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과 옌
판위 지음, 이정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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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공부한 중국여자가 중국이 배경인 중국인의 삶을 영어로 쓴 소설.


재미있다.

맑고 잔잔하지만 진정 살아있는 아름다운 심장을 느끼게 한다.

젊은 감성의 순수함과 찬란함에 새삼 눈이 부시다.

유려한 문장. 섬세하고 솔직한 심리 묘사. 흥미진진한 구성.

그렇게 눈을 떼지 못하고 읽는 동안 알게 되는 중국사회의 신기하고 새로운 모습.

여대생인 천밍과 먀오옌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중국 사회의 신구 가치의 갈등, 지방과 도시의 문화 격차,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직업 선택의 문제, 마음대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정부의 통제, 90년대의 대학생들의 사고방식, 동성애 등의 문제를 재미있게 알게 되는데 그 재미 또한 대단하다.

앞에 나열한 문제를 신문이나 잡지에서 대한다면 얼마나 딱딱하고 따분할까. 아니,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작가 덕분에 거대한 중국 사회의 문제와 세태를 재미있게 공부한 듯한 느낌이다.

 

영어번역 소설을 읽을 때마다 겪게 되는 번역의 문제도 없었다.

번역자의 능력덕분인지, 아님 작가의 능력 덕분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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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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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병자호란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남한산성

 삼전도의 치욕.

 그리고 인조.

 그것도 아득한 옛날 일이니 그저 역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일 뿐이다.

 그 일을 겪은 이의 말을 직접 들은 적도 없고, 겪은 이의 말을 들었다는 사람의 말을 전해 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나의 치욕인 것처럼 불편하고 자세히 알고 싶지 않고 떠올리는 것도 힘들다.

  나, 우리, 민족, 이란 것이 본래 그런 것인지, 아님, 강점이입이 잘 되는 나의 특수한 성격 탓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역사드라마도 잘 보지 않는다. 흐뭇하지 않은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감정을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화도 나고 분하고 급기야 우울해진다.

 

  제일 먼저 솟구치는 감정은 분노였다.

  어떻게 적군이 몰려오는데 지도부가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가?

  삼천리강산에 울도 담도 없이 사는 백성들을 적의 총칼 앞에 그대로 두고?

  도대체 포위된 작은 성안에 숨어 무얼 하려고 했는가?

  성안으로 들어가면 포위될 줄 몰랐는가?

  그리고 자신들은 적어도 튼튼한 성벽 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침범에 전혀 방패막이가 되지 않는 싸리 울타리 초가에 들어앉은 백성은?

  적이 내려오는데 적을 막아서는 군사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라 방비의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고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적이 내려오자 속수무책 궁을 버리고 파천부터 결정했다.

  이런 정부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왕은 도대체 무얼 했는가?

  바보 같은 왕, 이라고 분개하며 다시는 그 왕을 떠올리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무관심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비난이었으니까.

 

  그런데.

  김훈의 <남한산성>에는 왕이 있었다.

  고뇌하는 인간, 책임감으로 어깨가 짓눌린 인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는 인간.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몸을 일으켜 적장 앞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감수한 인간.

  소설 속에서 조선의 왕, 인조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적어도 무관심을 걷어내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남자.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인조의 힘은 사실 그를 추대한 신하들의 힘 위에 있었지만, 막상 전쟁이 나자 신하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힘은 나라의 안위가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만 발휘되었고 전쟁은 본래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물론 충신의 씨가 말라버리진 않았을 테지만, 이미 왕을 바꿔버린 그들의 세력이 조정의 거대한 흐름이니 그 흐름을 막을 힘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말로만 하는 정치.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정치가 아닌 명분만 내세우는 정치.

  청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는데도 명의 눈치만 보는 정치. 아니 알아서 복종을 하는 정치.

  세상의 판도를 읽지 않는 정치도 정치일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남한산성에 갇혀 세월만 죽이는 정부.

  항복 외엔 방법이 없고 조정도 아무런 방법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성 밖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여자들은 적군의 밥을 하고 술시중 몸시중을 들고 남자들은 적군을 위해 길을 닦는 부역에 시달린다. 그리고 수십만이나 되는 적군이 먹고 입고 하는 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나왔을까.

 

  항복은 임금이 해야 되고,

  폐허에서 일어서는 일은 백성이 해야 되는데,

  신하들이 할 일은 말 뿐이라....

 

  임금의 심정이 매우 섬세하게 그려진 소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고충이 실감나게 그려진 소설.

  외적의 침입에 속수무책 당하는 백성의 고충이 아프게 그려진 소설.

