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 역사
최상한 지음 / 돌베개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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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일에 쓴 글.

개인전 도중 읽은 책. 경상대 행정학과, 대학원 정치경제학과 현 학장 최상한 교수님이 쓰신 책이다. 서방 기독교와 동방정 교회, 네스토리우스교부터 소개한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천주교 공식 전래 이전인 임진왜란 이후에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알았고, 천주교 탄압과 천주교에 대해 알았던 조선 지식인들이 이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이 흥미롭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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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Tp-pfFS0wU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둥펑 미사일 2발을 발사했는데, 발사지 중 한 곳은 칭하이성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와 티베트자치구, 쓰촨성 사이의 중국 서부 내륙의 성이다. 17-18세기에는 몽골족이 지배했고, 이후에는 달라이라마가 지배하던 티베트 왕국의 영토였다가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후 티베트자치구(공식 명칭은 서장[서티베트]자치구)에서 분리시킨 윈난, 쓰촨 일부 지역에 속한 동장(동티베트) 지역이다. 일부 학계에서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중앙아시아를 넓게 중앙유라시아 지역이라고도 분류하는 지역에서 미사일 발사한 걸 보면, 중국과 미국의 갈등을 중국 내륙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철수했다 하지만, 전직 CIA 요원 Carter Ian Ames의《THE CIA In Xinjiang》에서 아프가니스탄의 CIA 비밀 기지에서 보낸 드론이 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루무치 근교에서 그에게 자금을 보내주는 내용이 나오는 걸 보면, 아무리 경제적, 군사적 위상이 약해졌다 해도 미국으로부터의 안전지대는 존재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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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새 번역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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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8일에 옮긴 글

‘이중 혁명‘ 전의 수십년은 봉건 질서의 옹호자들과 신흥 자본주의 사회의 지지자들이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인 시기였다. 이 투쟁의 중심에는 이른바 계몽주의 운동이 있었다.

봉건제 시대의 유럽을 지배한 사상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는 가톨릭교회의 철학자들이 만들었다. 그들은 가장 위대한 그리스 사상가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독교에 알맞도록 수정했다. 그 결과는 봉건영주와 국왕의 권력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세계관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라만상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목적에 따라 삼라만상은 세계 속에 위치가 정해졌다. 그래서 예컨대 물체는 정지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런 세계관은 두 가지 목적에 도움이 됐다. 첫째, 그것은 기독교의 신화, 즉 삼라만상을 신이 창조했다늘 믿음의 세련된 버전을 제공했다. (중략) 둘째, 그런 세계관은 봉건사회의 구조와 잘 맞았다. (중략) 이런 사상체계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지위가 정해져 있는 안정되고 조화로운 봉건 질서는 신이 만든 우주의 안정과 조화를 반영했다.

그러나 두 가지 새로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런 사상 체계는 도전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계급의 성장이었다. 새로운 상인과 제조업자들, 즉 신흥 부르주아지의 권력은 그들이 통솔할 수 있는 무장 집단이나 그들이 소유한 토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화폐, 즉 ‘자본‘을 통제하고 이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왔다.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 보일, 하위헌스, 뉴턴 등과 관련해 17세기에 일어난 위대한 과학혁명을 이런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봉건 이데올로기에 매우 파괴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15세기 말에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달리 지구는 우주의 안정적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훨씬 더 나아가서 관성의 법칙을 내놓았다. 17세기에 카톨릭교를 가장 세련되게 옹호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블레즈 파스칼은 ˝이 무한한 우주의 침묵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고 썼다.

아이작 뉴턴 경이 지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20세기 초까지 유지된 물리학의 토대를 놓았다. 뉴턴의 물리학이 받아들여진 것은, 부르주아지가 뉴턴 물리학의 장점을 인정한 것만큼이나 그들이 1640년과 1688년 혁명의 결과로 영국에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우위를 획득한 것을 반영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목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반면에 갈릴레오와 뉴턴의 물리학은 물체의 운동을 기계적으로 설명했다. 다시 말해 물체의 운동은 외부 힘의 작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은 유물론적이었다. 그 이론에는 목적도 없고 계획도 없고 신도 없었다. 다양한 물체들의 상호작용을 고려하기만 하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었다. 갈릴레오와 뉴턴을 비롯해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대체로 그런 추론을 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은 그런 추론을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1세가 어떤 프랑스 물리학자에게 ˝당신의 이론에서 신은 어떤 구실을 하는가?˝하고 물었을 때 그 물리학자는 ˝폐하, 저에게는 그런 가설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분명히 새로운 과학은 물리학에서 신과 목적을 쫓아내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다음 단계가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의 방법을 자연 연구에서 사회연구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1640~1660년의 영국 혁명 기간에 가장 위대한 부르주아 정치철학자인 토머스 홉스가 바로 그 단계로 나아갔다. 그의 유물론 때문에 홉스는 예수회한테서 ˝맘스버리[홉스가 태어나 자란 곳]의 악마˝라는 욕을 먹었고 그를 계승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홉스만큼 멀리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 연구는 바로 홉스의 걸작 《리바이어던》에서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자연 연구에서 관성의 원리(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모든 물체는 운동하고 있다)와 비슷한 어떤 기본적 원리를 찾는 것이었다. 이런 구실을 할 만한 후보로 그들이 내놓은 것은 인간의 열정이었다. 홉스와 계몽주의자들이 보기에 모든 사회연구의 출발점은 인간 본성의 연구였다. 그리고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정치 제도들이 그런 욕망이나 성향 추구를 더 쉽게 하거나 더 어렵게 하는 정도 뿐이었다.

