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답답해서 퍼왔다.  

 

"상하이 치정 스캔들이 아니라 명백한 간첩 사건" 

  

중국 상하이 주재 총영사관 외교관들의 스캔들 및 기밀 유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총영사와 부총영사 간의 감정 싸움, 현지인 유부녀를 두고 벌인 영사들의 불륜과 암투, 정부·여당 핵심 인사들의 전화번호와 기밀 정보의 유출 등 수많은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거 중국 지역에서 4년간 영사 생활을 했던 한 인사는 <프레시안>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을 불륜이나 치정 사건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며 "명백한 간첩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유출된 김정기 전 총영사의 자료가 있던 곳이 청사가 아니라 개인 사저이며, 중국 당국은 외교관 사저를 철저한 관리한다는 점에서 한국 정보기관 배후설을 제기하는 김 전 총영사의 말을 반박했다. 중국 정보기관이 아니면 누구도 총영사의 사저에 침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번 일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은 고위 외교관의 자질이 없는 인물을 중요한 총영사로 보낸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인사에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연합뉴스
-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나?

"상하이 총영사관 주재 외교관들에게 접근하는 중국 사람들은 거의가 국무원 산하 국가안전부(MSS) 사람들이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정보기관인데 직원들이 엄청나게 많다. 김정기 전 총영사 등은 상하이 총영사관에는 국가 기밀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없고, 등 씨가 비자 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에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사실이 아니다.

상하이는 중국의 실질적인 수도다. 경제, 금융, 무역, 정보 전쟁의 총본산이다. 중국공산당 상하이 당서기는 총서기로 가는 통로다. 상하이시장은 서울시장 격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직보되는 정보를 모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외국에서 온 외교관들을 철저히 감시한다. 총영사한테는 기본으로 4명이 붙고, 일반 영사는 2명씩 붙어서 뒤를 밟는다. 그 외교관이 친중인지 반중인지 경향을 파악하고 장점과 약점, 가족관계를 계속 보고한다. 청소부까지 다 간첩이라는 소리도 있다. 중국은 도청의 왕국이고 스파이의 천국이다. 영사 생활을 오래 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하게 된 현지인들이 '다 도청된다'고 귀띔해 줬다.

따라서 비자 이권을 챙기기 위해 벌어진 치정·불륜 사건 정도로 축소할 수 없는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치정 사건이 아니라 국가 기밀을 유출시킨 간첩 사건이다. 비자 장사여행사를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물론 등 씨가 비자 관련 이권을 챙기려는 행태도 보였지만 그건 작은 부분일 뿐이다."

- 중국의 정보 수집 활동에 관해 겪은 일이 있다면?

"비일비재했는데 일화 하나만 얘기해 보겠다. 영사를 하던 시절 어느 날 차를 몰고 가다가 타이어가 터졌다. 차량 통행도 거의 없는 길이었고 밤 11시 30분이었다. 그런데 3분도 안 돼서 경찰차 2대가 나타나더니 타이어를 바꿔줬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우리를 목격하고 도와줬다고 했는데, 누군가가 내 뒤를 밟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나가다가 발견했다'던 사람들이 내 타이어를 교체해주더니 지나가지 않고 돌아갔다. 당시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베이징에 와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국가 통치의 효율성 면에서 중국은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도 철저히 잘 돼있고, 집행도 엄격하고, 정보 수집도 아주 세련되어 있다. 중국하면 엉성할 것 같지만 무시무시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 상하이 홍차오공항에 가면 수색대도 별스럽지 않고 검사도 제대로 안 하는데 마약밀수범이 딱딱 잡힌다. 그게 중국이다."

- 김정기 전 총영사는 한국 정보기관 배후설을 말한다.

"언론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총영사관 청사가 아니라 총영사의 관저에서 정보가 유출됐다는 점이다. 김정기 전 총영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비상연락망(정부·여당 인사 200여 명의 연락처)은 나를 음해하려는 누군가가 상하이 관저에 침입해서 촬영해 유출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보기관 인사가 배후일 것으로 본다고도 말했다. 국정원 출신의 부총영사를 지목한 것이라고 언론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관저는 총영사 개인의 집이다. 청사에 있는 총영사 사무실에 있는 자료가 유출됐다면 부총영사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개인의 집에 몰래 들어갈 수는 없다. 서울 주재 외교관들의 집도 경찰이 지키고 헌병대가 지킨다. 중국은 외교관들의 집에 관한 보안을 더 강하게 한다. 관저에 괴한이 침입하면 총 맞아 죽을 수도 있다."

-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보나?


▲ 김정기 전 상하이 총영사 이임식 장면. ⓒ연합뉴스
"김정기 같이 자질 없는 사람에게 총영사 자리를 준 게 문제의 뿌리다. 한나라당 총선 공천에서 떨어졌으면 청와대 비서관이나 시킬 일이지 왜 상하이 총영사에 보내나. 상하이 총영사는 이미 대사를 지낸 고위급을 보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이고 전문적인 외교 역량이 필요하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외무부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자리 중 하나다.

그런데 '엠비맨'이라고 해서 낙하산으로 보냈다는 게 문제다. 총영사를 했다는 사람이 그 여자의 신분도 확실히 모르면서 '믿을 만했고 네 번이나 도와줬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얼마나 고급 정보들이 흘러 나갔겠나. 외교관이 왜 특정 정당 정치인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나. 중국 같으면 총살감이다. 국가 기밀 누설죄를 저지른 것이다. 스파이한테 놀아 난 것이다. 중국 탓도 아니고 대한민국 탓이다.

그 여자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몇몇 영사들의 아랫도리 문제로 덮어버려도 안 된다. 최소한 김정기 전 총영사 이상의 문제다. 왜 그런 사람을 거기에 보냈으며, 문제가 있으면 냉큼 소환해야하는데 '엠비맨'이라고 백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또, 김정기 전 총영사는 4월 분당(을) 재보선에 생각이 있다고 한다. 총영사를 하고 있으면 거기에 전념해야지 국내 정치에나 기웃거리다니 한심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총체적으로 망조가 들었다. 이런 막장이 없다.

