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하늬,높새,갈마,소슬바람 러시아로 불다>를 읽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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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찾아 삼만리>

 

 

크렘린의 담장 외부를 따라 축조된 계단에 앉았다.

 

성 바실리 성당을 향해 있는 곳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성당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시야로 뛰어들었다. 처음 보는 것처럼 또 놀란다. 사람들이 그렇게 앉아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려다보이는 성당의 발치. 고개가 아프도록 젖힐 필요가 없는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성당의 지붕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향하면 파란 하늘에 색색의 풍선이 가득 떠있는 것 같았다. 정말 지겨운 줄 모르고 앉아 있게 되는 곳이었다. 정해놓은 시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계단에 앉아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딜 가 볼까, 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바실리 성당에서 오늘의 일정을 끝내기로 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방법은 올 때처럼 도보.

그런 결정을 내린 시간이 오후 3.

벌써? 싶겠지만 씨스뜨라는 충분히 지쳤다. 집을 나선 시간을 생각한다면 빠른 귀가도 아니다. 점심을 먹느라 앉아있었던 30분 정도를 빼면 내내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집에 도착할 때까진 일정이 끝난 게 아니다.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가장 지름길을 찾고자 하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소망. 실현까지는 시행착오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대중교통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소를 찾느라 걸어야 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아예 걷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 물론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택시를 탈 마음은 없어 보인다. 떠나기 전부터 씨스뜨라의 머리를 지배한 택시조심의 경고등이 아직 켜져 있는 상태인 모양이다. 아주 급한 상황이 아니면 아무래도 씨스뜨라가 택시를 탈 일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하여간 씨스뜨라는 지금 걷는 것이 제일 속편하다는 결론 상태에 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뒤를 따르는 것.

그렇다. 우린 어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렇게 걸어서 붉은광장까지 진출한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위대한 것 아닌가. 말도 설고 물도 선 땅에서 말이다.

 

분명 3시쯤 숙소를 향해 출발했는데 집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5.

돌아오는 길에 슈퍼마켓을 찾느라 고난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지쳐서 멀미가 날 정도가 되어 집 안으로 기어들었다.

지도상에 있는, 분명 그 곳에 있어야 할 슈퍼마켓이 보이지 않았다. 같은 길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른다. 슈퍼마켓이란 러시아 말을 찾아 묻기도 했는데 가 보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리가 물었던 단어는 음료나 과자를 파는 작은 가게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여간 천신만고 끝에 슈퍼마켓을 찾긴 찾았다. 찾고 보니 몇 번이나 지나왔던 곳에 있었으니 얼마나 허탈했을까. 상점은 큰 건물의 반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지상에 있는 매장이었으면 진열창 안으로 들여다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앞에 몇 번이나 서서 둘러보고 살피면서도 몰랐다.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큰 규모였는데 그렇게 넓은 매장에 비해 입구는 턱없이 작았다.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았다. 매장 입구에 적힌 간판 글씨는 알고 찾아가는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그저 간판을 찾고 있었던 외국인에겐 있으나마나였다.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슈퍼마켓에 들어섰을 땐 아무런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밥도 싫고 물도 싫고 그냥 눕고만 싶었다. 자주 쉬기만 했어도 이처럼 피폐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골목만 돌면, 저만큼만 가면, 나오지 싶기도 했거니와 도시 한가운데 쉴 만한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정의 마지막 한 시간이 나에게 지독한 악재로 작용했다. 그래도 인간의 정신은 악재보다 더 지독한 모양이다. 당나귀나 소는 정말 힘들다 싶으면 꼼짝하지 않지만 인간은 좀 다르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정신력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난 씨스뜨라의 밥 담당이다. 요리를 잘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나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 단체에서만 내가 요리사로 활약한다. 한심한 현실이다. 변변치 않은 체력과 변변치 않은 솜씨를 기꺼이 견뎌야 하는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한심하고 슬픈 현실임에 틀림없다.

초인적 힘을 발휘하여 장을 본다. 오늘은 기필코 음식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료를 사야만 한다. 음식목록이 내 머리에 들어있어야 하지만 머리는 지금 백지 상태. 오직 내 눈이 요행히 재료를 발견해야한 한다. . 달걀, 오이. 눈에 들어온 것들 중 필수품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주워 담았다. 그것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살필 여력이 정말 없다.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몸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의욕을 잃고 있는 사이에 과자 몇 봉지가 더 담긴다. 지치고 배가 고픈 그들이 고른 것들이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두 각자의 잠자리에 드러눕는다.