그 전의 정치 이론과 견주면 계몽 사상은 엄청난 진보였다. 17세기에 로버트 팔머 경은 왕이 아담과 이브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사실에서 왕의 권력이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에는 세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인간 본성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을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인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했다. 심지어 다양한 사회의 차이를 아주 잘 아는 사상가 집단인 스코틀랜드 역사학파의 지도자 애덤 퍼거슨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둘째, 계몽주의의 인간 본성론은 대체로 인간의 정신에 관한 연구였다.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보다 그들의 열정과 생각을 더 중요한 것으로 취급했다. 띠나서 인간의 역사에 대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견해는 관념적이었다.

이런 역사관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정치 전략의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정치적 변화, 즉 절대왕정의 개혁이나 폐지는 사상투쟁의 결과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계몽의 결과이다.

이성의 무한한 힘에 대한 이런 믿음은 그 철학자들의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들은 글자도 모르고 미신을 믿는(다고 그들이 생각한) 다수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가는 극소수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면 계몽주의의 셋째 결함, 즉 엘리트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볼테르는 엘베티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재단사와 구두 수선공이 [사제들의-지은이] 통치를 받는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중요한 점은 당신과 함께 사는 그 사람들이 철학자 앞에서는 눈을 아래로 깔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국왕에게, 즉 국가에 이롭습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결코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1790년대까지 살아 있었다면 자신들의 활동이 봉건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린 것을 보고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중 한명인 콩도르세는 실제로 프랑스 혁명 때까지 살아남았는데 혁명의 와중에 단두대에서 죽었다.

이런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계몽사상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적 틀을 제공하는 데서 필수적 구실을 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이수현 옮김. [새 번역]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2.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85쪽~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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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잃어버렸다- 파블로 네루다

우리는 황혼조차 잃어버렸다.
푸른 밤이 세계 위에 내리는
이 저녁 손을 잡고 있는 우리를 본 사람이 없다.

나는 내 창에서 보았다
먼 산 꼭대기 석양의 잔치를.

때로는 태양 한 조각이
내 손가락 사이의 동전처럼 타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기억했다 너도 알고 있는
슬픔으로 단단해진 내 영혼으로.

그때 너는 어디 있었지?
거기서 너는 누구였지?
무슨 말을 했고?
왜 온 사랑은 내가 슬프고
네가 멀리 있다고 느낄 때 갑자기 내게 오는 거지?

항상 황혼 녘에 일을 시작하는 책은 떨어졌고
내 망토는 상처 입은 개처럼 내 발에 떨어졌다.

언제나, 언제나 너는 저녁 속으로 멀어진다
어스름이 조상들을 지우는 그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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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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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1일에 쓴 페북 글.

드디어 제임스 A. 밀워드의 <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다 읽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동투르키스탄)의 독립에 우호적인 역사학자라 그런지 ˝7장 중국과 세계 사이에서˝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상황을 묘사한다. 2005년에 쓰여져서 그런지 ˝위구르족 저항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묘사했지만, 한족과 위구르족의 미묘한 긴장을 노래와 단어로서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가령, 신장위구르자치구 내의 위구르족들이 한족에 비해 제2인자 지위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텐안문 시위대에 대해 동정했다는 이유로 부총리직에서 쫓겨난 자오쯔양이 정부 내 제 2인자인 부주석 자리를 제안받자, ˝나는 위구르족이 아니야!˝라고 소리질렀다는 일화를 소개한다.)정말이지 신장역사와 현재의 갈등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 싶다면 다소 두껍지만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중국이 점령한 시기부터 지금까지 역사인 ˝6장 중화인민공화국에서˝와 7장만 읽어도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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