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 우리 모두의 진짜 자존감을 찾는 심리학 공부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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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7일에 쓴 글

심리학자 김태형의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4시간 여 만에 다 읽었다.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잘 이해 못하는 등, 한국인들의 심리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한국사회적 맥락에서 문제점을 보고 사회운동적 해결을 중시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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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노예제도와 자본주의 초기 발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전 계급사회가 "비경제적 강제력"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는 둘 다 부자유 노동을 착취하는 데 기초를 뒀다. 노예의 지위는 로마인들이 ‘말하는 도구‘라고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재산이었다. - P52

이런 사회는 위계적으로 조직됐고 사람들이 법률로 불평등하게 - 고대 사회에서는 시민과 노예(사실 시민도 부자와 빈자로 구분됐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는 사회에서 일어난 착취의 성격을 반영했다. 눈에 빤히 보이고, 체계적이고, 법률적으로 뒷받침된 불평등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표준이었다. - P53

노동자와 자본가는 법률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노동시장에 마주 선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그러면 굶든지 실업수당을 받든지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시장을 가리켜 "그야말로 천부인권의 지상낙원"이고 "자유, 평등, 소유, 벤담의 배타적 영역"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생산이라는 비밀 장소"에서만 일어난다. - P55

그러나 역설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체제인데, 그런 자본주의가 성장의 결정적 국면에서 식민지 노예 사용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봤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은 산업혁명기로 접어들 때까지도 계속됐다. (중략) 바로 이런 맥락에서, 흑인은 인간 이하의 존재고 그러니까 평등한 대우(당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로 인 - P56

식돼 갔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상이 단단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바버라 필즈는 "인종 이데올로기"가 특히 미국 남부의 "백인 자영농" 사이에서 힘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 P57

노예무역은 물론이고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라는 압력이 성장하자 에드워드 롱 같은 인종차별 이데올로그들이 나서서 서인도제도의 대농장주를 방어했다.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뒤로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19세기에 이론적으로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저속하게 해석한 것을 기초로 해서 사이비 과학인 인종생물학이 등장한 것이다. 이 사이비 과학의 탄생은, 처음에 인종차별을 낳은 기이한 예외 사례가 다른 형태로 변모해 계속된 상황, 즉 한 줌 밖에 안 되는 유럽 강대국들(과 유럽화된 미국과 러시아)이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게 된 상황을 반영한 일이었다.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백‘인종‘의 통치를 받기에 적합한 생물학적 형질을 타고났고 백인은 열등한 인종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통치할 의무가 있다는 사상이 그런 사태 전개를 정당화해 줬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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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 국정운영을 말하다
시진핑 지음, 차혜정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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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협력기구 관련 내용

이번 정상회의에서는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 장기 선린우호협력 조약의 실천을 주제로, 이 ‘조약‘의 실시 요강을 비준할 것입니다. 또 향후 5년간 상하이협력기구의보다 밝은 발전 청사진을 제시할 것입니다.
현재 상하이협력기구는 모처럼의 발전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동시에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3대 세력, 마약 밀매, 다국적 조직 범죄가 이 지역의 안전과 안정을 위협하고 있으며, 국제 금융위기의 여파로 각국 경제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안고 조정기 또는 회복기에 들어갔습니다.
- P414

우리는 협력을 강화하고 연합을 통해 자국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하여 저는 상하이협력기구의 협력 강화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상하이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상하이 정신‘을 실천에 옮겨 회원국들의 상호 신뢰를 증진하고 평등, 협상, 상호 이해와 양보를 기반으로 호혜 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평화와 발전의 시대 흐름에 순응하고 각 회원국 국민의 이익과 요구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둘째, 지역 안전과 안정을 공동으로 수호해야 합니다. ‘테러리즘,
분열주의, 극단주의 척결에 관한 상하이 공약 및 협력 요강을 실행하고, 상하이협력기구 법 집행 안보 협력 시스템을 정비하여 지역 반테러 기구에 마약 단속 기능을 부여하며, 이를 기초로 ‘안전 위협과 도전 대응을 위한 종합센터‘를 설립해야 합니다.
셋째, 실무적 협력에 주력해야 합니다. 실무적 협력은 상하이협력기구 - P415

가 발전하는 물질적 기초이며 원동력입니다. 상하이협력기구 산하의 6개회원국과 5개 옵서버 국가는 모두 옛 실크로드에 면해 있습니다.
1) 교통과 물류의 대통로를 개설해야 합니다.
2) 무역과 투자 편리화 협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3) 금융 분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4) 에너지 클럽을 창설해야 합니다. 
5) 식량 안보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넷째, 인문 교류와 민간 교류를 강화하여 상하이협력기구 발전을 위한 - P416