  그리고 한 낱말, 한 구절, 너무도 애쓰고 힘들게 나왔다고 느껴지는 작가 특유의 문장이 여전하다고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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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1 - 영원한 '지금'의 메시지 불멸 1
이각 지음 / 지혜의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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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중생들의 질문과 이각의 답변만으로 채워진 책이다. 물론 이각은 스님이니 질문은 불교와 삶에 대한 고민과 의문이며 그 답은 순전히 불교가 주는 해답이다. 불교 경전과 깨달음에 대한 책을 제법 읽었고, 더 이상 특별할 게 없을 줄 알았다. 다만 점수하는 자세로 수행하는 차원의 경전읽기라고 생각하며 책을 들었다. 그런데 그 답이 놀랍다.

 한 곳을 가리키는 법문은 흔들림이 없고, 답변은 명쾌하며, 지금까지 읽었던 법문과 다른 새로운 해설에 그대로 정신이 꽂힌다. 어쩌면 전혀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 2권에 걸쳐 끝없이 이어지는 데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이제야 정말 참스승을 만난 것인가?

  정말 부처님의 말씀(불경)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보시라고 권한다. ‘불립문자라 설명할 수 없고, 이심전심이라 말로 다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법이 없다. 불경의 어떤 구절, 어떤 낱말에 대한 질문에도 자세하고 명쾌한 설명이 있고 그 설명들이 서로 얽혀 넘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경구에 대한 의문도 서로서로 풀어주며 이어져 있다.

 

 이각 스님 답변의 명쾌한 맛을 기억하기 위해 질문과 답변 하나를 그대로 인용해둔다.

 

2393.

<학교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입니다....(중략)불교에서는 불도수행이 곧 공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부의 목적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긴 많은 잡념(번뇌)들을 없애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과학, 외국어 등입니다 저는 가끔 생각해봅니다. ‘과연 이것들을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저 수학문제나 국어문제를 풀고 틀린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이 막연함 속에서 결국 얻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저의 목적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어보려는 욕망일지도 모르고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그저 그런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어떤 목적으로 학교 공부를 해야 가장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스님의 의견을 여쭙니다.

 

<보편타당한 지식>

세상에서 몰라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는 독이 무엇인지까지 알아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학문이 진리를 아는 것과 상통하지 않는 것은 없다. 지금 이 글을 읽은 것은 국어를 배웠기 때문이고 여기서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소를 이야기할 때는 과학을 배웠을 것이라는 전제를 두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모두가 아는 보편타당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설명하는 자의 입장이 된다면 만나는 사람이 천차만별이다. 이들 모두의 지식을 알아야 그들을 읽고 그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저 먹고살기 위하여 세상을 산다고 하여도 남들을 알아야 하고, 남을 안다는 것은 그들의 지식을 아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다. 단지 그 세상을 이해하는 차이가 곧 각각의 생활모습이고 인격이며 행과 불행의 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하나라면 그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도 단 하나일 뿐이다. 진리든 생활 교육이든 모두가 다가가야 할 곳은 단 하나의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현대교육은 그 하나의 이치를 쫓아가며 서술해놓은 데이터라고 할 수 있고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료다. 즉 현대교육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하여, 단 하나의 이치에 근접하기 위하여 노력한 중생들의 마지막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알아야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가 용이하다. 이를테면 보편타당하게 알려진 진리를 알아야 최상의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수월하다는 것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알아야 그들에게 최상의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보편타당한 진리가 곧 현대학문이다.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수학이 삶이라는 것의 순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11=2. 둘을 이루고 싶다면 하나와 다른 하나를 합해야 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다. 이런 문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미 배워서 익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런 학습이 없었다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진리를 공부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역시 이 현대교육도 그와 같다. 산수를 모른다면 물건을 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만큼은 알아야 한다. 만약 대학을 꼭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본인의 의사에 맡기겠다. 그러나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이 사회의 지식에 능통할수록 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학과는 상관없이 수업능력은 우수해야 한다. 그럴수록 스스로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사회에서 편하게 살려면 이 사회의 법을 따라야 한다. 필요는 없지만 면허증을 원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아무리 스스로의 능력이 우수하다고 해도 대학 졸업장이 없다면 아무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 사회는 진리를 모르는 자들의 집합소이다. 만약 진리를 아는 자가 있어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인데, 대학도 나오지 않은 자가 진리를 말한다면 과연 누가 그 사실을 믿으려 하겠는가.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잣대가 없기에 오직 학벌이나 재력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편하려면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인격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진리도 얻을 수 없다. 세상공부도 하지 못하는 그런 나태한 마음으로 어찌 온 우주를 손에 넣고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겠는가. 스스로가 처하는 때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다. 젖먹이 때에는 젖을 먹어야 하고 밥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한다. 세상을 배울 때는 세상을 배우고 인생을 배울 때는 적극적으로 인생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진리를 얻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자질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석가세존도 일체의 세속학문에 능통하고 나서 진리를 얻으러 나서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계단을 오름에 있어 낮은 곳의 계단은 무시하고 중간부터 오르겠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는 없다. 일단은 처음부터 중간까지 가야만 무시를 하든지 다음으로 나아가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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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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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세상에서 순수의 영역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세상에서 천부라고 말하는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은 자기 재능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이 남과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름을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 말도 잘못되었다. ‘가치라든가, ‘이용이라는 말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가치는 세상의 잣대와 상관이 없고, 따라서 이용이 아니라 그저 사용만 있을 뿐이다.

