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광장이 아닌 아름다운 광장>
붉은광장 주변 관광이 오늘 일정이다.
어제 슈퍼마켓 찾는 데 실패한 덕분에 커피만으로 아침을 삼고 8시에 집을 나선다. 아침을 못 먹었지만 씨스뜨라의 기분은 상쾌하다. 아직 이른 시간이고 멋진 아침식사가 기다리는 미래가 코앞에 있으니까. 카페가 즐비한 거리를 지나갈 테니까 말이다. 자료와 지도에 있는 대로 거리가 펼쳐진다면. 그리고 제대로 찾아간다면.
높새가 그랬다. 우린 구 아르바뜨 거리를 지나갈 것이라고. 아니 일부러 그 길을 통해 붉은광장 쪽으로 갈 것이라고. 아르바뜨 거리 또한 유명한 관광지라면서. 1킬로미터가 넘는 보행자 전용도로이자 문화 예술의 거리. 많은 카페와 거리 예술로 늦은 밤까지 관광객과 젊은이로 넘쳐나는 거리. 그러니까 거리 자체가 예술이라나?
아름다운 예술의 거리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리라.
이런 야무진 꿈으로 정신 무장을 한 채 일정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는 러시아!
지금 딛고 있는 거리는 러시아 거리!
저기 보이는 건물은 러시아 건물!
어제와 다른 흥분이 발걸음에 실린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신선하니 걷는 것 자체가 신나는 여행이다. 산산한 기온은 걷기에도 알맞다. 그리고 밤새 충전된 기운이 빵빵한 아침 시간.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한 여자의 기는 한껏 살아 있다. 흥분의 시간이 30분쯤 흐른다. 별 어려움 없이(앞장 선 사람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르바뜨 거리에 도착한다.
그런데 세상에나!
그 곳엔 씨스뜨라만 있다. 관광객도 예술행위도 문을 연 상점도 없었다. 텅텅 빈 거리. 예술은 어디 있으며 무엇이 문화란 말인가. 빈 거리엔 벤치만 설렁하다. 건물에 가려 반쯤은 그늘진 거리가 춥기까지 하다. 해는 벌써 떴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 이 곳은 여행자의 왕국이 아니다. 여행자가 많이 오는 곳일 뿐. 현지인의 터전인 이 곳엔 현지인의 생활 방식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광지의 상점도 이렇게 일찍 문을 열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너무 일찍 집을 나선 것이다.
빈 거리의 남아도는 벤치에 앉아 어지러운 정신을 수습한다. 철없는 여행자 티가 물씬 나는 모습이다. 한참 앉아 있다 보니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대로 볼만하다. 아니 조용해서 좋은 점도 있다. 사색에 잠겨있는 건물 자체의 모습과 빈 거리가 주는 적막을 오롯이 느낀다.
다시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어차피 이 거리를 지나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최종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붉은광장이다.
길 중앙에 가벽이 줄이어 있고 가벽은 벽화를 위한 것인 모양이다.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벽화를 따라 걷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나간다. 푸시킨 부부 동상도 본다. 러시아인들이 정말 사랑한다는 작가, 푸시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동상이란다. 그런데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벽화를 몰라보고 그냥 지나친다.
빅토르 최는 한국계 러시아인 락 가수로 1990년 28세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 당시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이 많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와 쌍뜨뻬쩨르부르그, 카잔 등 여러 도시에 그를 기리는 추모 벽이 생겼다.
그가 죽은 날인 8월 15일엔 벽화 앞에서 추모 모임도 열린다는데, 우린 벽화를 코앞에 두고도 그냥 지나친 것이다. 보고도 보지 못한 채로. 아니 그 거리를 벗어나고서야 보지 못한 걸 알았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려, 다음에 가지, 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 여행은 인생하고 닮았다. 지나간 길을 다시 오긴 참 어렵다. 부지불식간에 지나쳐오면서, 돌아올 때 봐야지, 했던 걸 본 적은 별로 없다. 돌아오는 길이 달라지기도 하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경우도 있으며, 또 잊어버리고 지나쳐가기도 하고, 마음이 달라지거나 너무 지쳐 의욕이 사라지기도 했다.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운이 함께 따라주어야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다른 큰 목적이 우리의 눈을 가로막았을 수도 있다.
