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 국정운영을 말하다
시진핑 지음, 차혜정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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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협력기구 관련 내용

이번 정상회의에서는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 장기 선린우호협력 조약의 실천을 주제로, 이 ‘조약‘의 실시 요강을 비준할 것입니다. 또 향후 5년간 상하이협력기구의보다 밝은 발전 청사진을 제시할 것입니다.
현재 상하이협력기구는 모처럼의 발전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동시에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3대 세력, 마약 밀매, 다국적 조직 범죄가 이 지역의 안전과 안정을 위협하고 있으며, 국제 금융위기의 여파로 각국 경제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안고 조정기 또는 회복기에 들어갔습니다.
- P414

우리는 협력을 강화하고 연합을 통해 자국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하여 저는 상하이협력기구의 협력 강화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상하이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상하이 정신‘을 실천에 옮겨 회원국들의 상호 신뢰를 증진하고 평등, 협상, 상호 이해와 양보를 기반으로 호혜 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평화와 발전의 시대 흐름에 순응하고 각 회원국 국민의 이익과 요구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둘째, 지역 안전과 안정을 공동으로 수호해야 합니다. ‘테러리즘,
분열주의, 극단주의 척결에 관한 상하이 공약 및 협력 요강을 실행하고, 상하이협력기구 법 집행 안보 협력 시스템을 정비하여 지역 반테러 기구에 마약 단속 기능을 부여하며, 이를 기초로 ‘안전 위협과 도전 대응을 위한 종합센터‘를 설립해야 합니다.
셋째, 실무적 협력에 주력해야 합니다. 실무적 협력은 상하이협력기구 - P415

가 발전하는 물질적 기초이며 원동력입니다. 상하이협력기구 산하의 6개회원국과 5개 옵서버 국가는 모두 옛 실크로드에 면해 있습니다.
1) 교통과 물류의 대통로를 개설해야 합니다.
2) 무역과 투자 편리화 협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3) 금융 분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4) 에너지 클럽을 창설해야 합니다. 
5) 식량 안보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넷째, 인문 교류와 민간 교류를 강화하여 상하이협력기구 발전을 위한 - P416

여론적 기반과 사회적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중국은 베이징 정상회의에서 향후 10년 동안 기타 회원국의 3만 명에이르는 학생들에게 정부 장학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각 회원국과의 밀접한 협력을 통해 이 프로젝트를 실천하고자 합니다.
각국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중국은 이미 상하이협력기구 선린우호협력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발표한 ‘비슈케크 선언‘에서는 시리아 문제에 관해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중국이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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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This new book, Xinjiang in the Twenty-First Century: Islam, Ethnicity and Resistance, continues an enquiry into the ongoing confict in Xinjiang that beganwith Xinjiang, China‘s Muslim Far North-West (London: Routledge, 2004) andwas developed in Xinjiang and the Expansion of Chinese Communist Power:Kashghar in the Twentieth Century (Routledge, 2014). 
- P1

The introductory chapters give a brief overview of the character of Xinjiangand the Uyghurs for readers who are new to this region of Central Asia. The narrative originally outlined in Xinjiang: China‘s Mustim Far North-West, whichwas published in 2004, is then developed. - P5

The second chapter, which includes material from field research carried outin the Kashgar and Khotan areas in the summer of 2010, illustrates the para-doxical nature of the religious and political tandscape of southern Xinjiang in theearly twenty-first century. The destruction of the traditional, and architecturally - P5

important, bazaar and residential quarters of the ancient Uyghur city of Kashgarproceeded in spite of furious local protests. 
The third chapter considers the public narrative on terrorism that has beendeveloped by the government in Beijing since 2001 to account for the violentout in Xinjiang. The unambiguous message that emerges in this narrative is that any dissent, opposition or resistance by Uyghurs, whether violent or not, is classified as ‘terrorist‘ by the govertiment in Beijing and its media. 
The final section of the book offers a retrospective analysis of the violent conflict in Xinjiang and a typology of the violence. Possible resolutions to the conflictand the ruifficulties that are likely to frustrate such a resolution are examined in the light of this analysis.
Chapter 7 concludes with the draconic changes in Xinjiang‘s security regime that began with the transfer of Chen Quanguo from Tibet to Xinjiang as Secretary - P6

of the regional Communist Party in August 2016. Chapter 8 offers a summary of the nature of the conflict ant the possibility - rather remote - of a resolution.