상하이에는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 윤봉길 의사가 일제에 저항해 폭탄을 던진 곳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조상탓을 못하게 하는 곳이다. 조상들은 그곳에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국가의 녹을 먹는 외교관들이 방탕 무도한 생활을 하고 은폐하려고 했다는 게 개탄스럽다. 국격이 땅에 떨어졌다. 우리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되어 있다. 임정이 있던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니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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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특징 보여주는 복지담론

프레시안 : 내년 우리 정치에 대한 전망도 여쭙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내년부터 2012년까지는 정치의 영역에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복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2012년 두 번의 선거에 모두 복지가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지만, 정교한 한국적 복지의 프로세스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최장집 : 최근 여러 곳에서 복지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진보파는 진보파대로, 박근혜 씨는 박근혜 씨대로 복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논의들을 접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복지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현실로부터 괴리된 담론의 정치랄까, 반대로 엘리트 담론으로부터 소외된 현실이랄까 하는 담론의 정치를 느끼게 됩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복지정책, 사회정책을 통해 복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담론으로서 복지의 문제를 중심에 놓으면 복지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상당히 강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데, 담론의 성찬이랄까,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복지를 복지정책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정치학적으로 보면 정책의 아웃풋 사이드(output side), 즉 정책의 산출 측면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어떤 담론을 만들고, 어떤 모델이 더 좋은 것이고, 우리가 취할 모델은 무엇이고, 이러저러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시각,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보고서 정치'의 유산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앞선 민주정부 시기동안 위원회 정부라는 말도 있었지만, 보고서 많이 내고, 정책 아이디어도 많이 냈지요. 그러다보니 행정중심적 접근이랄까, 형식적으로는 위로부터 하향적으로 복지가 배분되는 것, 그 내용은 온정주의적이고 마치 자선 행위나, 봉사활동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중심은 산출보다는 정책의 인풋사이드(input side), 즉 투입측면이 중심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특정한 정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사회로부터 투입할 것인지가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반대로 권위주의 하에서의 정책 산출은 최고통치자와 그를 둘러싼 권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모여 디자인을 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는 힘으로 억압해서 만들고 추진하면 끝입니다. 민주주의는 그게 아닙니다.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정책으로 정치인과 정당을 통해 대표되고 그것이 정책결정과정에 투입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의 복지담론은 인풋 사이드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정책적 내용이 무엇인가, 여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논의는 모든 정당이 다 할 수 있는 것이죠. 진보파인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도 얼마든지 복지정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특정의 복지정책내용을 요구하는 사회집단과 교섭하지 않고도 정치인들과 전문가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좋은 복지모델들을 취사선택해서 좋은 복지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칸디나비 모델이 어떻고, 독일식이 어떻고, 네덜란드식이 어떻고 하는 식이지요. 이러한 모델이 가능하기까지의 정치과정과 정치적 요건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되는 것을 접하지 못했어요. 오늘의 한국의 정당과 정치적 조건들은 그러한 것을 가능케 했던 서구의 조건들로부터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가장 간단한 지표로 노조 조직율이 10%대로 떨어져있는 오늘의 한국정치현실에서 복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의 복지논의는, 한국 민주정치의 특징적인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중요한 이해당사자들이 정치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정치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당정치의 약화와 집행부의 권력 집중으로 나타납니다. 특정한 정책을 놓고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들이 이익집단이든 노동조합이든 정당이든 조직을 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요구를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조직해서 선거에서 표로서 집단화하고, 그들 스스로가 크든 적든 정치적 행위자가 돼서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있을 때, 복지 문제는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전부 억압되고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얼마 전 재벌기업 대형슈퍼마켓들이 동네에 진출해서 기존의 영세 마켓들이 존립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이들이 길거리에서 데모하고 하는 모습이 뉴스로 나오고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됐지요. 이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은 길거리에서 데모밖에 없었어요. 이건 민주주의방식이 아니지요. 8,90년대에 일본의 사례는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 영세자영업자들이 조직해서 자민당의 한 영향력 있는 표의 블럭을 형성해서 자민당의 지원을 받고 통산성의 정책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해서 법을 만들어 내 기업 수퍼마켓의 진출을 제한했던 사례이지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식으로 이해당사자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 것부터 먼저 논의돼야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에 기반을 갖는 복지정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민주정부 하에서 정책결정들, 즉 산업정책, 중소영세상인 보호정책, 노동정책, 통상정책 같은 것들은 그렇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민주 대 반민주' 담론이 갖는 한계도 이러한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작동이 어려울 뿐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틀 속에서 권위주의 정치가 반복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일하는 사람, 노동하는 생산자 집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정치권이 제기하고 있는 복지는, 특정의 정당, 특정의 정치세력이 집권하기 위한, 그리고 집권했을 때 그것을 시행하는 방법이 행정기구를 통한 사실상 온정주의적인 복지를 의미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90년대 이야기인데 IMF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 '민주적 시장경제'를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신선충격을 줬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한다는 측면에서 기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내용은 그만두고라도 그러한 말조차 이내 사라져 버렸어요.