나갔던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몸을 쉬게 하는 것.

사람은 먹는 것으로만 에너지를 얻는 게 아니다. 휴식으로도 에너지를 충전한다.

아무도 말이 없다.

시간이 흐른다.

드디어 적어도 저녁을 해먹을 만큼의 에너지가 모인다.

나는 기운을 내어 일어난다. 내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자 갈마가 따라 들어온다. 높새도 뒤이어 들어온다. 얼마나 거창한 저녁을 먹자고 주방에 세 사람씩이나? 옳은 선수가 없으니 오합지졸이라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오합지졸 속에서도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씨스뜨라의 숨은 힘이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서 식탁 위에 꺼내놓으면 그들이 다듬고 씻고 썬다. 사실 난 무얼 할 것인지 먼저 머리를 굴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갖추어지지 않은 재료로 우리나라 음식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이 여행지에서 주방장을 하게 만든 나의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은 재료가 갖추어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재료가 없다고 해야 할 판이다. 내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건 달랑 오이 한 가지. 식탁을 슬쩍 훑어보는 높새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친다. 높새에게 맛없는 것 보다 싫은 맛은 똑같은 맛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평의 말은 못한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 난 눈치를 챘지만 속으로 웃고 만다.

갈마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표정으로 오이를 만지며, 깎을까? 한다. 표정으론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어쩌면 맛에 대한 상상을 하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생각의 켜기와 끄기가 잘 되는 사람이니까. 미리 당겨서 걱정을 하지도 않고 과거를 곱씹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 중 가장 당면한 현실에 충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늬는 궁금한 표정으로 주방으로 왔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이 되어 서 있다. 식탁 위에 있는 재료가 그녀의 상상력을 끌어오기엔 너무 빈약한 것 같다. 음식 재료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미리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이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표정이라고나 할까.

사실은 모두가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중이다. 저녁 메뉴는 아직 내 머리 속에만 있기 때문에 모두들 오이 한 가지로 저녁을?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재료가 턱없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너무 피곤해서 대충 장을 본 것도 있지만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모스크바 숙소엔 사흘을 묵는다. 내일 하루 더 자고 나면 짐을 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쉬운 대로 먹는 게 좋을 듯 했다. 음식 재료가 남으면 짐스럽기도 하거니와 양념 같은 건 밀봉을 잘한다 해도 옷가지가 든 여행가방 속에 함께 넣기는 그렇다. 그래서 사실은 가지고 간 유일한 양념인 고추장, 된장도 포장을 뜯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결심이고 발표하지 않은 채 실천에 옮긴다.

 

그렇다고 양념 없는 저녁을 먹은 건 아니다.

정말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면 고추장 포장을 뜯었을 것이다. 적어도,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는, 그런 여자는 아니니 말이다. 우리에겐 하늬의 고추장 양념이 있었다. 잣과 매실즙을 넣어 버무린 고추장이다. 가리는 음식이 많다보니 비상용으로 준비한 것이다. 그걸로 오이 무침이 가능했다. 그리고 냄비 밥을 짓고 가져온 라면 하나를 끓여 국 대신 식탁에 올려놓았다. 고향냄새가 물씬 나는 식탁이 차려진 것이다. 어찌하였든 국과 밥과 반찬이 있는 저녁이었고 식탁을 마주한 그들의 표정에서 비로소 의구심이 사라졌다. 익숙한 수저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마음이 푸근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밥을 입에 먼저 넣고 젓가락질로 오이무침을 먹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퍼먹는 식사법.

고국에서야 참 듣도 보도 못한 상차림이겠지만 이게 외국에선 통하는 것이다. 찰기가 없는 밥도 구수하고, 고추장 색깔만 나도 침이 고이는 오이무침에, 라면 국물은 얼큰하고 시원하다. 고국에선 도저히 통하지 않을 맛에서도 고향을 느끼는 것이다. 익숙한 것과 멀어진 곳에서는 음식이, 맛있다, 맛없다, 가 아닌, 고향냄새가 나는가? 이국 냄새가 나는가? 가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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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 성당>

 

 

참 예쁘다!

정말 독특하다!

볼수록 아름답다!

보면 볼수록 정말 예쁘고 특별하고 아름답다!

 

성 바실리 성당(흐람 바실리야 블라줸노보) 앞에 한 시간 가량 머물면서 생긴 느낌의 변화이다.

