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개미지옥 - 2007년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문학수첩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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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의 판타스틱 세일. 이 세일 기간 동안 백화점안에서는 어떤 판타스틱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 소설은 청소부 아줌마가 한 여자를 화장실안에서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이어트를 하던 같은 판매사원이 쓰러진 것이 아닐까 해서 달려온 유경은 쇼핑백을 움켜잡고 쓰러져 있는 이 여자의 검은 매니큐어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자의 사인은 질식사. 첫 부분만 보면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같지만 실상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다보면 긴장감보다는 씁쓸함이 더 와 닿는다. 작가의 현미경같이 세밀하고 현실적인 묘사에 가슴이 뜨끔해지며 정말 이 사람들이 내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사건의 중심에 선 반짝이는 카디건

 

등장인물인 지영, 소연, 영선, 정민, 윤경, 미선, 현주 이 모든 여성들이 탐하면서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이 바로 이 카디건이다. 매장에 내놓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버린 이 카디건. 이 카디건을 모두가 갖고 싶어 했던 것은 그 옷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탓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카디건을 손에 넣은 사람도 있고 넣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반짝이는 스팽글이 달린 카디건 하나 때문에 검은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의 소리 없는 비명이 일어날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환상에 대한 일그러진 집착

 

백화점은 속삭인다. 이건 특별한 거야. 이걸 가지면 너도 특별해질 수 있어.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어. 그러나 이 속삭임은 오직 “돈”을 가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건 오직 “돈”뿐이야. 백화점은 이러한 현실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깨우쳐 준다.

<백화점이 그리워졌다. 거기서는 언제나 정당한 서비스를 요구 할 수 있는데. 백화점에 가면 민주주의가 실감난다. 어디에 살든, 범죄자든 인간쓰레기든 물건 값을 지불 할 능력만 있으면 물건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 본문 속 현주의 말 ->

백화점은 그 사람이 나이가 적건 많건 생김새가 이상하건 예쁘건 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물건 값을 지불 할 능력만 있으면 물건 앞에서 모두 평등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평등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허망한 것이다. 물건을 사고 나면 곧 이 신기루는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은 카드 청구서와 가난한 지갑뿐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것을 알면서도 백화점이 뿌려대는 매력적인 환상의 가루에 도취되어 점점 그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돈이 없어 허덕이면서도 카드를 돌려막고 매춘을 하는 것은 채울 수 없는 정신적인 고독함, 텅 빈 마음에서 오는 외로움을 다른 누군가와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에서 오는 집착인지도 모른다. 

<왜 발밑을 쳐다보지 않는지 모르겠다. 저러다 언제 쩍하고 바닥에 금이 갈지 모른다. 그때는 아무도 구해 줄 수가 없다. - p133>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개미들이 곧 죽을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개미지옥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결핍에 시달리는 인물들

 

각 인물들은 모두 결핍에 시달린다.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대학이라는 더 나은 학력이었다면 이런 곳에 근무하지 않을 텐데. 하며 학력 콤플렉스에 빠진 미선, 오로지 돈과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망가져 버린 영선, 예쁜 옷을 입겠다는 일념으로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지영, 명품화장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정민. 자신의 직업에서 오는 열등감과 스트레스를 물건을 사며 느끼는 우월감으로 푸는 현주까지. 이 들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두각시처럼 허우적거리는 지금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그래도 세일은 계속된다.