ⓒ프레시안(최형락)
복지국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럽만 봐도 상당히 좋은 사회경제적 체제이고, 우리나라도 이 정도의 경제성장 수준에 도달하면 당연히 복지국가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문제는 복지국가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현재 담론이 제기되는 방식으로는 그 결과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습니다. 복지는 어려운 것입니다.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경제적 생산과 분배구조, 조세정책 등 여러 변화를 수반해요. 그런데 노동조합의 대표성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건너뛰어서 갑자기 유럽과 같은 복지국가가 나타날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프레시안 : 복지의제와 관련해 당면한 현안이이라면 우선 무상급식 논란이 떠오릅니다. 이 역시 정책의 산출에만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타협이 불가능한 논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장집 : 무상급식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선거이슈가 됐지요. 복지랄까, 사회경제적 문제가 쟁점화 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현실화 가능한 이슈들을 하나하나 접근하고 풀어나가는 것은 좋은데, 무상급식 문제는 여러 복지 중에서도 작은 이슈입니다. 그런 작은 이슈만이 쟁점이 되면 찬반론이 부각되면서 세밀하고 섬세한 논의는 실종됩니다. 보다 테크니컬하게, 좋은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상급식이 강한 이슈가 된다는 것은 좋은 측면도 있지만, 다른 이슈를 억압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사회복지는 여러 정책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사회서비스랄지, 사회보장, 교육 등 여러 측면이 함께 존재합니다. 무상급식은 큰 복지의 작은 이슈입니다. 물론 논의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는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복지 논의에는 무상급식 자체보다 더 큰 문제가 그 배면에 존재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프레시안 :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한국형 복지국가'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최장집 : 복지는 한나라당이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앞에서 제기한 이러한 문제는 한나라당 마음대로 거론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현재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복지라는 말은 훨씬 더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보겠습니다. 좋은 이야기들, 좋은 사례들을 이것 저젓 집어넣어서 상상하는 정도로 복지국가가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유럽의 복지국가라고 하는 것은 소득과 분배구조, 실업보장, 교육 등을 모두 커버하는 경제적 생산과 운영체제입니다. 복지가 바로 그것이라는 인식은 없는 것 같아요.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확대, 비정규직, 청년실업, 중년실업을 포괄하는 고용문제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그것이 한국 사회에 가져온 충격 효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요. 이러한 문제들이 복지보다 먼저 논의되거나, 복지정책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같이 제기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러한 점들은 우리 정치가 다루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담론 중심, 이념 중심으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경제 관료들의 독점적 영역이었습니다. 여당이 집권하든, 야당이 집권하든 큰 차이가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의 계층 구조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중산층의 양극분화가 문제의 중심에 있나? 추정으로는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에서 중산층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중산층의 아래 부분, 하층 영역이 훨씬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연구검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하층계급이 팽창했다는 징조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 규모가 얼마나 되고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에 연구가 요구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문제, 20대 청년실업, 그보다 더 심각한 4,50대 중년실업 문제, 고용불안과 서민대중 경제생활의 피폐화, 이런 것들이 당장 풀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회의 중하층 혹은 하층의 빈곤화 문제가 정치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정치 최대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것은 정당들, 특히 진보적인 야당이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정치적 표출이 안 된다는 것은 투표율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투표율은 통상 50%정도인데,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떨어져 왔고, 신자유주의 이후 더 떨어졌습니다. 체계적인 데이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데이터들을 종합해 보면 그 중에서도 하층민에서 투표를 안 하는 경향이 더 두드러집니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느 정당이든 그들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정치집단에 들러리서지 않겠다는 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투표를 통해 뭔가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 낮은 투표율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이 집단이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 동안 자살률에서부터 강력범죄, 가정파괴, 출산률 저하 등 사회적인 문제들은 스스로 그 모양을 드러냈어요. 정치의 중심적인 담론이 지역대결과 지역감정이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의 축을 통해서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과연 민주 대 반민주 구도, 지역구도와 같은 한국정치의 대표적이고, 지배적인 갈등구조의 창을 통해볼 때 이 문제들은 어디에 위치할까요? 불행하게도 나는 이 담론의 구조에서 이 같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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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쇠락-중국의 부상, 변화하는 주변정세

프레시안 : 올해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아무래도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가 아닐까요. 이 과정에서 남북 간의 이념적 대결과 감성적 분노도 확대된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는 남북관계와 그 해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환기된 측면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외부적 조건의 변화에 우선 천착하는 접근법을 제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최장집 : 민주화이후 탈냉전 시대, 그러니까 동구 사회주의 붕괴 이후 나름대로 개념적 틀을 통해 접근된 한국의 대북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탈냉전 또는 데탕트(détente) 시기는 소련 붕괴와 함께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시기입니다. 동북아에서의 데탕트는 미국의 정책이기도 하구요. 미국이 이를 위한 기본적인 노선과 정책방향을 천명한 것이 페리보고서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러한 데탕트의 맥락에서 한국 정부 나름의 대북정책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햇볕정책 이후 부시 정부가 들어섰고, 부시는 대북 강경정책을 폈어요. 하지만 길게 보면 부시 정부가 아무리 강경한 대북 정책을 폈다고 해도 데탕트의 전체적 흐름이 반전, 역전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남북한 사이의 충돌도 많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냉전해체 이후입니다. 그 제2단계랄까, 이런 과정에서 한국에선 이명박 정부라고 하는, 보수적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 시기는 동서냉전이 해체되면서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됐고, 이와 함께 나타난 화해무드와는 다른 시기라는 것입니다. 또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을 했어요.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이 여전히 가장 강한 초강대국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쇠락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는 점입니다. 동북아시아만 놓고 보더라도, 이 지역의 힘의 구조가 미국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최근에 이르러 미국 사람들은 중국을 코-파트너(co-partner)가 아니라 코-매니저(co-manager)라고 표현합니다. 미국이 세계를 운영해 가는 데 있어 중국은 협력자의 지위가 아니라 공동경영자 내지는 공동운영자라는 뜻이지요. 중국의 위상과 영향이 얼마나 커졌나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의 변화라고 봅니다.

탈냉전 시대의 정책적 화두는 햇볕정책이나 화해협력, 평화공존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데 그 맥락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판이 변했기 때문에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동북아의 다원화된 힘의 구조. 즉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일본을 포함하는 주변국들의 다원화된 힘의 구조에 대응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것이 전반적인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안함부터 시작해서 연평도에 이른 일련의 사태는 충격적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60년 이후 처음으로 전쟁의 가능성이 실제 위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평화무드에 젖어 있다가 갑자기 전쟁의 가능성이 코앞에 닥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이 같은 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과거의 냉전적 틀을 갖고 문제를 접근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남북문제는 레알폴리틱의 문제, 이성적 컨센서스가 필요

프레시안 : 기존의 햇볕정책으로는 지금의 위기에 대응하기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그 출구 모색의 단초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최장집 :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대립의 원천이 바로 분단문제, 민족문제를 중심으로한 남북한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한국사회 이념 갈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고, 민주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면서 진보와 보수의 중요한 요소구성하고 있습니다. 결국 남북한 사이의 민족문제, 평화의 문제, 안보문제를 바라보는 양극화된 분화, 분열이 만들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보수는 안보를 대표하고 진보는 평화를 대표하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어요. 이념적 차이가 민족과 남북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여과 없이, 무매개적으로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위험하며, 피해야 할 갈등입니다.

남북문제는 레알폴리틱(Realpolitik), 즉 현실 권력정치의 문제입니다. 민족정서나 민족감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남북한의 힘을 냉철하게 다루는 접근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또한 현실권력정치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 간의 힘의 균형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은 동북아국제질서와 남북한 관계, 두 수준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겠습니다.