내내 감탄했지만 느낌은 시시각각 요동쳤다.

그것은 타지마할처럼 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큰 건물이 그렇게 가볍게. 더구나 결코 뜰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성 바실리 성당은 광장 저 멀리에서 색색의 풍선처럼 떠올랐다.

붉은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눈은 그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건 어디서나 보이는 신기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기대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 위대한 것은 말이 필요 없다는 증거같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난 정말 아무런 정보 없이 그 곳에 갔고 존재를 눈으로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물었고 알았다. 어디선가 떠들었겠지만 머리에 담겨 있지 않았다. 요즘 세상엔 정보가 너무 많아 정보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사람에겐 한 끼에 한 그릇의 밥만 있으면 된다. 수백 수천 그릇을 갖다 준다 해도 한꺼번에 위 속에 담을 수는 없다. 먹을 수 없는 밥은 용도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머리에 담기지 않는 정보는 정보가 아닌 것이다. 그것에 대한 정보도 그렇게 흘러가는 정보 속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오면 오히려 정작 필요한 것을 놓치기 십상이니까.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박쥐 무리 속에서 사냥감을 선택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하지만 그런 문제를 초월한 곳에 성 바실리 성당이 있었다.

부활의 문을 통과하자마자 아득한 넓이를 자랑하며 눈앞에 나타난 광장.

그 광장을 이루고 있는 직사각형의 수많은 돌.

돌바닥을 눈으로 더듬는 순간 내 눈길을 당기는 강력한 그 무엇.

마치 황제가 신하를 부르듯 당당하고도 힘차게 끌어당기는 힘.

나는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 그에게 다가간다.

감히 눈길도 돌리지 못한 채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광장을 메운 엄청난 인파도 보이지 않았고 크렘린의 긴 담장도 보이지 않았고 굼 백화점의 위용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저 멀리 덩실 떠 있는 황홀한 풍선만 보였다. 오른쪽 붉은 담장이 크렘린 궁전이고 왼쪽의 엄청난 규모의 건물이 굼 백화점이란 건 나중에야 알았다. 크렘린과 굼 백화점의 미적 가치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만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은 같은 듯 모두 다르고 높이도 색도 무늬도 다르다. 다양함 속의 조화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화려하다고 말하기엔 눈부시지 않고 아름답다고 말하기엔 너무 신비하고 예쁘다고 말하기엔 너무 고상하다. 중앙의 제일 높은 첨탑 꼭대기는 황금의 양파. 지금은 금이 곧 돈으로 환산되는 이유로 가치가 높겠지만 원래 가치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보아도 황금의 가치는 찬란함이다. 변하지 않는 찬란함이 황금의 진짜 값이 아닐까. 지금 훌쩍 날아오른 높이로 푸른 창공에 떠있는 금빛 구체는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부신 태양과 그보다 더 눈을 시리게 하는 하늘에 밀리지 않는 찬란함으로 존재를 뽐낸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입이 벌어지는 당당한 아름다움이다.

고개를 조금 숙이면 또 다른 감탄 속으로 이끄는 녹색 다각 지붕의 첨탑들. 참으로 신비한 녹색이다. 색채가 주는 신비함인지 그런 색채로 치장된 모양과 선의 아름다움이 내뿜는 신비함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아니면 그 색채는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할 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따로 존재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운명은 참 무거우면서도 신비한 것이니까.

이제 눈길은 조심스럽게 녹색의 지붕을 벗어난다.

아니 벗어난 게 아니라 다른 것에 붙들린다. 겨우 큰 숨을 길게 내쉬는 짬을 얻었을 뿐이다. 생색내지 않겠다는 듯 침착한 붉은 벽돌의 몸체. 몸체는 조심스럽게 존재를 드러낸다. 붉지만 결코 나대지 않는 채도다. 고요히 절을 하고 얼굴을 든 신부 같은 얼굴로 나를 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더 자세히 보면 또 다른 세계로 몰입하게 만드는 세부 조각과 무늬.

눈을 잠시 감고 심호흡을 한다. 잠깐 쉬어가고 싶다. 계속될 감탄에 대한 대비책이다. 하지만 쉬지 못한다. 감은 눈 속에서 색채들이 춤을 춘다. 예쁜 사탕들이 즐비한 사탕가게다. 맞다! 무늬도 색깔도 다른 색색의 양파 지붕은 앙증맞고 알록달록한 사탕 같지 않은가. 그렇게 큰 건물의 지붕이 사탕이라니. 하지만 아기자기하고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분명 거기에 있다.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라니. 어른들의 동화가 있다면 그런 모습일까.

