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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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압력과 마르크스의 견해

칼 마르크스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국의 대외정책의 추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853년 무렵 반동적 정부세력의 계속된 방해로 유럽에서 기대했던 혁명의 물결이 사그라들자 마르크스는 혁명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확증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223)
태평천국이 난징을 점령하던 해에 마르크스는 중국의 모든 분파들이 마침내 "강력한 혁명을 위해 한데 모였다"고 썼다. 그는 태평천국이 견지한 '종교적, 왕조적, 국가적 형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으나,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고 확대된 것은 영국의 아편무역과 대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이 요소들(아편과 대포)은 함께 어우러져 중국이 고수하던 쇄국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으며 만주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한때 존경받던 중국 관리들을 밀수와 부패의 늪에 빠뜨렸다. 그 결과 '밀폐된 관에 조심스레 보존된 미라가 공기를 접하게 되면 부서지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로" 청도 해체될 것이 분명했다.(224)
마르크스는 중국의 멸망이 멋진 구경거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서구 열강은 인도의 아편 생산으로 대중국 무역의 균형을 이루고, 국내 세수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무역에 과세하는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중국 무역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중국의 혁명은 현 산업 체제의 과부하된 지뢰에 불꽃을 댕기고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전반적 위기를 폭발시켜 유럽의 정치적 혁명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라고 썼다. 이것은 30여 년 전에 유럽이 중국을 근대 세계로 점차 끌어낼 것이라고 추측했던 헤겔의 견해에 대한 하나의 묵시론적 해석이었다.
그러나 185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유럽 사회에 그런 종류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는 '애로우호 전쟁''과 텐진 조약에 이어 1860년의 베이징 함락 이후 전개되는 영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국면에 여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영국이 광저우를 폭파한 행위와 캘리포니아, 멕시코, 니카라과에서 월리엄 워커 '장군'이 벌인 해적활동을 비교하면서 "외교상의 예절이라는 별스런 규범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도 없이 평화로운 국가를 침범하는 이런 행위를 세계의 문명국들이 승인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워했다. 1857년 3월 영국 의회가 전쟁을 도발했다는 이유로 파머스턴 경을 탄핵하고, 곧바로 이것이 의회 해산과 국민투표로 이어지자, 마르크스는 성급하게도 이를 '파머스턴 독재'의 종말로 보았다.(224)
파머스턴이 국민투표를 통해 혐의를 벗고, 다시 영국이 중국의 소동 속으로 뛰어들자, 그제서야 마르크스는 국책 전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러한 행위는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짓이라고 거듭 경고했다.(224) 또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영국 상인들이 예견하는 거서럼 중국 무역이 그렇게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빠르게 덧붙였다.(224-225) 중국이 대규모 아편 수입과 영국 공산품의 대규모 수입 양쪽을 모두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중국과의 협상이 장기화될수록 가장 이득을 볼 나라는 러시아라고 전망했다. 크림 전쟁에서 좌절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당시 자기네 철도망을 동아시아로 확장시키고 조선 북쪽 해안까지 지배를 강화했다. 그리고 강희제와 옹정제에 의해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과 카흐타 조약에서제외되었던 아무르 강 주변의 방대한 영토를 장악했다.(225)
마르크스가 1859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한 것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회질서도 생산력이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소멸되지 않는다. 새로운 고도의 생산관계는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조건들이 옛 사회 자체 내부로부터 성숙하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중국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여력'이 고갈되었다는 애덤 스미스의 견해를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서구인은 "새로운 고도의 생산관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왜냐하면 중국은 마르크스가 다른 곳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사회생활의 화석상태"였기 때문이다.(225)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외국 제국주의의 파괴적인 진군이 건설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225-226) 곧 중국 제국의 전통적 구조를 약화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226)
중국에 대한 마르크스의 성찰은 여기서 멈췄다. 1862년 무렵 그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태평천국의 잔인함을 전하는 소식에 염증을 느끼고는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는 태평천국이 진압되기 전에 중국 북부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한 전혀 새로운 염군의 난에서 위안을 찾지도 않았다. 그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밝혔듯이 비록 "옛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서 떨어져 나온 복종적이고 부패한 대중인 '위험한 계급,' 곧 사회적 쓰레기들"은 혁명운동에 쉽게 휩쓸려 들어간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매수당한 반동적 음모의 도구"라는 필연적인 역할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예감 하나가 그의 몇몇 글에서 지속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는 미래에는 언젠가 유럽의 반동세력이 분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면전에서 도망쳐 보수세력의 마지막 보루로 믿은 피난처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놀랍게도 만리장성 위에 굵은 글씨로 '중국 공화국-자유, 평등, 박애'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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