또 이것이 이념적 구분을 아우르는 컨센서스를 만드는 기초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프랑스말로 레종 데따(Raison d'État), 독일말로 슈타트레종(Staatsräson)이라고 부르는 국가이성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이를 둘러싼 갈등을 초월해서 국가가 이성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정책의 목표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못할 때, 현재의 위기상황을 다룰 수 없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햇볕정책은 평화와 공존, 선의와 민족적 우애를 바탕으로 남북한관계를 접근하는 것까지는 바람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실권력정치 문제를 다루는 데는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진보파들은 안보의 문제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고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갖게됐습니다. 반면 보수파는 국방과 안보가 마치 자신들의 영역인 것처럼 과도한 사명감을 보이면서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여왔어요. 평화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명제인데,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거지요. 현재 남북한관계가 악화돼 전쟁위기로까지 치닫게 된 데는 보수정부가 북한정권과 감정싸움이랄까 기세싸움을 벌이는, 게임이론에서 이런 종류의 대립을 "치킨게임"이라고 하지만, 이런 형태의 대립으로부터 연유하는바 큽니다. 이런 대결방식은, 작은 무력분쟁으로부터 시작해서 국지전이나 다른 형태의 대규모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수파, 진보파, 두 가지 접근 모두가 결함과 한계를 갖고 있어요. 햇볕정책은 데탕트 시기에서는 좋은 출발점이었지만 지금은 국제환경, 국내정치상황, 이슈가 모두 변했습니다. 이미 햇볕정책이 시행되고 있었고, 정상회담을 포함해서 남북한관계가 아주 좋았던 시기에서도 연평도해상에서 남북한 해군이 접전도 했고, 북한은 핵을 지속적으로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연평도에 무력도발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햇볕정책 시절이나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대북강경정책을 펴는 현 보수정부에서나 일관된 북한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공격적, 불가예측적 태도의 배면에는 한 가지 해독가능한 핵심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북한체제의 궁극적 가치이자 목표인 체제존립과 체제안정이라고 할 핵심요소예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이러한 문제는 항시적으로 되풀이될것처럼 보입니다. 항시적으로 위기를 안는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평화의 지속이라고 하겠지요. 이명박 정부처럼 노골적으로 북한 고립화, 봉쇄정책을 취할 때 이번 연평도사건과 같은 잠재적 위기가 실제의 전쟁위험으로 표면으로 부상하고는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보수나 진보가 어떻게 하든지 컨센서스를 만들어서 변화하는 동북아 시대의 대외정책을 구성하고, 국내의 이념적 갈등을 이성적으로 풀어가는 노력을 기울이고, 이걸 통해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줄이고 평화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문제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됐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항구적 전쟁위험 앞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시절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은 단순한 민족애, 동포애의 발로라기보다는 서해 평화협력지대 구축을 제시하는 등 상당한 전략적 접근도 시도해 왔습니다. 햇볕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해 왔던 분들이 듣는다면 서운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최장집 : 나는 남북 대결구조에서 데탕트, 평화공존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평화지향적 햇볕정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진행 과정에서 여러 상황의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시 정부 들어 와서 대북 강경정책을 폈고, 오바마 정부 들어와서는 미국의 힘이 급속하게 쇠락하게 됐고, 한국에선 보수 정부가 집권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적 상황 변화 속에서 햇볕정책이 지속적인 효과를 가질 수 없었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햇볕정책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민족정서나 동포애가 남북관계나 대북정책의 동력이 되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강조되는 동안 이야기되지 않았던 측면을 제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됐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체제가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햇볕정책이든 뭐든 그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체제안정을 위해 투쟁해 온 겁니다. 결국 햇볕정책도 이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로 전환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김대중정부 동안에도 해상 충돌도 벌어졌고,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북방한계선 (NLL--the Northern Limit Line)문제는 협상대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진보정부시기 동안, 남북한관계에는 좋은 무드가 형성될 수는 있어도 평화의 안정적 정착을 제도화하는 것을 통해 남북한관계를 안정화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정책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딜레마는 두 가지인데, 선의(善意)와 민족정서를 이야기하는 동안 북한의 체제를 감싸는 듯한 인상이 커지게 됐다는 점입니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핵무기를 준비하는 것까지도 대놓고 다룰 수 없는 한계를 노정했습니다. 햇볕정책의 한계는 반대로 이명박 보수 정부의 한계와도 연관된 문제입니다. 국내정치세력의 반대파로부터 지지를 얻어 컨센서스를 형성하지 못하면, 어떤 정책이든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화해협력정책을 보수세력이 비토할 때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반대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보수와 진보 사이에 컨센서스가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없을 때는 굉장한 역공을 받는 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사태를 두고 보수가 나쁘다고 성토한다고만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전쟁도 불사할 듯한 태도로 사태를 이렇게 몰아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한반도의 위기는 실제로 눈앞의 문제가 됐습니다. 보다 안정적인 평화와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한 쪽은 안보, 다른 한 쪽은 평화라는 식으로 나뉘어선 안 됩니다. 나도 햇볕정책의 지지자이고, 평화란 절대적인 명제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인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을 더 채워야 하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햇볕정책의 언어도 바뀌어야 합니다.

북한 체제 인정, 호불호의 문제 아냐

프레시안 : 말씀하신 대로 남북관계에 있어 중요한 이슈는 북한의 체제를 인정할 것인지 여부인데, 특히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남북관계를 현실적으로 컨트롤해야 하는 이명박 정부의 입장은 북한의 체제에 대한 불인정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바람직한 인식의 전환은 어렵지 않을까요?