눈을 뜬다.

, 동화의 나라다!

아이의 마음도 어른의 마음도 훔쳐갈 환상의 세상이 눈앞에 있다.

성당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둘러보아야 한다. 볼수록 매력덩어리. 코앞까지 다가갔다 물러나기를 여러 번. 그럴 때마다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사진으로 담아놓으면 더욱 감탄스럽다. 러시아를 떠나기 전, 기회가 있어 다시 온다 해도 여전히 무섭도록 정신을 홀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 성당의 건축에 관련된 무서운 이야기는 나에겐 더 이상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러시아 황제 이반 4세는 타타르족의 왕국, 카잔한국을 물리친 기쁨을 기념하고 싶었다. 그래서 뛰어난 건축가를 불러 성당을 짓게 했다. 성당은 지은 지 5년 만인 1560년에 마침내 완성된다. 완성된 성당은 완벽했고 황제는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취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이 성당만이 가져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곳에 이와 같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건축가의 눈을 멀게 했다고.

물론 건축가의 눈에 대한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난 성당을 보고 나서야 가이드북에서 이 글을 읽었다. 아마 보기 전에 읽었다면 웃어넘겼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설 같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유를 수긍한다는 의미다. 어떤 말로도 표현해내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답답함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강렬한 감동을 강렬하게 새겨줄 단어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 그리고 끔찍한 이야기는 강렬한 감동을 전할 수는 없어도 강렬한 자극을 주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전설이 될 만큼 지독하게 아름다운 건물.

전설 같은 이야기를 먼저 읽고 성당을 보게 된 여행객들일지라도,

끔찍한 이야기가 주는 것보다 더 강렬하고,

더욱 오래 남을,

감동을 받을 것이,

분명한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이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타타르인에게 성 바실리 성당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지금은 러시아의 자치공화국이 된 카잔.

그들의 눈에도 성 바실리 성당은 그토록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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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크렘린>

 

 

학창 시절에 크레믈린이란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의미로 그렇게 불렸다. 그 시절 우리들에게 사회주의는 그런 의미였다. 러시아가 아닌 소련이었던 그 때, 소련이란 나라만큼이나 그 나라 정치의 중심이었던 크렘린 궁(마스꼽스끼 끄레믈)’도 온통 깜깜한 비밀이었다. 신비에 싸인 비밀이 아니라 알려진 것이 없어 그저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검은 비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만큼 불신도 커서 꿈에도 크렘린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고 비밀의 베일이 벗겨진 지금, 찬란한 보석별과 붉은 벽돌의 아름다운 배열에 감탄한 채, 나는 서 있다. 두려움 그 자체였던 크렘린 앞에서 설레고 있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크렘린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의 성채를 말한다.

특히 모스크바에 지어진 크렘린은 14세기에 이반 3세가 건축한 뒤로 제정 러시아 황제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지금도 러시아 정부의 여러 기관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역사적인 건축물인 동시에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생생한 문화재인 것이다. 그래서 크렘린, 하면 모스크바에 있는 크렘린 궁전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크렘린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으로 따라 간다.

우선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니까.

관광지에선 정보보다 눈치가 한 수 위인 경우가 많다. 정보를 믿지 못하느냐고? 당연히 믿는다. 그러나 참고할 뿐이다. 정보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늘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정보다. 그리고 달라지지 않는 정보가 제대로 된 정보구실을 하겠는가. 박물관, 전시관의 정보도 늘 바뀐다. 전시물이 교체되기도 하고 전시관이 옮겨지기도 하며, 입장권 가격이 달라지고 출입구 위치도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유명 건축물이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다. 비록 최신의 정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 날 일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가는 날이 장날이란 속담이 하루아침에 그냥 생긴 것이 아닌 것이다. 알고 보면 오랜 경험과 엄청난 철학이 담겨 있는 위대한 말씀이다. 그러니 정보를 맹신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는 선의 융통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특히 여행지에선.

