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 - 성철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여정
원택스님 엮음 / 조계종출판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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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여정

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

조계종출판사

불교신문 기획

원택스님 엮음

 

성철스님에 대한 일대기를 읽은적이 있다.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81년 1월 산은산, 물은 물 이라는 법어로

세상을 흔들었던 스님입니다. 1993년 해인사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으셨다. 결혼도 하셨던분이고 아이도 있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먼저드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좋은신 말씀을

해주신분이지만 가족들을 힘들게 하신분이다. 물론 가족들의 이해가 되긴 했지만 어떻게 살면서 원망한번 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부입장에서 생각해다보니 더욱더 그렇다.

 

합천가야산 해인사를 찾아 들었을때는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 나는 중은 싫은데 부처님은 부처님을

좋아해 참선공부를 하려고 그런다고 말이야...." 속인으로써 해인사에서 참선한것은 성철스님말고는 전무후무하다고

한다. 여기에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업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잆다. 성철스님은 동산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천지가 개벽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동산스님이 성철이라는 이름을 내리셨고 수행을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줄탁동시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수 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불교를 찾았다고 했다. 다른곳에 진리를 찾게 되었다면 그곳으로 진리를 찾아 나섰을 것이라고

말할정도로 스님이라기보다는 진리자라고 말해도 될듯하다.  

인각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철스님은 광채가 번쩍이는 호랑이 눈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진리를 찾은 눈빛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속리산법주사 복천암은 세조가 기도를 올린 유서깊은 도량이다. 법주사를 몇번이나 찾아갔었는데 복천암을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이렇게 아쉬울때가 있나 싶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다음에 꼭 찾아보리라 생각이 든다.

조계종 종정이 첫 한글법어를 1981년 부처님오신날 발표했다. 이후 해마다 신념법어도 한글로 썼다고 한다. 성철스님의

한글법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 국민에게 알려 줬다는데 의의가 크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돼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한자가 꼭 필요한것이 아니다 모든이가 쉽게 이해하고

따라할수 있어야 하는것이다.

정광스님은 성철스님은 아랫사람의 바른 말을 언제든지 들어주셨고 권위나 위엄으로 누른다거나 막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철스님의 엄격한 면을 내세워 권위적이나 독선적이라고 하지만 정법을 지키는데만 엄격했을 뿐 대중과의 대화에서는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성철스님에게 받은 영향이라면 지행합일이라고 한다. 수행자의 깨달음이 근본이요

깨달은 그대로 현실에서 실천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삼각산 도선사에서 원택스님이 "어떻게 성전에서 동구불출 10여년 세월을 사셨습니까?" 라는 질문에 성철스님은 "이놈아!

내가 10년 살아야겠다고 하고 작정하고야 어떻게 10년을 살았겠느냐, 살다 보니 그렇게 세월이 갔제!" 라고 하셨다고 한다.

사람이 작정하고 하자면 너무 힘든법이다. 자연스럽게 젖어들다보니 10여년의 세월이 될것 뿐이다라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대학생 불자에게 애정이 특별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펼칠때는 추상같이 엄격했지만 학생들이 절을 떠날때는

안보일때까지 서있고 했다고 한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별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앞에 쓸데 없는 소리를 적은듯 하다. 이렇게 큰분의 대해서 몇자 적을수 있다는 것에 황송하다.

많은 언어들이 필요없는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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