ⓒ프레시안(최형락)

최장집 : 좋은 지적입니다.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굉장히 힘든 문제입니다. 바로 그 앞에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보수 세력의 대북관이라는 것은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북한을 굴복시켜 흡수통일하면 된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보수세력 사이에서 또는 그보다 넓게 퍼져있어요. 이러한 대북불인정 노선을 유지하면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절대적 가치로 본다면, 뭐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한 체제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명실공히 남북 공존단계를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정착도 어렵습니다.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는 데에는 굉장한 현실권력 정치적 문제의식이 필요합니다. 북한의 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념적으로 북한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의 가치판단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예요. 김정은 체제든, 그 아들의 체제든, 3대든, 4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만 권력의 실체로 인정하자는 것이지, 호불호(好不好)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이예요. 북한의 권력을 실체로서 다뤄야 합니다. 보수파들의 인식 전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연평도 피격에 대응하여 전쟁도 불사할 듯한 강경한 언사를 사용하고, 세계주목하는 가운데서 연평도지역에서 포격훈련을 예정대로 감행했지만, 실제로 이명박 정부가 전쟁도 배제하지 않는 반평화적 정책을 취하고 있고, 취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한 전쟁분위기를 조성하고 무력안보를 과시한다고 해서 호전적이고 전쟁추구적 정책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북한에 대한, 그리고 국내에서 자신의 지지세력과 전국민에 대한 제스처라고 봅니다. 한국의 보수적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의 범위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일-러의 한반도평화에 대한 이해관계와 힘의 균형이 그려놓은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봅니다. 나는 이명박 정부든, 한국의 과거, 미래의 어떤 보수정부이든, 그러한 범위를 무시하고,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깨트리고, 북한과 어떤 형태의 무력충돌이나 크든 적든 전쟁을 일으킬 만큼 무모하고 바보 같은 정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평화 대 전쟁이라는 보수정부의 비판자들이 강조하기를 좋아하는 대립축은 사실을 정확히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민주 대 반민주라는 말만큼 현실에 정확히 기초해 있지 않습니다. 정말 보수정부가 실제로 그런 대북정책을 취한다면, 모든 선거에서 보수세력은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고, 또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을 유발한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누가 그런 자해적인 정책을 취할까요? 실제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차이가 있다면, 보다 강경한 수단을 동원한, 그러나 남북간의 무력충동이나 전쟁위험을 크게 안는 평화정책 대 보다 온건한 수단을 동원한 평화정책이라는 갈등 내지 차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떻게 전쟁위험을 줄이고, 평화공존을 정착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좁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보수-진보가 접근할수 있는 근거리에 있는 문제영역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정당들이 강해져야 합니다. 선거를 통해 평화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의지, 국민의 의사를 전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선거 이슈이고, 이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정치적인 불이익을 입는다는 인식을 보수정당 내부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극단적 반공세력들을 순치(馴致)시킨다고 할까,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굉장한 힘을 갖고 있는 경제인들, 기업인들, 재벌 대기업도 좀 진취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반공주의라는 좁은 이념적 틀에 갇혀 북한을 적대적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자율성을 갖고 정경분리 원리에 의해 북한을 상대하고 교류해야 합니다. 경제적 접근을 통해서 격앙된 반공의식, 반북의식을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재벌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보수, 반북이라고 규정될 필요가 없어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남북관계가 긴장되고 전쟁위기가 고조되면 당장 경제에 불이익이 옵니다. 그래서 북한을 상대하고 적극적으로 북한에 진출하는 한편 정치는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국내에서는 강경보수 세력들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북한관계를 풀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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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난 최장집의 인터뷰이다. 그는 이념보다는 현실을 강조하는 현실주의적 정치를 말한다. 근래 마키아벨리를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지도 모르지만 한국 정치는 좌우를 막론하고 맹목적 이념을 강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최장집 인터뷰ㆍ上] "반MB가 진보?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레임덕은 민주주의의 필연…MB, 순응해야

프레시안 : 2011년이 되면서 이명박 정부 4년차를 맞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국정운영,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최장집 : 상당히 범위가 큰 질문으로, 대답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민주화 이후라는 측면에서 이명박 정부를 위치시켜 평가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987년을 우리 민주주의의 기점이라고 본다면 20년도 넘었습니다. 이 사이에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등 한국 민주주의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아무래도 민주주의, 민주화를 만들었던 사회 세력들이 힘을 많이 갖게 됐고, 이명박 정부 이전에 두 번에 걸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대선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앞의 민주화 이전의 정치체제는 권위주의가 아니었습니까.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는 민주화 직후의 일이고, 민주주의로 이행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선거를 통해 보수 세력이 집권한 최초의 사례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번의 진보적 정권 이후에 정권교체를 통해 보수정부가 들어섰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것은 앞의 두 번에 걸친 진보적인 정부가 선거에서 패배한 결과가 아닙니까? 앞의 두 정부가 국민의 신망을 지속적으로 획득하지 못했고, 그렇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사회는 모두 보수 세력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정부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과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요. 진보 세력의 경우,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국가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고, 인적 자원도 취약했습니다. 이는 정부를 운영하는 학습이라고 할 수 있고,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두 번의 민주정부가 정부운영, 국가경영의 경험미숙으로 정권을 넘겨준 것은, 민주화과정에서 일종의 학습비용을 치른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 보수적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는데, 앞의 정부와 자연히 대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수가 재집권했을 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선거에서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보수가 선거를 통해 컴백했을 때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줘야 하는데 의외로 보수 세력이 이런 것들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국정운영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진보파 민주주의 세력과 차이가 전혀 없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더 실망스러웠어요.

왜냐하면 보수파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권력을 상실했을 때 절치부심하면서 뭔가를 보여주고자 실력을 비축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을 때의 인사실패,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통상실패는 곧 촛불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여전히 논란의 대상인 4대강 사업은 엄청난 국론 분열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연평도 포격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북정책이랄까, 한반도 평화를 관리하는 정책에 있어서도 보수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어요. 전체적으로 두 번에 걸친 앞선 진보적인 정부들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마치 보수의 과업인 듯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계가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답보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돌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정도로 버틸 수 있는 것은 경제가 좋은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정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성장수출이 잘 나가고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죠. 중국이나 신흥 개발도상 국가들의 경제가 전반적으로 좋은 것을 배경으로 해서 한국 경제가 상당히 좋은데, 이런 조건에 힘입어 이명박 정부는 정부를 끌고 가는 데 그런대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보수와 진보가 경쟁관계에 있는 것인데, 보수가 진보보다 별로 나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허약했다는 겁니다. 이건 정말 의외입니다. 도대체 보수는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것은 공허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이상이 아니었어요.