  아무런 분별없이, 욕심도 없이, 세상의 이목과 상관없이 발현되는 재능, 그저 표현의 욕구와 그 욕구의 발현이 걸작이 되는 영역, 그게 바로 순수의 영역이 아닌가.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주제가 이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의 세계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 신의 영역을 맛보게 하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우린 그런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라 부르며 그 창조의 재능을 천부의 재능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 말에 들어있는 의미는 그 재능이 귀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재능이란 의미도 사실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 재능이 더욱 부럽고 가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천재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즐기는 차원을 떠나 창조의 열망을 가진 자들이 세상엔 많은가 보다. 문제는 재능이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된 열망.

<순수의 영역>은 그런 사람들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그려놓았다. 오직, 창조적 예술가가 되겠다는 열망만으로 사는 사람. 그 열망은 사실 순수한 예술적 창조가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공모전에서 대상을 타고 주목을 받음으로써 그는 드디어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천재인가? 작가는 진짜 천재 소녀인 준꼬를 등장시킴으로써 열망만으로는 결코 진짜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준꼬는 서예의 천재다. 남의 글씨를 완벽하게 모방할 수도 있고, 완벽한 균형을 갖춘 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녀의 글씨는 진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서체와 비교할 필요도 없고 비교하지도 않는다. 물론 평가를 받기 위한 공모전엔 관심도 없고 자신의 재주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바보라 부른다.

  세상의 이목에 전전긍긍하고,

  세상의 평가에 목매달고,

  끝없이 이해관계를 따지고,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사랑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고,

  아무런 분별없이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사랑을 내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준꼬를,

  바보라 불렀다.

 

  그런데도 예의바르고 웃는 얼굴인 그들 속에서 무표정하며 먼 곳을 쳐다보는 준꼬만이 순수한 밝음으로 빛나는 듯하다. 마치 흑백의 영화 속에서 어떤 한 사물만 밝은 색깔로 처리해 놓은 것처럼. 그만큼 세상엔 순수의 영역이 적은 것인가. 그래서 더 빛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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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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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지적인 남자의 평생을 기록한 일기.

  정확히 말하면 1936928일 월요일(1211개월 18)부터 20101029일 금요일(8719)까지다. 어렴풋하게 자아인식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기인 셈인데 하루도 빠짐없이는 아니고 인생의 큰 고비를 넘을 때는 몇 년씩 혹은 몇 달을 건너뛰기도 한다.

 

  사춘기 무렵부터 죽기 전까지 한 사람의 평생이 일기 형식으로 이어져있는 소설.

  형식도 특이하지만 내용은 더욱 독특하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소설은 몸의 기록이다. 일기가 보통은 내면 기록이 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저자의 지성이나 성찰, 혹은 생각을 볼 수 있는 기록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내면기록이 주인공이 아니다. 평생에 걸친 몸의 변화, 질병, 욕구가 주인공이다.

  그런데도,

  몸을 들여다보며 몸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그저 몸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데도,

  질병을 표현하고 늙어가는 세포의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도,

읽는 동안 의식이 고양되고 감정이 요동친다.

 

  시간 속을 흘러가는 몸의 변화 속에

  사회의 변화가 보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집단의식이 보이고, 개인의 사랑과 의식이 보이며, 한 남자의 인생을 둘러싼 부모, 친지, 가족, 친구의 영향력이 그 남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훤히 보인다. 그러면서 그들의 인생과 사상까지.

 

 특히 맘대로 말을 듣지 않는 노년의 몸의 일기를 읽고 있을 땐, 삶의 비애가 통째로 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공감으로 떨렸다. 물론 노년에 접어든 내 몸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늙음이 마냥 비애로 가득한 느낌이었단 뜻은 아니다. 늙어가는 데는 육체적 고통이 따르고 그래서 힘들고 다소 슬프지만 인생이 스산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이 소설의 힘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와 의도하는 대로 소설을 구성하는 능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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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매 2015-12-0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들여다 보는 방법이 정말 다양하다고 이 책을 보며 느꼈습니다. 좋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