 

소설에서 현주는 검은 매니큐어를 칠한 채 화장실 첫 번째 칸에서 지영은 다이어트로 인한 탈진상태로 쓰러져 화장실의 마지막 칸에서 발견된다. 백화점은 아직도 세일 중이었고 계절마다 이 세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사실 백화점이라는 데가 좀 그렇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주인공이다. 직원들은 물건을 파는 도구에 불과하다>

사실 물건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물건이 사람들을 멸시하고 하찮게 보게 되었다. 뒤죽박죽 세상에 가치라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만을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물질만능주의시대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이게 바로 자본의 힘이라는 거야. 없는 놈들은 그저 큰 놈 밑에 붙어서 한 푼이라도 모을 생각을 해야 돼. 지깟 것들이 무슨 수로 백화점을 이긴다고 그래. p80>

소설 속 등장하는 노인의 말이다. 이 노인은 백화점에 세를 들어 장사를 한다. 매춘을 알선하고 상품권을 떼다 주면서 수납을 받아 챙기는 이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왜 일까. 농성하는 다른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아 이득을 보면서도 백화점편을 드는 이 노인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여 살고 있는 완벽한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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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 개정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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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악





이거 도대체 웃어야 돼, 울어야 해? 정말 심각한 상황인데도,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는 조금 이야기가 무겁다 싶었는데 중반부 이후부터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결국 뻥 하고 웃음을 안겨주었다. 인간의 내면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내며 그 안의 허점을 푹 찌르는 블랙유머는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리게도 했다.





“아 정말 최악이야.”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말을 뱉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진정한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나락의 끝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최악으로 떨어지게 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다.


‘가즈야’라는 청년은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에 어머니는 다른 살림을 차리고 나서 혼자 정처없이 방황한다. 그러다 여자친구도 사귀게 되고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지만 20살 남짓한 나이에 그는 단순한 절도범에서 살인범이라는 나락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미도리’라는 은행 여직원은 직장상사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고 여동생이 자신이 일하는 은행에 은행 강도로 들이닥쳐 자발적으로 인질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코너에 몰리자 사람을 죽일 뻔 한 일도 겪게 된다.


‘신지로’라는 중년의 성실한 가장은 하청업체라는 위치에서 경제적으로 항상 압박감을 받아왔지만 새 기계를 들여놓으면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은행대출에 거절당하고 이웃과 싸움이 나고 가장으로써 시달리면서 끝내는 정신을 놓게 되는 순간에 까지 이르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연민의 감정을 느꼈던 인물이었다.





이들의 인생은 애초에 완벽히 계획된 것은 없었다. 예상된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특이한 악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한 두 명씩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아 나에게도 저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든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세 명의 인물이 한꺼번에 만나게 되었을 때 소설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가즈야와 그의 여자친구 메구미는 은행을 털고 인질을 데리고 차로 도주하지만, 그 인질은 메구미의 언니였고 은행에 대한 불만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가엾은 아저씨는 이들에게서 도무지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얽히고 얽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세 사람의 만남은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소설은 아주 긍정적이지도 아주 부정적이지도 않은 상태로 끝이 나는데, 가즈야는 감옥으로 미도리는 새로운 직장으로 신지로는 이웃공장 밑으로 들어가며 모두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 인생으로부터 끝없이 방황하고 도망 다니는 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어찌되었든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이다. 상처는 오래 남겠지만, 결국 언젠가 최악의 상황은 결말이 나는 법이다. 인생에는 주기가 있다고 한다. 항상 운이 좋은 주기가 계속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힘든일을 겪어도 자신의 상황이 제일 ‘최악’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서로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이 제일 불행하고 가망이 없다며 세 사람이 각자 우기는 장면에서 사람의 인생은 거기서 거기인데 자기연민과 자괴감에 빠져 자신 스스로 최악이라는 구덩이를 더 깊게 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신의 숨겨진 본성과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았다. 적어도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으니 쫓기지 않아도 되고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마음에 더 큰 짐을 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람의 인생에 끝이 있는 것처럼 최악이라는 것도 언젠가 끝이 있기 마련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끝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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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yo Takakuwa - Provance
히데요 타카쿠와 (Hideyo Takakuwa) 연주 / 론뮤직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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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히데요 타쿠카와의 앨범 ‘프로방스’는 자연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곡들로 가득차 있다. 듣고 있노라면 잊고 있었던 옛 추억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기도 하고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속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신선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플롯이 주된 리드를 하고 있지만 이 앨범에는 첼로 피아노와 기타 틴 휫슬 등 다양한 악기가 함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비슷비슷한 느낌의 곡들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다. 또 하나 앨범 속에는 음악칼럼리스트 채희숙씨의 글과 각 곡마다의 해설,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음악을 듣는데 재미를 더한다.