프레시안 : 권력 내부의 작동 메커니즘에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최장집 : 보수가 운영하는 정치의 작동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전반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도를 운영한다는 면에서 민주주의는 보수 세력들에게 있어 생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 새로운 규범과 에토스, 새로운 이념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전체적으로 갖게 되는 인상은, 민주주의 제도를 다루는 데 너무나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제도는 민주주의인데 실제로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가치와 행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리더십이나 국정운영의 엘리트들의 가치와 행태,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사이에 괴리가 큰 결과로 봅니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등 큰 틀에서의 민주주의는 작동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권위주의적이다 보니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를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인 듯이 인식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결국 지난 10년 동안 보수 세력은 권력을 처음으로 상실한 상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시기 동안 진취적이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가치, 비젼, 지식을 습득하고, 실제로 권력을 가졌을 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고, 실력을 쌓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지극히 안일했고, 집권만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만 스스로 의존했습니다. 이념적으로도 구태의연합니다. 냉전시기에나 걸맞는 보수적인 반공의식이랄까, 60~70년대의 경제성장 모델에 머물렀습니다.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것은 과거의 모델에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민주화시대의 시대정신에 걸맞지 않습니다.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세계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사회구조와 경제성장 모델을 보수 세력이 발전적이고 진취적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가리는 문제들

프레시안 : 민주주의의 후퇴를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은 이명박 정부는 파시즘이 아니냐는 진단까지 하셨습니다.

최장집 : 보수가 권력을 상실했다가 재집권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인데, 두 번에 걸친 민주 세력들이 권력을 가졌다가 상실한 것도 첫 경험입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발전과 후퇴의 관계로 보는 방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아요.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부 들어와 크게 후퇴했는가? 나는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건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제도적으로 정상적인 선거를 치르고, 정당들이 경쟁해서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고, 이 과정에서 큰 정치적 위기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퇴행했다,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3공이나 5공보다도 못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러한 비판세력들의 민주주의관에 대해 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권력이 비판의 목소리를 억압할 때 분연하게 저항하는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촛불시위가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촛불시위는 쇠고기 협상, 통상 문제로부터 발생한 이슈라는 면도 있지만, 민주주의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가 일방적으로 과도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중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것은 보수정부가 권위주의화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였습니다. 정부가 비판적인 소리를 억압하니까 과감하게 여기에 도전하고 저항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민주주의에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민주 대 독재, 민주 대 반(反)민주라는 등식으로 문제를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20년 전 민주화투쟁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극히 협소한 문제인식이지요. 8,90년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도 역동적으로 변화했고, 사회도 변화했고, 새로운 문제들도 많이 제기됐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를 작동시켜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엄청나게 많은 거지요. 정치의 초점은 권력에 대한 저항, 투쟁으로부터 국가와 정부를 어떻게 잘 운영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통치의 문제로 이동했고, 따라서 정부운영의 능력이 핵심주제가 됐습니다. 이것은 거리의 운동의 정치에서 정당, 선거, 정책, 대표와 책임 등 제도를 운영하는 정치로 정치의 중심이 이동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민주 대 독재라는 대립구도는 이 문제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 요소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인식, 발상, 담론은 너무 협소할 뿐 아니라 사람을 계속 흥분하게 만듭니다.

이명박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나 진보처럼 인식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시각은 실제 민주주의가 다뤄야 할 중요한 이슈들, 즉 정치 사회 경제적 이슈들을 표출되지 못하게 하고, 다루지 못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인 공론의 장, 담론이 좁은 범위에 갇혀, 이명박 정부를 공격하고, 야유하는 것에 머문다면, 그것이야말로 보수의 틀에 갇히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봐요. 이런 조건에서는 다른 사회경제적 이슈들이 제기되기 어렵습니다.

민주정치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는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 테면 정당정치의 문제가 그렇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경제적 문제와 사회적 갈등문제 같은 것이 그런 것이지요. 민주와 진보를 이야기하고 촛불이다, 서민이다, 복지다, 이런 것들이 담론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들은 터치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 사회의 인사이더(insider--체제안에서의 사회층)들의 문제의식이 좁은 범위 안에서 쳇바퀴 돌듯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격적 열정은 충만하지만, 이러한 사회적인 내용이 다뤄지지 못함으로써 실제로 정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프레시안 : 정치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이번 예산안 처리과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보입니다. 대통령의 독선적 국정운영을 여당은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보였습니다.

최장집 : 이 문제에 대답하는 배경으로서 그 맥락이나 틀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명박 정부를 포함하여 민주화된 이후에 정치, 권력의 작동방식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집행부 중심의 정부운영, 대통령과 정당정치의 괴리, 대통령권력에 대한 정당정치의 위계적 종속이라는 말로 특징될 수 있고, 이것은 보통 편리하게 당정분리라는 말로 나타나고는 합니다. 사실상 이런 식의 통치방식은 모든 정부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청 (당과 청와대)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청와대의 지휘를 받는 당정관계랄까, 정치의 이원화는, 권력관계에 있어 대통령의 강함과 정당의 약함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은 정당들이 그들이 기반으로 삼고 대표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되지 못하는 조건에 기인합니다. 청와대가 중심이 된 집행부 권력과 정당이 이원화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 정치의 부재를 가져오는 배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권위주의적 정치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조건에서 대통령의 의사와 결정을 여당과 의회를 통해 권위주의적으로 밀어붙여 관철하는 현상이 일반화된다고 봅니다.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여 폭력적으로 법안이나 예산안같은 중대사안을 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방식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이것은 권위주의시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행태이지만, 그 행태는 모두 다른 내용과 동기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예산안 처리과정에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대통령이 임기말에 가까워지니까 레임덕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행위는, 투표자들이 선거를 통해 잘못한 것에 대해 정당을 징벌할 수 있고, 정당이 이러한 징벌이 두려워 대통령을 견제하고 압력을 가해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의 결과이지요. 거기다가 한국에서는 사법부가 허약하기 때문에 집행부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4대강 사업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야당의 견제에 부딪힌 법안이 법원의 판결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법원의 결정이 정부여당의 의사와 다른 것이 되기는 어렵겠지요. 법원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전반적으로 정치의 부재현상은, 대통령의 독선적 국정운영과 연결된다고 하겠습니다.