여론적 기반과 사회적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중국은 베이징 정상회의에서 향후 10년 동안 기타 회원국의 3만 명에이르는 학생들에게 정부 장학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우리는 각 회원국과의 밀접한 협력을 통해 이 프로젝트를 실천하고자 합니다.
각국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중국은 이미 상하이협력기구 선린우호협력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발표한 ‘비슈케크 선언‘에서는 시리아 문제에 관해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중국이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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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This new book, Xinjiang in the Twenty-First Century: Islam, Ethnicity and Resistance, continues an enquiry into the ongoing confict in Xinjiang that beganwith Xinjiang, China‘s Muslim Far North-West (London: Routledge, 2004) andwas developed in Xinjiang and the Expansion of Chinese Communist Power:Kashghar in the Twentieth Century (Routledge, 2014). 
- P1

The introductory chapters give a brief overview of the character of Xinjiangand the Uyghurs for readers who are new to this region of Central Asia. The narrative originally outlined in Xinjiang: China‘s Mustim Far North-West, whichwas published in 2004, is then developed. - P5

The second chapter, which includes material from field research carried outin the Kashgar and Khotan areas in the summer of 2010, illustrates the para-doxical nature of the religious and political tandscape of southern Xinjiang in theearly twenty-first century. The destruction of the traditional, and architecturally - P5

important, bazaar and residential quarters of the ancient Uyghur city of Kashgarproceeded in spite of furious local protests. 
The third chapter considers the public narrative on terrorism that has beendeveloped by the government in Beijing since 2001 to account for the violentout in Xinjiang. The unambiguous message that emerges in this narrative is that any dissent, opposition or resistance by Uyghurs, whether violent or not, is classified as ‘terrorist‘ by the govertiment in Beijing and its media. 
The final section of the book offers a retrospective analysis of the violent conflict in Xinjiang and a typology of the violence. Possible resolutions to the conflictand the ruifficulties that are likely to frustrate such a resolution are examined in the light of this analysis.
Chapter 7 concludes with the draconic changes in Xinjiang‘s security regime that began with the transfer of Chen Quanguo from Tibet to Xinjiang as Secretary - P6

of the regional Communist Party in August 2016. Chapter 8 offers a summary of the nature of the conflict ant the possibility - rather remote - of a resolution.

Millitant Uyghurs reject the Chinese Name for their region, Xinjiang, which dates back to the eighteenth century, and prefer to think of it as Eastern Turkistan: this connects it directly with Western Turkistan, the Turkic-speaking regions of former Soviet Central Asia which are now divided among Uzbekistan, Kazakhstan, and Kyrgyzstan. There is a persistant, and that times confrontational, movement for Uyghur independence or, as the Chinese government prefers, ‘separatism‘, or ‘splittism‘. This Movement draws much of Its inspiration from memories of two independent, although short-lived republics that existed in the region in the 1940s.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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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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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장 강희제의 통합정책

국경의 확정

청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은 서부지역의 준가르부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도자인 갈단과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깊은 존경으로 똘똘 뭉친 준가르부는 지금의 외몽골과 칭하이 지역인 넓은 미개척지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1670년대 후반에 카슈가르, 하미, 투르판을 차례로 점령함으로써 갈단은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는 도시들과, 중국과 지중해지역을 연결하는 대상로를 거의 장악했다. 갈단은 동진해 나가며 적대적인 부족들을 정복했고, 쫓겨난 부족들은 청의 서부지역인 간쑤 성으로 밀려들었다. 전사들이 대규모로 밀려ㅓ오자 황제는 러시아와 준가르부가 연맹을 결성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하게 되었다.(98)
하지만 그런 연맹은 성립되지 않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이 순조롭게 체결되자 강희제는 군대(자신의 동생 휘하의)를 파견하여 갈단을 공격했다. 갈단과 그의 동쪽에 있는 경쟁 부족 사이의 수년간의 소모적인 전쟁 후 강희제는 직접 갈단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강희제의 군대가 고비사막을 넘어 케롤렌 강 북부의 준가르부를 압박하자 갈단은 궁지에 몰려 1696년 자오모도 대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는 추종자들 대부분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이듬해 죽었다.(98)
그러나 대외정책에서는 이런 해결책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갈단의 죽음으로도 그 지역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고,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가 살해되고 평판이 나쁜 후계자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자, 준가르부의 다른 여러 지도자들과 복잡한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것은 강희제에게 정의로운 정벌이라는 구실을(1644년 만주가 중국에 침입한 것과 똑같이) 붙여 티베트를 침입할 기회를 주었다.(99) 그는 두 부대를 파견했는데, 하나는 칭하이호를 지나 티베트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쓰촨성을 거쳐서 진군했다.(99-100) 1720년 가을에 두 부대는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서 합류하여 청에 복종하겠다는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앉혔다. 이렇게 해서 티베트의 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이 시작되었다.(100)
청이 동떨어진 두 전선에서의 지역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저력만큼은 증명해 보였다. 1722년 강희제가 죽었을 때, 티베트나 타이완에서의 전쟁은 청의 서남부와 동부에 미치는 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고 청 왕조의 고향인 만주가 안전하게 복속됨으로써, 청은 중국의 이전 시기의 위대한 통치자들 가운데 불과 극소수만이 누렸던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권력을 얻게 되었다.(100)