뜨로이쯔까야 망루 쪽에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확인한 망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 본 서양인 얼굴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망루는 비슷해 보인다. 적어도 미묘한 차이의 아름다움까지 알아보려면 좀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여행이 끝나갈 때쯤에는 확실히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진 걸 느꼈다. 한눈에도 수려하게 다가오는 건축물이 있었고 그 감탄엔 일리가 있었다.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지만 또 누구나 감탄하게 하는 보편의 기준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걸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내 눈은 드디어 러시아 건축물의 걸작을 알아볼 정도로 보는 감각이 세밀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뜨로이쯔까야 망루를 발견한다.

사람의 행렬을 따라가니 거기 망루가 있었다. 정말로 눈치가 승리한 것이다. 시야가 넓은 높새가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망루를 가리킨다. 꼭대기에 오각형 보석별을 달고 있는 붉고 둥근 몸통의 망루가 햇살 아래 우뚝 솟아 있다. 햇살도 망루도 눈이 부시다.

, 하지만 망루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의 줄.

망루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금세 기가 꺾이고 만다.

햇살은 이미 맹렬한데 그 타오르는 햇빛 아래 고스란히 노출된 채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난 못하겠다. 땡볕에 줄 서긴 싫어.

나만 엄두가 나지 않는 건 아니다. 누구도 선뜻 줄을 서자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씨스뜨라는 햇살 속의 긴 줄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다.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 하는데 난감하다. 오직 크렘린 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어왔던 길이고 지금 그 길의 끝이며 시작점에 와 있는 것이다. 입구를 앞에 두고 돌아서서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묘안이 떠오르지도 않지만 결코 줄을 설 마음도 없다.

차라리 안 보고 만다.

아니 지금은 아니다.

언젠간 줄이 줄어들겠지.

현재의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눈길을 돌린다. 주변엔 나무도 많고 나무 그늘 아래엔 벤치도 있다. 벤치마다 한가로이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도 우리처럼 줄 설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러고 있는 것인가. 내가 벤치를 살피며 두리번거린다.

우선 좀 앉아서 생각할까?

갈마가 반가운 제안을 한다. 기다렸다는 듯 앞장 서 벤치로 간다. 내가 앞장설 때는 딱 이럴 때 뿐이다. 쉬는 자리를 발견했을 때.

아픈 다리가 편해지고 바람도 시원하다.

비로소 새롭게 파악되는 상황.

여유를 가져야 보이는 것이 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관광객이 아니다. 대개 공원에 놀러 나온 러시아인들. 물론 관광객들도 더러 섞여 있긴 하지만 그들은 잠시 앉았다 일어난다. 목적지가 따로 있는 까닭이다. 그들에게 공원은 거쳐 가는 곳. 그래서 대부분은 크렘린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거나 입장권을 사는 곳에 몰려 있다. 그리고 그제야 파악한다. 우리가 앉아 있는 벤치 뒤에 있는 유리 건물이 입장권 판매소라는 걸. 망루 앞의 긴 줄은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들의 입장 대기 줄이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는 알렉산드로프 정원. 모스크바 최초의 시민공원이기도 한 정원 안에 크렘린 티켓오피스가 있는 것이다. 분명 가이드북에서 읽었을 테지만 조금 전까지 그 정보는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에게도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이었으니까. 벤치에 앉아 책자를 펼치고서야 기억이 났고 저마다 혀를 찼다.

갈마와 함께 티켓오피스로 가서 크렘린 입장권을 구입한다. 입장권이 다양했지만 사원광장 및 성당이라고 쓰인 표를 구입한다. 성인 500루불. 가장 간단한 걸 구입한 이유는 어차피 넓은 궁전 안을 샅샅이 본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이다. 작정하고 돌아다니면 점을 찍듯 구경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마음은 없다. 그렇게 본다 해서 기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느낌 없는 기억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표를 사서 나오니 크렘린 입구의 긴 줄이 사라지고 없다.

알고 보니 관람 시간이 되지 않아 입장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것.

여유를 가지고 움직인 보람이 있다.

크렘린 궁전 안에는 군인들이 많았다.

사실 가장 색달랐던 풍경이었다.

여행객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닌 곳에는 반드시 군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군인들의 지시에 순응하는 시민들.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비로소 체제가 다른 나라란 느낌이 몸에 와 닿는다. 다니지 않아야 할 길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제지를 당하는데 관광객의 표정과 현지인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불편한 표정이 스치는 관광객과는 달리 시민들의 표정은 당연한 듯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나 순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에 여러 생각이 스친다. 크고 억세게 보였던 러시아 사람들. 아니 그런 생각은 정말 편견이었던 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에 대한 많지도 않은 정보조차 왜곡된 정보가 아니었는가 하는. 유럽에 대한 정보에 비하면 정말 가난한 정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순한 모습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길들여진 모습인지 아님 이들에 대한 생각이 정말 편견이었던 것인지.