ⓒ프레시안(최장집)

프레시안 : 제도시스템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 운영의 주체, 즉 대통령 개인이나 집행의 담당자, 이를 지지하는 세력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장집 : 결국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시민 투표자들의 판결에 따라서 권력을 운영하고 공적 결정을 내리는 체제입니다. 그러므로 선거의 결과에 순응한다고 할까, 이것을 존중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예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는 투표자들의 집합적 결정이 굉장히 이성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앞선 대선이나 총선에서 야당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결과로 인한 야당 견제세력의 상실, 그것에 대한 보완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힘의 균형은 국민의 소리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와 여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이제 중단하라는 국민이 보내는 시그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민주주의라는 게 소수자들의 의사도 존중해야 하는 겁니다. 선거의 결과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이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어요.

그 다음에는 영어로 말해 델리버레이션 (deliberation--熟議 또는 논의), 즉 공적 영역에서의 이성적 논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 요건입니다. 이러한 공적 논의의 중심에는 의회가 자리 잡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공적 논의의 전통이 없고 정치가 이것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우리 정치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공적 논의과정을 무시하는 것을 너무나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가 제일 중요한데, 그런데 그것은 전체 권력의 향배를 결정짓는 것이 핵심이예요. 다수와 소수의 힘의 균형과 배분을 결정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책결정, 공적 결정이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공적 논의의 장에서 의제를 심의하고 사회의 소리들을 논의하는 것은 다수결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회 자체는 투표만 하는 장소가 되고, 누구의 권력이 더 강한지를 겨루는 격투장이 될 수밖에 없어요. 다수결은 모든 이성적 논의과정들이 끝난 다음 결정을 위해 행해지는 최종의 의식(儀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논의과정이 다수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미국에서도 오바마와 민주당이 집행부와 상하 양원에서 다수인데 힘으로 밀어붙이지 못하지 않습니까. 지난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하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됐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상원은 여전히 민주당이 다수이고, 대통령도 민주당이니 밀어붙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민주당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부시의 부자감세안 문제를 공화당과 타협했습니다. 다수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론을 타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입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말하자면, 유권자들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줬고,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다수로 만들어줬지만, 자신이 다수이기 때문에 모든 결정을 다수결로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지요. 이 점 때문에 우리는 국회운영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실종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민주당, 인사이더 플레이에서 벗어나야

프레시안 : 집권여당이 힘의 정치를 밀어붙이니 야당들로서는 자신들의 정치공간을 잃어버린 측면도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야당도 불가피하게 장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요.

최장집 :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수인 정부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격렬하게 반대하고 투쟁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측면이 우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야당이 잘했다, 여기에 만족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야당은 왜 이렇게 하는가, 뭔가 대안을 보여줌으로써 여당이 야당의 정치적인 수준과 행위에 대해 존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야당의 구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민주당을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민주당의 구조나 제도가 잘못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리더십의 선출에서부터 시작해서 당의 리더가 권위와 리더십을 갖고 정책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것을 진행할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면서 지휘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은 구조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 야당의 구조는 리더가 리더로서 행위하지 못하도록 옥죄는 느낌을 받습니다. 결국 사회적 기반이 너무나 약하고 협소하기 때문에 야당이 너무 취약해서 야당의 리더십과 행태는 결국 언론에 의존하게 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또 언론은 앞에서 언급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와 같은 이분법적 발상에 지나치게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비판언론은 이념적으로 급진화됐고, 정서적으로 흥분해 있으면서, 사회의 급진적 비판적 의견만을 집중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경쟁관계에 있는 민주당의 리더들은, 이러한 급진적인 언론에 의존하게 됐고, 투쟁적인 진보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입지나 지지를 획득하려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튼튼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다면, 또는 갖기 위해서는 당을 컨트롤할 수 있고, 당의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 리더십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것을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강경 경쟁이랄까, 그 외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결국 정부여당의 권위주의적 권력운영에 보조를 잘 맞춰주는, 하나의 짝이 돼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읍니다. 이것은 보수적인 주류언론들과 보수적 정치인들이 깔아놓은 텃밭에서 야당이 잘 맞춰주고 있는 셈이지요. 야당으로서 대안을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현재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지적해 주신 야당 내부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단초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최장집 : 내가 대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웃음), 우선 민주당의 지지기반, 사회적 지지기반이 상당히 얕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재 민주당은 지역적으로 호남에 편중돼 있는 점도 있고, 정당으로서 체제를 정비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밖에서 동원된 정치랄까, 목소리가 크고 강한, 강경한 비판적 정치의견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로부터 지지를 끌어내는 구조입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새로운 이슈를 개발하고 이해관계를 갖는 사회집단으로 확대하려는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인사이더들의 경쟁구조를 갖게 된것 으로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야당의 정치인들과 정당 밖의 언론인, 지식인전문가 그룹 등 한국사회의 엘리트들이 인사이더들의 이해와 관심사항을 담론장으로 끌어내고 이슈로 만드는, 일종의 닉서스(nexus : 결탁)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척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이를 실제 사회세력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론의 영향력으로는 야당의 역할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실제 투표에서 얼마나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보낼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민주당은 이러한 진보경쟁, 급진적 경쟁보다는 어떻게 당을 사회의 주요 집단들과 연결할 것인가? 어떤 사회적 문제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하나?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아울러서 지지기반을 만들어 낼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당 내에서 경쟁하는 정치인들은 커다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것은 급진적이고 날 선 언어와 담론을 사용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내부에서 제한된 수의 정치 엘리트들 간의, 인사이더 플레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당은 계속해서 급진적 담론만 갖고 서로를 끌어내리거나 혹은 리더십을 나눠 가지면서 각자가 이를 향유하는 구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민주당에 미래는 없지요.

MB 정부 개헌론은 국면전환용 카드

프레시안 : 정당들의 이런 취약한 구조에 기반한 정치의 부재 문제가 개헌이나 선거구제 개편을 통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최장집 : 개헌은 기본적으로 진공상태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특정의 정치적 조건에서 권력을 향한 경쟁자들이 우월한 지위를 점하기 위해 이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결부돼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개헌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동기를 갖는 사람들이 개헌을 둘러싼 논의의 틀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제기되고 있는 개헌 드라이브의 배후에는 모두 알다시피 청와대가 있지 않은가요. 상당히 좋지 않은, 정치적이고 정략적 목적이 강한 개헌 제기라고 봅니다.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까워지면서 이를 벗어나고자하는 국면전환용 카드랄까, 이는 우리의 현재 헌법이 작동하는 문제, 그 효과의 문제, 새로운 개헌 이슈가 실제로 어떤 제도적 효과를 갖느냐 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 현실을 특정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당장 왜 개헌을 하는가, 현행 5년 단임제 헌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부터 살펴야 합니다.