Millitant Uyghurs reject the Chinese Name for their region, Xinjiang, which dates back to the eighteenth century, and prefer to think of it as Eastern Turkistan: this connects it directly with Western Turkistan, the Turkic-speaking regions of former Soviet Central Asia which are now divided among Uzbekistan, Kazakhstan, and Kyrgyzstan. There is a persistant, and that times confrontational, movement for Uyghur independence or, as the Chinese government prefers, ‘separatism‘, or ‘splittism‘. This Movement draws much of Its inspiration from memories of two independent, although short-lived republics that existed in the region in the 1940s.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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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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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장 강희제의 통합정책

국경의 확정

청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은 서부지역의 준가르부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도자인 갈단과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깊은 존경으로 똘똘 뭉친 준가르부는 지금의 외몽골과 칭하이 지역인 넓은 미개척지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1670년대 후반에 카슈가르, 하미, 투르판을 차례로 점령함으로써 갈단은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는 도시들과, 중국과 지중해지역을 연결하는 대상로를 거의 장악했다. 갈단은 동진해 나가며 적대적인 부족들을 정복했고, 쫓겨난 부족들은 청의 서부지역인 간쑤 성으로 밀려들었다. 전사들이 대규모로 밀려ㅓ오자 황제는 러시아와 준가르부가 연맹을 결성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하게 되었다.(98)
하지만 그런 연맹은 성립되지 않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이 순조롭게 체결되자 강희제는 군대(자신의 동생 휘하의)를 파견하여 갈단을 공격했다. 갈단과 그의 동쪽에 있는 경쟁 부족 사이의 수년간의 소모적인 전쟁 후 강희제는 직접 갈단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강희제의 군대가 고비사막을 넘어 케롤렌 강 북부의 준가르부를 압박하자 갈단은 궁지에 몰려 1696년 자오모도 대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는 추종자들 대부분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이듬해 죽었다.(98)
그러나 대외정책에서는 이런 해결책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갈단의 죽음으로도 그 지역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고,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가 살해되고 평판이 나쁜 후계자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자, 준가르부의 다른 여러 지도자들과 복잡한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것은 강희제에게 정의로운 정벌이라는 구실을(1644년 만주가 중국에 침입한 것과 똑같이) 붙여 티베트를 침입할 기회를 주었다.(99) 그는 두 부대를 파견했는데, 하나는 칭하이호를 지나 티베트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쓰촨성을 거쳐서 진군했다.(99-100) 1720년 가을에 두 부대는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서 합류하여 청에 복종하겠다는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앉혔다. 이렇게 해서 티베트의 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이 시작되었다.(100)
청이 동떨어진 두 전선에서의 지역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저력만큼은 증명해 보였다. 1722년 강희제가 죽었을 때, 티베트나 타이완에서의 전쟁은 청의 서남부와 동부에 미치는 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고 청 왕조의 고향인 만주가 안전하게 복속됨으로써, 청은 중국의 이전 시기의 위대한 통치자들 가운데 불과 극소수만이 누렸던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권력을 얻게 되었다.(100)

4장 옹정제의 권위

장기적으로 계획된 준가르부와의 전쟁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1732년에 웨중치 장군은 바르쿨에 있는 전진기지에서 우루무치에 있던 적군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으나, 하미에 있던 아군이 적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이에 웨중치의 동료 장군이 재빨리 1만 대군을 이끌고 호브도 근처의 매복지로 후퇴했으나 군사의 5분의 4와 다수의 장군을 잃고 말았다. 옹정제는 패전과 부정부패의 책임을 물어 두 장군에게 사형을 명했다. 그들은 나중에 사면을 받긴 하지만, 이 실패로 인해 이 지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30년의 세월이 더 걸리게 되었다.(115)

5장 중국 사회와 건륭제의 치세

'한낮의 태양과 같으니'