자꾸만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공원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더구나 그들이 만들어낸 문학과 무용과 음악을 생각하면.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예술은 신의 영역이라는데.

신의 영역을 사랑하는 사람들.

절로 사색하게 만드는 사원광장.

금빛의 아름다운 둥근 지붕.

단순하고 우아한 선으로 이어진 궁전의 담장.

망루 꼭대기의 보석별.

 

궁전은 아름다웠고 아름다움을 대하는 심정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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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광장이 아닌 아름다운 광장>

 

 

붉은광장 주변 관광이 오늘 일정이다.

 

어제 슈퍼마켓 찾는 데 실패한 덕분에 커피만으로 아침을 삼고 8시에 집을 나선다. 아침을 못 먹었지만 씨스뜨라의 기분은 상쾌하다. 아직 이른 시간이고 멋진 아침식사가 기다리는 미래가 코앞에 있으니까. 카페가 즐비한 거리를 지나갈 테니까 말이다. 자료와 지도에 있는 대로 거리가 펼쳐진다면. 그리고 제대로 찾아간다면.

높새가 그랬다. 우린 구 아르바뜨 거리를 지나갈 것이라고. 아니 일부러 그 길을 통해 붉은광장 쪽으로 갈 것이라고. 아르바뜨 거리 또한 유명한 관광지라면서. 1킬로미터가 넘는 보행자 전용도로이자 문화 예술의 거리. 많은 카페와 거리 예술로 늦은 밤까지 관광객과 젊은이로 넘쳐나는 거리. 그러니까 거리 자체가 예술이라나?

아름다운 예술의 거리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리라.

이런 야무진 꿈으로 정신 무장을 한 채 일정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는 러시아!

지금 딛고 있는 거리는 러시아 거리!

저기 보이는 건물은 러시아 건물!

어제와 다른 흥분이 발걸음에 실린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신선하니 걷는 것 자체가 신나는 여행이다. 산산한 기온은 걷기에도 알맞다. 그리고 밤새 충전된 기운이 빵빵한 아침 시간.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한 여자의 기는 한껏 살아 있다. 흥분의 시간이 30분쯤 흐른다. 별 어려움 없이(앞장 선 사람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르바뜨 거리에 도착한다.

그런데 세상에나!

그 곳엔 씨스뜨라만 있다. 관광객도 예술행위도 문을 연 상점도 없었다. 텅텅 빈 거리. 예술은 어디 있으며 무엇이 문화란 말인가. 빈 거리엔 벤치만 설렁하다. 건물에 가려 반쯤은 그늘진 거리가 춥기까지 하다. 해는 벌써 떴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 이 곳은 여행자의 왕국이 아니다. 여행자가 많이 오는 곳일 뿐. 현지인의 터전인 이 곳엔 현지인의 생활 방식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광지의 상점도 이렇게 일찍 문을 열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너무 일찍 집을 나선 것이다.

빈 거리의 남아도는 벤치에 앉아 어지러운 정신을 수습한다. 철없는 여행자 티가 물씬 나는 모습이다. 한참 앉아 있다 보니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대로 볼만하다. 아니 조용해서 좋은 점도 있다. 사색에 잠겨있는 건물 자체의 모습과 빈 거리가 주는 적막을 오롯이 느낀다.

다시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어차피 이 거리를 지나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최종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붉은광장이다.

길 중앙에 가벽이 줄이어 있고 가벽은 벽화를 위한 것인 모양이다.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벽화를 따라 걷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나간다. 푸시킨 부부 동상도 본다. 러시아인들이 정말 사랑한다는 작가, 푸시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동상이란다. 그런데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벽화를 몰라보고 그냥 지나친다.

빅토르 최는 한국계 러시아인 락 가수로 199028세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 당시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이 많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와 쌍뜨뻬쩨르부르그, 카잔 등 여러 도시에 그를 기리는 추모 벽이 생겼다.