아르바뜨 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다음 목적지까지 얼마나 가야 할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마당에 계속 행군하는 건 불안했다. 슬슬 배가 고파지고 있었으니까. 이미 우아한 아침 식사는 좌절되었다. 먹을 것을 팔기만 하면 들어갈 자세로 바뀌었다. 한껏 눈을 낮추었지만 아예 포기해야 될 지도 몰랐다. 거리엔 행인조차 없었으니까. 그런 거리에서 가게가 문을 열 이유는 없지 않은가. 먹고자 하는 삶의 본능이 온통 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그런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저, 혹시? 하는 가냘픈 소망의 눈으로 문이 열린 빵집이나 찻집을 찾았다. 그런 지경이었으니 눈앞에 빅토르 최가 살아나 노래를 부르고 있어도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 아침을 해결했다.
가게 한 쪽에 테이블 하나가 놓인 작은 빵집에서 커피와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빵 종류가 제법 많았지만 무슨 빵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커다란 빵은 너무 커서 엄두가 나지 않았고 작은 빵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높새에겐 양고기가 하늬에겐 어떤 고기류도 들어있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더구나 신중해야했다. 그런데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그저 모양만 보고 손가락으로 빵을 고를 수밖에 없는 처지. 처음으로 맞이하는 외식이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하늬는 달콤한 빵이면 족하다 한다. 달콤한 빵은 진열장 속에서도 다른 빵과 구분되어 놓여있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양고기나 생선 같은 것은 어떻게 피하지? 피할 수 없으면 선택을 하자. 치즈가 든 것을 고르자. 치즈는 높새도 좋아하니까.
스마트 폰을 급히 연다. 많이 쓰일 법한 러시아 어를 아예 사진으로 찍어왔다. 나름 종류별로 구분하여 적고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치즈는 ‘러시아 음식’ 사진 속에 들어 있다. 금방 찾는다.
정말 신통한 것을 생각해낸 기쁨에 취해 가게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빵이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씌르? 라고 물었다. 물론 정확한 발음인지 확신은 없었다. 비슷하기라도 하면 정정해서 발음해 주겠지 하는 생각에 질러본 것이다. 여주인이 반색을 하며 한쪽 진열장 전체를 채우고 있는 빵 무더기를 가리킨다. 맙소사. 그 많은 빵에 들어있는 것이 모두 치즈였던 것이다. 이제 치즈 종류를 골라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갈마가 내가 마주보고 웃는다. 치즈면 됐지, 뭐. 그런 웃음이다. 손가락이 가는 대로 3개를 고른다.
텅 빈 거리를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아무도 맛에 대한 이야긴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맛인 모양이다.
아르바뜨 거리를 벗어나 붉은광장을 찾아가는 길.
얼마나 걸었을까.
걸어가다 국립도서관을 만났다. 러시아 최대 도서관이라 하지만 들어갈 생각은 없다. 들어가서 무슨 책을 찾아보겠으며 찾아서 어떻게 읽는단 말인가. 사실 이미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니 여기서 힘을 더 빼버릴 수 없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모든 일정이 끝난 시점에 나타났다면 내부 구경에 대한 욕망이 생길 지도 몰랐다. 러시아 최대의 도서관 내부가 궁금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다리품을 조금은 팔아본다. 도서관 앞에 있는 동상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는데 비둘기들이 날아오른다. 그들이 남긴 똥으로 계단은 엉망이다.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보면서 환호를 하고 똥을 보곤 질겁하며 피한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동상 앞에서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 동상을 찍는다. 그 아래 적힌 이름까지 넣어서. 동상의 주인공은 도스토옙스끼.
높새가 던져준 정보가 아니었다면 동상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누군지도 몰랐을 테니까.
지난 밤, 붉은광장 가는 길을 찾느라 책과 지도를 봐가며 그녀만의 지도를 만들어온 메모지에 떡하니 적혀있었다.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되는 큰 건물이 바로 국립도서관이었던 것. 그리고 동상의 존재도 메모해 놓았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배려한 것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도서관을 쳐다보면서 그냥 지나가려는데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스토옙스끼인데 안 보고 그냥 가니?