건륭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광대한 서역(후에 신장, 곧 '새로운 영토'로 알려진 지역)을 정복하여 중국에 복속시킨 것이다.(130) 이로써 그는 중국의 영토를 두 배로 확장했고, 마침내 준가르부 문제를 해결했으며 네르친스크와 카흐타 조약으로 정리된 북부 국경과 더불어 러시아와의 서부 국경을 확고히 설정했다.(130-131) 이러한 방대한 사업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었고, 그것은 쓰촨 서부와 티베트 북부에서의 전쟁의 승패와 직결(강희제와 옹정제 때 그랬던 것처럼)되어 있었다.(131)
청군은 마지막 남은 준가르부 군사를 아주 잔인하게 살육했다. 이때 이후 새로 편입된 영토는 이리에 주둔한 청군의 총사령관과 우루무치에 기지를 둔 부사령관에 의해 다스려졌고, 몽골 지역의 부족들도 청에 복속되었다.(131)
준가르부나 몽골족과의 모든 외교적 협상이 이번원의 만주인 관원에 의해 지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역의 새 영토에 대한 행정도 만주족과 소수의 숙달된 한족 기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한족을 통한 식민화나 정착을 추진하지 않고, 전략적 국경지대로 유지되었다. 10만여 명의 식솔을 거느린 1만 5천에서 2만 명 정도의 만주족과 한족 팔기 수비대가 이곳을 점령했는데, 청이 여기에 쏟아부은 비용은 적어도 연간 300만 냥에 달했다. 대부분 이슬람 교도였던 원주민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계속 받들고 엄격한 식사습관을 유지했다. 청은 그들에게 앞머리를 밀고 변발하라고 강요하지 는 않았다. 베그라 불린 이슬람교의 민간 지도자들은 청의 봉급과 관직에 따라 편입되었다. 무역은 구리, 보석, 숄용 양모, 노예 등의 상품으로 확대되었지만, 이 지역의 가장 값진 광물인 옥이나 금의 채굴은 실질적으로 청이 독점했다.(131)

7장 서양과의 첫 충돌

새로운 조약 체제

새로운 개항장 건설에 대한 청 조정의 태도는 불분명했다. 조정의 많은 관료들이 공감했던 치잉의 견해에 따르면 서양인의 주된 동기는 상업적 욕심이기 때문에 만일 무역이 계속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들은 다른 요구를 억제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확신과 함께 치외법권 같은 양보조차도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치잉과 황제는 가장 최근의 경험인 1830년대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청의 외교정책을 근간으로 삼았다.(203) 예를 들면 1835년에 청 정부는 호전적인 코칸드의 칸민에게 카슈가르에 정치 주재소를, 야르칸드와 다른 주요 상업도시들에는 상관을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허가했다.(203-204) 정치 주재소는 알티샤르 지역의 다른 외국인에 대해서도 영사권과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다른 외국인이 이 지역으로 들여오는 물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도 가졌다. 또한 청은 이슬람 교도가 비이슬람 교도에게 부과하는 관세의 반(5% 대신 2.5%)만을 내도록 했으며 알티샤르에서 코칸트로 수출하는 물품은 면세 처리한다는 데 동의했다. 청은 이러한 양보가 주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무역권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코칸드 칸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값싸고 손쉬운 방법임을 터득했다. 이러한 협상에 참여했던 청의 고위 관료들 가운데 다수-또는 그 전에 일어난 전쟁의 영웅들이-가 1830년대와 1840년대 초반에 동남 해안에 부임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극서 정책과 동남 국경정책 사이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었다.(204)
중앙아시아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유력자들에게 그랬듯이 치잉은 난징 조약과 추가 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헨리 포틴저 경의 편의를 봐주었다. 치잉의 의도는 '명목 없이 그들과 싸우지' 않는 대신 '작은 일을 버리고 더 큰 일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렵게 얻어 낸 조약의 결정들이 영국과 다른 외세에게는 결코 '실속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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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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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압력과 마르크스의 견해