그가 죽은 날인 815일엔 벽화 앞에서 추모 모임도 열린다는데, 우린 벽화를 코앞에 두고도 그냥 지나친 것이다. 보고도 보지 못한 채로. 아니 그 거리를 벗어나고서야 보지 못한 걸 알았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려, 다음에 가지, 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여행은 인생하고 닮았다. 지나간 길을 다시 오긴 참 어렵다. 부지불식간에 지나쳐오면서, 돌아올 때 봐야지, 했던 걸 본 적은 별로 없다. 돌아오는 길이 달라지기도 하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경우도 있으며, 또 잊어버리고 지나쳐가기도 하고, 마음이 달라지거나 너무 지쳐 의욕이 사라지기도 했다.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운이 함께 따라주어야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다른 큰 목적이 우리의 눈을 가로막았을 수도 있다.

아르바뜨 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다음 목적지까지 얼마나 가야 할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마당에 계속 행군하는 건 불안했다. 슬슬 배가 고파지고 있었으니까. 이미 우아한 아침 식사는 좌절되었다. 먹을 것을 팔기만 하면 들어갈 자세로 바뀌었다. 한껏 눈을 낮추었지만 아예 포기해야 될 지도 몰랐다. 거리엔 행인조차 없었으니까. 그런 거리에서 가게가 문을 열 이유는 없지 않은가. 먹고자 하는 삶의 본능이 온통 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그런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저, 혹시? 하는 가냘픈 소망의 눈으로 문이 열린 빵집이나 찻집을 찾았다. 그런 지경이었으니 눈앞에 빅토르 최가 살아나 노래를 부르고 있어도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 아침을 해결했다.

가게 한 쪽에 테이블 하나가 놓인 작은 빵집에서 커피와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빵 종류가 제법 많았지만 무슨 빵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커다란 빵은 너무 커서 엄두가 나지 않았고 작은 빵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높새에겐 양고기가 하늬에겐 어떤 고기류도 들어있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더구나 신중해야했다. 그런데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그저 모양만 보고 손가락으로 빵을 고를 수밖에 없는 처지. 처음으로 맞이하는 외식이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하늬는 달콤한 빵이면 족하다 한다. 달콤한 빵은 진열장 속에서도 다른 빵과 구분되어 놓여있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양고기나 생선 같은 것은 어떻게 피하지? 피할 수 없으면 선택을 하자. 치즈가 든 것을 고르자. 치즈는 높새도 좋아하니까.

스마트 폰을 급히 연다. 많이 쓰일 법한 러시아 어를 아예 사진으로 찍어왔다. 나름 종류별로 구분하여 적고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치즈는 러시아 음식사진 속에 들어 있다. 금방 찾는다.

정말 신통한 것을 생각해낸 기쁨에 취해 가게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빵이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씌르? 라고 물었다. 물론 정확한 발음인지 확신은 없었다. 비슷하기라도 하면 정정해서 발음해 주겠지 하는 생각에 질러본 것이다. 여주인이 반색을 하며 한쪽 진열장 전체를 채우고 있는 빵 무더기를 가리킨다. 맙소사. 그 많은 빵에 들어있는 것이 모두 치즈였던 것이다. 이제 치즈 종류를 골라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갈마가 내가 마주보고 웃는다. 치즈면 됐지, . 그런 웃음이다. 손가락이 가는 대로 3개를 고른다.

텅 빈 거리를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아무도 맛에 대한 이야긴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맛인 모양이다.

 

아르바뜨 거리를 벗어나 붉은광장을 찾아가는 길.

얼마나 걸었을까.

걸어가다 국립도서관을 만났다. 러시아 최대 도서관이라 하지만 들어갈 생각은 없다. 들어가서 무슨 책을 찾아보겠으며 찾아서 어떻게 읽는단 말인가. 사실 이미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니 여기서 힘을 더 빼버릴 수 없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모든 일정이 끝난 시점에 나타났다면 내부 구경에 대한 욕망이 생길 지도 몰랐다. 러시아 최대의 도서관 내부가 궁금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다리품을 조금은 팔아본다. 도서관 앞에 있는 동상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는데 비둘기들이 날아오른다. 그들이 남긴 똥으로 계단은 엉망이다.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보면서 환호를 하고 똥을 보곤 질겁하며 피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동상 앞에서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 동상을 찍는다. 그 아래 적힌 이름까지 넣어서. 동상의 주인공은 도스토옙스끼.

높새가 던져준 정보가 아니었다면 동상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누군지도 몰랐을 테니까.

