트레킹하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으로만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여행이 길든 짧든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좀더 깊어지고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소박하게 평범한 일상 속의 작은 행복도 쌓기를 권한다. 지금, 이 곳에서 말이다. 왜냐하면 삶도 하나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나라의 특색 있는 사진들, 그리고 그가 마음으로 끌어안아 온 것들을 읽는 즐거움은, 젊은이들이 외국에 한번 다녀와서 펴낸 더 다채롭고 더 활발하고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여행서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그래, 이제는 해외 여행객들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필요는 없겠다. 눈만 돌리면 동네 뒷산도, 시내 한 복판도, 국도변의 작은 마을도 여행지로 다가올 것이고, 그 안에서 바로 지금, 이 곳에서 나는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반갑게 웃을 수 있는 마음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