칼 마르크스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국의 대외정책의 추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853년 무렵 반동적 정부세력의 계속된 방해로 유럽에서 기대했던 혁명의 물결이 사그라들자 마르크스는 혁명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확증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223)
태평천국이 난징을 점령하던 해에 마르크스는 중국의 모든 분파들이 마침내 "강력한 혁명을 위해 한데 모였다"고 썼다. 그는 태평천국이 견지한 '종교적, 왕조적, 국가적 형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으나,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고 확대된 것은 영국의 아편무역과 대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이 요소들(아편과 대포)은 함께 어우러져 중국이 고수하던 쇄국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으며 만주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한때 존경받던 중국 관리들을 밀수와 부패의 늪에 빠뜨렸다. 그 결과 '밀폐된 관에 조심스레 보존된 미라가 공기를 접하게 되면 부서지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로" 청도 해체될 것이 분명했다.(224)
마르크스는 중국의 멸망이 멋진 구경거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서구 열강은 인도의 아편 생산으로 대중국 무역의 균형을 이루고, 국내 세수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무역에 과세하는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중국 무역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중국의 혁명은 현 산업 체제의 과부하된 지뢰에 불꽃을 댕기고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전반적 위기를 폭발시켜 유럽의 정치적 혁명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라고 썼다. 이것은 30여 년 전에 유럽이 중국을 근대 세계로 점차 끌어낼 것이라고 추측했던 헤겔의 견해에 대한 하나의 묵시론적 해석이었다.
그러나 185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유럽 사회에 그런 종류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는 '애로우호 전쟁''과 텐진 조약에 이어 1860년의 베이징 함락 이후 전개되는 영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국면에 여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영국이 광저우를 폭파한 행위와 캘리포니아, 멕시코, 니카라과에서 월리엄 워커 '장군'이 벌인 해적활동을 비교하면서 "외교상의 예절이라는 별스런 규범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도 없이 평화로운 국가를 침범하는 이런 행위를 세계의 문명국들이 승인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워했다. 1857년 3월 영국 의회가 전쟁을 도발했다는 이유로 파머스턴 경을 탄핵하고, 곧바로 이것이 의회 해산과 국민투표로 이어지자, 마르크스는 성급하게도 이를 '파머스턴 독재'의 종말로 보았다.(224)
파머스턴이 국민투표를 통해 혐의를 벗고, 다시 영국이 중국의 소동 속으로 뛰어들자, 그제서야 마르크스는 국책 전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러한 행위는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짓이라고 거듭 경고했다.(224) 또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영국 상인들이 예견하는 거서럼 중국 무역이 그렇게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빠르게 덧붙였다.(224-225) 중국이 대규모 아편 수입과 영국 공산품의 대규모 수입 양쪽을 모두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중국과의 협상이 장기화될수록 가장 이득을 볼 나라는 러시아라고 전망했다. 크림 전쟁에서 좌절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당시 자기네 철도망을 동아시아로 확장시키고 조선 북쪽 해안까지 지배를 강화했다. 그리고 강희제와 옹정제에 의해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과 카흐타 조약에서제외되었던 아무르 강 주변의 방대한 영토를 장악했다.(225)
마르크스가 1859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한 것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회질서도 생산력이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소멸되지 않는다. 새로운 고도의 생산관계는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조건들이 옛 사회 자체 내부로부터 성숙하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중국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여력'이 고갈되었다는 애덤 스미스의 견해를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서구인은 "새로운 고도의 생산관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왜냐하면 중국은 마르크스가 다른 곳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사회생활의 화석상태"였기 때문이다.(225)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외국 제국주의의 파괴적인 진군이 건설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225-226) 곧 중국 제국의 전통적 구조를 약화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226)
중국에 대한 마르크스의 성찰은 여기서 멈췄다. 1862년 무렵 그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태평천국의 잔인함을 전하는 소식에 염증을 느끼고는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는 태평천국이 진압되기 전에 중국 북부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한 전혀 새로운 염군의 난에서 위안을 찾지도 않았다. 그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밝혔듯이 비록 "옛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서 떨어져 나온 복종적이고 부패한 대중인 '위험한 계급,' 곧 사회적 쓰레기들"은 혁명운동에 쉽게 휩쓸려 들어간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매수당한 반동적 음모의 도구"라는 필연적인 역할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예감 하나가 그의 몇몇 글에서 지속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는 미래에는 언젠가 유럽의 반동세력이 분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면전에서 도망쳐 보수세력의 마지막 보루로 믿은 피난처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놀랍게도 만리장성 위에 굵은 글씨로 '중국 공화국-자유, 평등, 박애'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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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megabox.co.kr/movie-detail/comment?rpstMovieNo=20052000

영화 <트라이얼 오브 시카고7>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앞 시위에 참가한 미국 좌파 활동가들의 다양한 특징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반전운동 분위기를 잘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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