 

* 다음 곡들에 대한 감상은 음악을 들으며 상상하기 좋아하는 저의 개인적인 주절거림입니다~

 

 

1.provance

 

약간 느린 템포에 쾌청한 가을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곡. 파란 하늘 밑에 코스모스가 바람에 나부끼고 호수가에는 백조가 우아하게 떠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플롯의 단순하고 깨끗한 음색이 아름답게 드러나 듣고 있노라면 답답했던 마음이 탁 트이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2. Parfume de Arles(아를의 향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헤어진 연인들이 어딘가에서 서로를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있을 것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플롯의 연주 뒤에 이어지는 첼로의 음울한 음색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3. Gresse

새벽 공기가 알싸하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들으면 더욱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플롯의 연주를 길게 빼며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가 인상적인 곡이다.

 

4. Bretagne

 

전통부족의 강인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곡으로 절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처럼 힘찬 틴 휫슬 연주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강인함에 기타의 잔잔한 연주가 더해져 곡의 강약을 조절해주는 느낌이 든다.

 

5.Champ de Lavander

 

라벤더의 정원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작은 언덕 밑으로 흐드러지게 핀 연 보라빛 청초한 라벤더 꽃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의 소녀가 서 있을 것 만 같다. 서정적인 곡으로 밝고 경쾌하기보다는 오래전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의 감회가 느껴진다. 연주를 듣는 내내 코끝에 라벤더향이 잔잔히 맴도는 듯했다.

 

6. R’eve de Fragile(깨지기 쉬운 길)

처음 들었을 때 알퐁스도데의 “별”이 떠올랐다. 목동과 소녀가 나란히 앉아 있는 뒷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플롯과 바이올린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 하는 느낌이 드는 재미있는 곡이다. 플롯의 음색은 슬픈 듯 고민을 털어놓으며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것 같고 바이올린은 이런 고민을 받아주며 다독여 주는 느낌이다. 이렇게 플롯과 바이올린의 연주가 번갈아 반복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플롯과 바이올린이 어우러져 따뜻한 느낌으로 마무리 된다.

 

7. Fontaine(샘)

 

샘에서 솟아나오는 맑고 깨끗한 물처럼 잔잔하고 행복한 느낌이 드는 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멜로디나 리듬이 변화가 거의 없고 조용한 느낌이 드는 곡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들판에 서서 구경을 하고 막 젖을 떼고 엄마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이 든 아기의 평온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들기 전 들으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8. Pont de Quimper(캠페르의 다리)

 

오보에와 호른 틴 휫슬 등 다양한 악기가 어우러진 곡이다. 틴 휫슬은 휘파람과 비슷해서인지 세찬 바람의 느낌이 많이 묻어나온다. 틴 휫슬의 연주는 플롯보다는 힘찬 느낌이 들고 그 음색에서는 약간의 슬픔과 한스러움 추억 고통 등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9. Mistral

첫 도입부의 플롯 연주가 구슬프게 들려오는 가운데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아노의 잔잔한 연주는 홀로 터벅터벅 하염없이 걷고 있는 한 여인의 뒤를 쫓고 있다.

 

 

10. Plage de St-tropez(샘트로페의 바닷가)

 

한적한 바닷가에서 한 커플이 다정하게 맨발로 걷는 모습이 떠오르는 곡이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손에 닿을 듯 말 듯. 간질간질하고 수줍은 사랑의 느낌이 전해져 온다.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목소리가 둥둥둥둥 울려 퍼지고 기타는 옆에서 간간이 분위기를 잡아주고 플롯은 경쾌한 목소리로 용기를 내라고 부추겨 주는데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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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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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구에게나 스무 살은 존재한다. 어른이라는 낯선 문턱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가슴한구석이 간질간질하고 공중부양을 한 것처럼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던 그 시절. 당당하게 민증을 내밀고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지나갈 때면 난 이제 어른이야. 라고 괜히 으쓱해졌던 그때가 떠오른다.