4장 옹정제의 권위

장기적으로 계획된 준가르부와의 전쟁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1732년에 웨중치 장군은 바르쿨에 있는 전진기지에서 우루무치에 있던 적군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으나, 하미에 있던 아군이 적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이에 웨중치의 동료 장군이 재빨리 1만 대군을 이끌고 호브도 근처의 매복지로 후퇴했으나 군사의 5분의 4와 다수의 장군을 잃고 말았다. 옹정제는 패전과 부정부패의 책임을 물어 두 장군에게 사형을 명했다. 그들은 나중에 사면을 받긴 하지만, 이 실패로 인해 이 지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30년의 세월이 더 걸리게 되었다.(115)

5장 중국 사회와 건륭제의 치세

'한낮의 태양과 같으니'

건륭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광대한 서역(후에 신장, 곧 '새로운 영토'로 알려진 지역)을 정복하여 중국에 복속시킨 것이다.(130) 이로써 그는 중국의 영토를 두 배로 확장했고, 마침내 준가르부 문제를 해결했으며 네르친스크와 카흐타 조약으로 정리된 북부 국경과 더불어 러시아와의 서부 국경을 확고히 설정했다.(130-131) 이러한 방대한 사업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었고, 그것은 쓰촨 서부와 티베트 북부에서의 전쟁의 승패와 직결(강희제와 옹정제 때 그랬던 것처럼)되어 있었다.(131)
청군은 마지막 남은 준가르부 군사를 아주 잔인하게 살육했다. 이때 이후 새로 편입된 영토는 이리에 주둔한 청군의 총사령관과 우루무치에 기지를 둔 부사령관에 의해 다스려졌고, 몽골 지역의 부족들도 청에 복속되었다.(131)
준가르부나 몽골족과의 모든 외교적 협상이 이번원의 만주인 관원에 의해 지휘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역의 새 영토에 대한 행정도 만주족과 소수의 숙달된 한족 기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한족을 통한 식민화나 정착을 추진하지 않고, 전략적 국경지대로 유지되었다. 10만여 명의 식솔을 거느린 1만 5천에서 2만 명 정도의 만주족과 한족 팔기 수비대가 이곳을 점령했는데, 청이 여기에 쏟아부은 비용은 적어도 연간 300만 냥에 달했다. 대부분 이슬람 교도였던 원주민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계속 받들고 엄격한 식사습관을 유지했다. 청은 그들에게 앞머리를 밀고 변발하라고 강요하지 는 않았다. 베그라 불린 이슬람교의 민간 지도자들은 청의 봉급과 관직에 따라 편입되었다. 무역은 구리, 보석, 숄용 양모, 노예 등의 상품으로 확대되었지만, 이 지역의 가장 값진 광물인 옥이나 금의 채굴은 실질적으로 청이 독점했다.(131)

7장 서양과의 첫 충돌

새로운 조약 체제

새로운 개항장 건설에 대한 청 조정의 태도는 불분명했다. 조정의 많은 관료들이 공감했던 치잉의 견해에 따르면 서양인의 주된 동기는 상업적 욕심이기 때문에 만일 무역이 계속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들은 다른 요구를 억제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확신과 함께 치외법권 같은 양보조차도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치잉과 황제는 가장 최근의 경험인 1830년대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청의 외교정책을 근간으로 삼았다.(203) 예를 들면 1835년에 청 정부는 호전적인 코칸드의 칸민에게 카슈가르에 정치 주재소를, 야르칸드와 다른 주요 상업도시들에는 상관을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허가했다.(203-204) 정치 주재소는 알티샤르 지역의 다른 외국인에 대해서도 영사권과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다른 외국인이 이 지역으로 들여오는 물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도 가졌다. 또한 청은 이슬람 교도가 비이슬람 교도에게 부과하는 관세의 반(5% 대신 2.5%)만을 내도록 했으며 알티샤르에서 코칸트로 수출하는 물품은 면세 처리한다는 데 동의했다. 청은 이러한 양보가 주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무역권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코칸드 칸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값싸고 손쉬운 방법임을 터득했다. 이러한 협상에 참여했던 청의 고위 관료들 가운데 다수-또는 그 전에 일어난 전쟁의 영웅들이-가 1830년대와 1840년대 초반에 동남 해안에 부임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극서 정책과 동남 국경정책 사이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었다.(204)
중앙아시아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유력자들에게 그랬듯이 치잉은 난징 조약과 추가 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헨리 포틴저 경의 편의를 봐주었다. 치잉의 의도는 '명목 없이 그들과 싸우지' 않는 대신 '작은 일을 버리고 더 큰 일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렵게 얻어 낸 조약의 결정들이 영국과 다른 외세에게는 결코 '실속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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