지난 밤, 붉은광장 가는 길을 찾느라 책과 지도를 봐가며 그녀만의 지도를 만들어온 메모지에 떡하니 적혀있었다.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되는 큰 건물이 바로 국립도서관이었던 것. 그리고 동상의 존재도 메모해 놓았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배려한 것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도서관을 쳐다보면서 그냥 지나가려는데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스토옙스끼인데 안 보고 그냥 가니?

그래? 아무리 바빠도 그건 보고 가야겠네.

난 가던 걸음을 돌린다.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 주인공 이름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있는 바로 그 <죄와벌>의 작가라니. 반색을 하며 계단을 오른다. 높새는 아마도 내가 기뻐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 알파벳을 익혀간 덕분에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듬거리며 이름 하나 읽은 것이 그렇게 기쁜 일인가? 하지만 소리까지 내어 읽어나가는 소리가 바로 그 이름으로 들리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많이 아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것이 기쁜 모양이다. 처음 한글을 깨우칠 때의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해본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는 순간 가치도, 신선함도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란 가치도 있지 않은가. 결국 익숙해진다는 것은 편안함을 얻는 대신 신선함을 잃어버리는 것인가.

스치는 생각을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온다. 씨스뜨라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높새는 지도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갈마와 하늬가 그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높새의 손가락이 향한 곳 어디쯤에 붉은광장이 있을 것이다.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입체도 아닌 종이에 적힌 지도를 보고 어떻게 건물이 가득한 입체적인 길을 찾아간다는 것인지. 참 신기한 세계의 사람들이다. 높새는 이후로도 계속 밤마다 다음 날 가야할 곳의 교통편이나 길을 찾느라 격무에 시달린다. 신기한 세계의 사람에게도 그 일이 마냥 쉽진 않은 모양이다.

 

**

붉은광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주변을 둘러 싼 건물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득하게 펼쳐진 돌바닥 자체도 아름답지만 광장을 둘러싼 수려한 건물들이 없었다면 아름다움은 쓸쓸함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광장을 이루는 수많은 네모난 돌. 그저 단순하고 단단한 하나의 돌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어떤 생명력을 이룩했지만 그것만으론 쓸쓸하다. 광장을 따라가던 눈길이 마지막으로 갈 곳은 어디인가. 광장의 끝에 이르면 허공을 헤맬 것이 아닌가. 허공을 헤매는 눈길을 막아주는 무엇이 있어야 광장은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리고 광장은 모름지기 사람이 모이는 곳. 사람이 모일 수 없는 광장은 더 이상 광장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그래서 광장은 들판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도시의 중심이나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곳에, 언제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그래서 광장은 비워진 채로도 아름다워야 하고 북적거릴 때는 더욱 아름다워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 곳.

붉은광장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분명히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힘을 마력으로 변화시키는 수호자가 따로 있으니 그것이 바로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들.

질리지 않는 광장의 꽃, 성 바실리 성당.

오가는 사람들에게 묘한 기대감과 활력을 주는 우아한 굼 백화점.

역사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크렘린 궁.

광장의 중앙에 서서 눈길을 돌려보면, 나를 둘러싼, 아니 광장을 둘러싼 멋진 건축물들이 시선을 받아준다. 시선이 어디를 향할지라도 결코 방치하지 않는다. 방치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쓸쓸하지 않은 아름다움에 젖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광장에 홀로 서 있더라도.

 

그런데 붉은광장이라니.

광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잘못 번역한 결과라 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역인 채로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되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저절로 올까. 오역의 결과가 나한테 일어난 일이었다면 얼마나 어처구나 없고 억울했을까. 한시바삐 누명을 벗고 싶어 안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광장은 인간의 판단에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다. 어차피 인간이 지은 이름. 이름이 본질을 흐리지는 못한다. 그러니 광장이 영혼을 가졌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광장의 영혼과는 상관없이 인간인 내 마음은 괜히 답답하다. 처음 광장의 이름을 짓고 불러주었던 사람들은 내 마음과 같을 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광장’. 원래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대답을 하듯 아름답게 다가오는 광장이다. 그런 광장을 두고 붉은광장이라니.

붉은광장은 러시아어로 끄라스나야 쁠로쉬찌. ‘끄라스나야는 현재 붉은으로 번역되지만 아름다운이란 뜻도 있다고. 아마도 번역자는 사회주의 하면 떠오르는 색인 붉은으로 해석하면서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냉전시대에 태어나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면 더구나. 이제 오역임을 알았으니 고쳐 불러주는 게 마땅할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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