재수 준비를 위해 살던 고향을 떠나 도쿄로 독립한 히사오에게도 스무 살의 경계는 이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이었을 것이다. 히사오는 고향을 떠나오면서 자신을 구속하던 집안식구들 특히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는데 이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던 규제에서 벗어나 어른으로써의 자유를 획득했다는 것에서 오는 레몬같은 짜릿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사오는 이 짜릿한 자유를 소유함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의 짐이 얹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홀로 도쿄에 올라온 첫 날밤, 그에게 먼저 찾아온 것은 자유의 기쁨보다는 혼자서는 처리하지 못할 낯설음과 외로움이었다. 친구를 찾아 가는 동안 낯선 사람들 틈 사이에서 섞이지 못하고 다른 이질감을 느껴야 했던 히사오의 모습은 둥지에서 막 독립하여 떨어져 나온 새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의 첫 번째 성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재수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이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된 히사오는 그저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고야마 에리를 통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나호코 선배를 향해 있던 마음은 잠깐의 발작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저 동경이나 호감과는 다른 진짜 사랑의 감정을 구별할 줄 아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그에게 갑자기 잿빛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 그것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한 학업중단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번에 걸쳐 취직을 하게 되었으나, 직장생활은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고 고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친구라는 놈은 항상 바쁜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끼니조차 정해진 시각에 맞춰 먹을 수 없고, 위에서는 야단을 맞고 다른 사람의 실수까지 뒤집어 써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렇다보니 히사오는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자기 자신에게 느긋하고 너그러워질 수 없었다. 화수분처럼 그에게 쏟아지는 일과 요구와 기대감은 그를 점점 모퉁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모리시타의 전화에 매번 화를 냈던 것도 그의 마음속에 ‘여유’라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장생활의 에피소드 중 자주 등장하는 인물인 ‘모리시타’는 히사오와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항상 느긋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선택도 자주 바꾸고 쓸데없는 잡담도 즐겨한다. 어떻게 보면 참 속없고 능글맞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작가가 이 ‘모리시타’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숨 가쁘게 달려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여유’와 관용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자신의 꿈이나 목표가 무엇인지도 잊게 될뿐더러 어느 방향에 와 있는지도 모른 채 혼란스러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쉼없이 달려온 탓인지 히사오는 어느 새 직장후배도 여럿 부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어느 덧 22살. 일에도 능숙해졌고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법에는 아직 서툴렀고 자신의 일에 익숙해진 탓인지 자만심을 갖게 되어 카피를 망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히사오는 한층 더 성숙해지게 된다. 자신의 자만심을 깨닫고 사람들을 좀 더 다독여 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올림픽 개최지가 나고야가 아닌 서울이 되었어도 맞선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그에게 남은 생은 길고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남아 있기 때문에.

0이 붙는 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히사오 에게도 어느 덧 이 0이 붙는 나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1980년의 끝. 29살의 끝자락에 서있는 그. 그에게는 차가 있고 집이 있고 여자 친구가 있다. 어느 정도 빈 공간이 채워진 나이.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만난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꿈이 아닌 돈 때문에 고다사장처럼 망가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는 아직 꿈에 대한 불꽃이 꺼지지 않고 조용히 한쪽 구석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 평론가, 스포츠 카메라맨,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히사오와 그의 친구들이 갈망하던 여러 빛깔의 꿈들. 이 꿈들은 결혼과 현실 앞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쪽 구석에 미련과 함께 남아 있기도 했다.

