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에게나 스무 살은 존재한다. 어른이라는 낯선 문턱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가슴한구석이 간질간질하고 공중부양을 한 것처럼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던 그 시절. 당당하게 민증을 내밀고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지나갈 때면 난 이제 어른이야. 라고 괜히 으쓱해졌던 그때가 떠오른다.

재수 준비를 위해 살던 고향을 떠나 도쿄로 독립한 히사오에게도 스무 살의 경계는 이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이었을 것이다. 히사오는 고향을 떠나오면서 자신을 구속하던 집안식구들 특히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는데 이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던 규제에서 벗어나 어른으로써의 자유를 획득했다는 것에서 오는 레몬같은 짜릿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사오는 이 짜릿한 자유를 소유함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의 짐이 얹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홀로 도쿄에 올라온 첫 날밤, 그에게 먼저 찾아온 것은 자유의 기쁨보다는 혼자서는 처리하지 못할 낯설음과 외로움이었다. 친구를 찾아 가는 동안 낯선 사람들 틈 사이에서 섞이지 못하고 다른 이질감을 느껴야 했던 히사오의 모습은 둥지에서 막 독립하여 떨어져 나온 새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의 첫 번째 성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재수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이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된 히사오는 그저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고야마 에리를 통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나호코 선배를 향해 있던 마음은 잠깐의 발작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저 동경이나 호감과는 다른 진짜 사랑의 감정을 구별할 줄 아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그에게 갑자기 잿빛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 그것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한 학업중단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번에 걸쳐 취직을 하게 되었으나, 직장생활은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고 고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친구라는 놈은 항상 바쁜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끼니조차 정해진 시각에 맞춰 먹을 수 없고, 위에서는 야단을 맞고 다른 사람의 실수까지 뒤집어 써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렇다보니 히사오는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자기 자신에게 느긋하고 너그러워질 수 없었다. 화수분처럼 그에게 쏟아지는 일과 요구와 기대감은 그를 점점 모퉁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모리시타의 전화에 매번 화를 냈던 것도 그의 마음속에 ‘여유’라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장생활의 에피소드 중 자주 등장하는 인물인 ‘모리시타’는 히사오와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항상 느긋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선택도 자주 바꾸고 쓸데없는 잡담도 즐겨한다. 어떻게 보면 참 속없고 능글맞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작가가 이 ‘모리시타’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숨 가쁘게 달려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여유’와 관용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자신의 꿈이나 목표가 무엇인지도 잊게 될뿐더러 어느 방향에 와 있는지도 모른 채 혼란스러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쉼없이 달려온 탓인지 히사오는 어느 새 직장후배도 여럿 부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어느 덧 22살. 일에도 능숙해졌고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법에는 아직 서툴렀고 자신의 일에 익숙해진 탓인지 자만심을 갖게 되어 카피를 망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히사오는 한층 더 성숙해지게 된다. 자신의 자만심을 깨닫고 사람들을 좀 더 다독여 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올림픽 개최지가 나고야가 아닌 서울이 되었어도 맞선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그에게 남은 생은 길고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남아 있기 때문에.

0이 붙는 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히사오 에게도 어느 덧 이 0이 붙는 나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1980년의 끝. 29살의 끝자락에 서있는 그. 그에게는 차가 있고 집이 있고 여자 친구가 있다. 어느 정도 빈 공간이 채워진 나이.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만난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꿈이 아닌 돈 때문에 고다사장처럼 망가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는 아직 꿈에 대한 불꽃이 꺼지지 않고 조용히 한쪽 구석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 평론가, 스포츠 카메라맨, 일러스트레이터, 영화감독. 히사오와 그의 친구들이 갈망하던 여러 빛깔의 꿈들. 이 꿈들은 결혼과 현실 앞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쪽 구석에 미련과 함께 남아 있기도 했다.

청춘은 끝나고 인생은 시작된다. 서른이 된 사내의 얼굴을 한 모리시타가 말했다.

히사오가 태어날 때 생긴 베를린 장벽이 30년만에 무너졌다. 동서냉전은 끝났다.

이렇게 30은 삶과 화해하는 새로운 국면인 것일까?

책장을 덮으며 아직 20대인 나에게 서른이 된 모리시타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서른이 된 사내의 얼굴이란 어떤 것일까. 각자 자신이 꿈꾸던 진짜 어른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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