그래? 아무리 바빠도 그건 보고 가야겠네.
난 가던 걸음을 돌린다.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 주인공 이름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있는 바로 그 <죄와벌>의 작가라니. 반색을 하며 계단을 오른다. 높새는 아마도 내가 기뻐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 알파벳을 익혀간 덕분에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듬거리며 이름 하나 읽은 것이 그렇게 기쁜 일인가? 하지만 소리까지 내어 읽어나가는 소리가 바로 그 이름으로 들리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많이 아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것이 기쁜 모양이다. 처음 한글을 깨우칠 때의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해본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는 순간 가치도, 신선함도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란 가치도 있지 않은가. 결국 익숙해진다는 것은 편안함을 얻는 대신 신선함을 잃어버리는 것인가.
스치는 생각을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온다. 씨스뜨라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높새는 지도를 보며 손가락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갈마와 하늬가 그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높새의 손가락이 향한 곳 어디쯤에 붉은광장이 있을 것이다.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입체도 아닌 종이에 적힌 지도를 보고 어떻게 건물이 가득한 입체적인 길을 찾아간다는 것인지. 참 신기한 세계의 사람들이다. 높새는 이후로도 계속 밤마다 다음 날 가야할 곳의 교통편이나 길을 찾느라 격무에 시달린다. 신기한 세계의 사람에게도 그 일이 마냥 쉽진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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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광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주변을 둘러 싼 건물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득하게 펼쳐진 돌바닥 자체도 아름답지만 광장을 둘러싼 수려한 건물들이 없었다면 아름다움은 쓸쓸함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광장을 이루는 수많은 네모난 돌. 그저 단순하고 단단한 하나의 돌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어떤 생명력을 이룩했지만 그것만으론 쓸쓸하다. 광장을 따라가던 눈길이 마지막으로 갈 곳은 어디인가. 광장의 끝에 이르면 허공을 헤맬 것이 아닌가. 허공을 헤매는 눈길을 막아주는 무엇이 있어야 광장은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리고 광장은 모름지기 사람이 모이는 곳. 사람이 모일 수 없는 광장은 더 이상 광장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그래서 광장은 들판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도시의 중심이나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곳에, 언제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그래서 광장은 비워진 채로도 아름다워야 하고 북적거릴 때는 더욱 아름다워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 곳.
붉은광장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분명히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힘을 마력으로 변화시키는 수호자가 따로 있으니 그것이 바로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들.
질리지 않는 광장의 꽃, 성 바실리 성당.
오가는 사람들에게 묘한 기대감과 활력을 주는 우아한 굼 백화점.
역사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크렘린 궁.
광장의 중앙에 서서 눈길을 돌려보면, 나를 둘러싼, 아니 광장을 둘러싼 멋진 건축물들이 시선을 받아준다. 시선이 어디를 향할지라도 결코 방치하지 않는다. 방치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쓸쓸하지 않은 아름다움에 젖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광장에 홀로 서 있더라도.
그런데 ‘붉은광장’이라니.
광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잘못 번역한 결과라 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역인 채로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되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저절로 올까. 오역의 결과가 나한테 일어난 일이었다면 얼마나 어처구나 없고 억울했을까. 한시바삐 누명을 벗고 싶어 안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광장은 인간의 판단에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다. 어차피 인간이 지은 이름. 이름이 본질을 흐리지는 못한다. 그러니 광장이 영혼을 가졌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광장의 영혼과는 상관없이 인간인 내 마음은 괜히 답답하다. 처음 광장의 이름을 짓고 불러주었던 사람들은 내 마음과 같을 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광장’. 원래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대답을 하듯 아름답게 다가오는 광장이다. 그런 광장을 두고 ‘붉은광장’이라니.
‘붉은광장’은 러시아어로 끄라스나야 쁠로쉬찌. ‘끄라스나야’ 는 현재 ‘붉은’으로 번역되지만 ‘아름다운’ 이란 뜻도 있다고. 아마도 번역자는 사회주의 하면 떠오르는 색인 ‘붉은’으로 해석하면서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냉전시대에 태어나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면 더구나. 이제 오역임을 알았으니 고쳐 불러주는 게 마땅할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