청춘은 끝나고 인생은 시작된다. 서른이 된 사내의 얼굴을 한 모리시타가 말했다.

히사오가 태어날 때 생긴 베를린 장벽이 30년만에 무너졌다. 동서냉전은 끝났다.

이렇게 30은 삶과 화해하는 새로운 국면인 것일까?

책장을 덮으며 아직 20대인 나에게 서른이 된 모리시타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서른이 된 사내의 얼굴이란 어떤 것일까. 각자 자신이 꿈꾸던 진짜 어른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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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블루 - 그녀가 행복해지는 법 101
송추향 지음 / 갤리온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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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하면 떠오르는 것이 차가움과 우울이다.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그녀의 책제목은 왜 하필 메이드인 블루일까? 핑크나, 옐로우같은 희망적인 색깔들은 다 제쳐두고 말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는 각 개인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 이 글의 저자 송추향에게 행복은 블루다. 그녀는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위안받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았던 기억을 잊지 않고 떠올리며 위안을 받는다. 아무리 힘들었던 과거라 할지라도, "추억에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가 지금 현재의 그녀를 공격하고 무너뜨릴 순 없다.

추억에는 힘이 없다. 가슴을 쥐어 뜯고, 한숨을 안으며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 지금의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 한 없는 우울과 후회로 오늘 하루를 망치게 만들 순 없다. 힘이 없으니 지가 힘들어봤자 추억이지(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인용)(p80)

   비움을 가능성이라 여기고 그 결핍을 즐기며 다른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잠을 줄이고,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고 몸을 혹사해 가며 프로가 되어 가는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아이를 한 잠 더 재우고 자신의 몸을 덜 혹사시키며 조금 덜 프로폐셔널해지는 것이 그녀에게는 행복해지는 방법의 한 가지였다.  

 "비움은 가능성 항상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겐 더 없는 에너지. 당신, 그리고 왜 나는 아빠가 없냐고 언제고 내게 물어볼 우리 마루야, 결핍을 즐겨라.(p142)"

또한 그녀는 덤덤하게 자신의 일을 마치 제 3자를 바라보듯이 글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아이와 헤어져야 했던 순간까지도 말이다.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것은  모든 감정으로 부터 휘둘림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p34.)"이며  "조금은, 비겁하게 살아야 아쉬움은 생길지라도 몸과 마음은 상하지 않는다.(p28)"는 그녀의 말은 자신이 부딪혀서 깰 수 없는 현실이라면 풀처럼 조금은 누웠다 다시 일어서도 괜찮다는 의미일 것이다.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아이를 지키고자 했으나, 다시 혼자 독립하기 위해, 새 삶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시댁에 맡겨야만 했던 선택까지, 그 선택을 하기 까지 그녀는 매우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선택을 자책하며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을 잊지 않는 것, 가슴치는 아픔을 놓지 않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 나중에 나중에 그때보다는 좀 더 현명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p68)"

"모든 일은 성공하기 전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이 모든 고행의 끝에는 달콤한 대가가 따르는 것이라고 어차피 나중에 누리게 될 거니까 지금, 진짜로 ’달콤한 중’이라고 믿어보자고.(p70)

"때로는 그 길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힘껏 걸어야 할 때가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까지 계속 풀어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지기도 하니까. 내가 선택한 삶이 그리 평탄하지 않을 거라는 모든 계시들을 짐짓 모른 척하며 살아내야 할 때가 그래야 행복할 때가 있다.(p71)"

 우리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스트레스를 받고, 힘든 일 앞에서 애써 더 꿋꿋이 꺾이지 않을려고 버티며 자신을 지치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송추향식의 행복만들기에 동참할 생각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는 나의 생각, 나의 즐거움에 더 귀기울일 것이며 바람과 싸워 애써 이기려고만도 하지 않겠다. 그녀와의 여정은 책의 첫페이지를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이 여정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서 그녀가 행복을 왜 블루라 지칭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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