나는 5년 단임제 개헌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막강한 대통령 권력의 독주나 전횡을 견제하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아직 개헌을 진지하게 논의할 시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도 때문에 민주주의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사회제도의 기본 틀이 헌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도에 천착하는 것은 정치를 보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제도가 정치를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 여기에 대해선 많은 학자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제도의 틀 안에서 정치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제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의 정치를 보지 않고 그 제도를 일거에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좋은 정치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도 있습니다. 현재의 개헌논쟁이라는 것은 위험한 문제제기이며, 큰 정치적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프레시안 : 개헌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선거구제 개편 문제입니다. 현재의 선거구제가 표심을 왜곡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최장집 : 선거구제 개편 문제는 논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논의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꾸 중대선거구제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도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제도적 장치와 대안으로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영남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당선시키는 데 필요했던 측면도 있었지요. 그런데 중대선거구제는 현실적으로 기존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 과거 일본의 자민당처럼 제1당에게 가장 유리한 제도 (지금은 일본도 중대선거구제 폐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중대선거구제는 대표의 비례성이 가장 떨어지는 제도, 불비례성이 가장 높은 선거 제도입니다. 선거 제도를 전공한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중대선거구제는 제1당에 의한 조작이 굉장히 용이한 제도이기도 합니다. 선거구제 개혁을 논의한다면 사회의 다양한 소리를 잘 대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고려할 수도 있고, 프랑스의 결선투표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을 어떻게 잘 대표할 것인지를 두고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선거구제는 단순다수 소선거구제가 아닙니까. 이것이 가장 좋은 제도, 비례성이 가장 높은 선거제도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선거구가 작을수록 대표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선거구제는 2당에 상당히 유리한 제도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 소선거구제를 고쳐서 2당의 위협을 견제해 보려는 정략적 의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학계에서는 합의가 돼 있는 문제입니다. 언론에서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어요. 아무래도 언론이 현실정치에 밀착되다 보니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복잡한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프레시안 : 야권에선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염두에 둔 연대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맥락에서 본다면 야권연대 과정에서 역시 사회경제적 이슈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장집 : 선거 과정에서 정치세력이 서로 연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민주주의에도 기여한다고 볼 수 있어요. 선거를 통해 여러 다양한 정책적 차이들이 너무 다양화되면 수렴과 통합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연합은 수렴과 통합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특히 대선의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단순다수 선거제도를 통한 대통령중심제가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양당적 효과랄까, 크게 두 블록으로 나뉘어 경쟁하는 것을 부추기는 제도이기 때문에 정치연합을 도모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정치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담론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정치연합은 기본적으로 반(反)이명박 전선,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결과물입니다. 굉장히 네거티브한 정치연합이라는 것이지요. 누구를 반대하기 위해 정당이든 뭐든 사회정치 세력이 모여 적을 눌러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진보 영역에서 제기되는 정치연합인 것으로 보입니다.

정당들은 일단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자신의 사회적 대표성을 확대, 강화하는 노력을 선행해야 합니다. 이런 차이들은 다 무시하고 억압하면서 성급하게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드라이브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합은 대선에서는 좀 더 용이할 것이고, 총선에서는 더 어렵겠지요. 특정 선거구에서 어떤 근거로 특정한 후보와 정당을 주저앉히고 연합의 이름을 내세울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연합을 할 때 필연적으로 후유증의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어쨌든 현재 정치권 밖에서 야당통합에 대한 압력이랄까, 이런 것은 과도해 보입니다. 운동적 차원에서 연합을 밀어붙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MB, 진보적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프레시안 : 올해부터 정치권도 서서히 선거 모드로 진입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2012년 선거를 앞둔 정치권, 어떻게 전망해 볼 수 있을까요.

최장집 : 2012년에 두 번의 선거가 예정돼 있습니다. 크게 보면 진보와 보수라는 큰 틀에서 경쟁하는 것은 틀림없는 현실이고, 이런 구도로 볼 때 앞으로의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선거는 시계추와 같이 움직이는 사이클이니까요. 2007년에는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어요. 그런데 이 정부가 기대를 충족시키는 정치를 했다면 모르지만, 사이클로 보면 민주당이 상당히 유리해 보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정당적 제도화는 여전히 너무나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민주당에 부여되고 있는 기대와, 실제 민주당이 갖고 있는 힘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음 선거의 결과에 대해서는 예측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민주당이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체질을 바꾸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행운들이 동시에 작용해서 집권한들 그 결과가 어떨까요. 집권을 해도 '이런 수준으로 도대체 왜 집권하려고 했느냐', '우리가 왜 밀어줬는가'라고 하는 불만이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이내 반작용으로 나타나기 쉽지 않겠습니까? 경쟁의 내용이 좋아져야 하고, 이 경쟁을 통해 승리했을 때 과거 진보적인 정부들에 비해, 그리고 앞선 이명박 정부에 비해 더 잘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한 선거를 여러 번 거쳤는데, 진보적인 정치세력들이 집권했을 때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는지 살펴야 합니다. 민주당이 좋은 정당의 구조를 갖추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 기회에 강조했던 말이지만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 사회집단이 너무나 많습니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절반 가까이 되니까요, 한나라당이 1당이라고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체 유권자들을 기준으로 볼 때, 투표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많지 않습니까? 결국 판가름은 투표율에서 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 지지층을 민주당 지지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사회경제적 이슈들을 제기하고, 이를 실현할수 있다는 기대와 신뢰를 주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제도, 정당 밖에서 운동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포퓰리즘적 운동방식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투표율이 어떻게 선거의 성패를 가늠하느냐 하는 것은 지난 11월 치러진 미국의 중간선거도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오바마가 말했듯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박살"이 났는데, 선거결과는 2년 전 대통령선거에서 오바마를 당선시킨 투표자들이 공화당으로 정당지지를 옮긴 때문이 아니고, 이번 중간선거에서 투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2년 전 선거에서 공화당의 온건지지파들은 기권하고, 무당파들이 오바마를 지지했고, 그동안 투표하지 않았던 청년, 노동자, 흑인등소수인종이 대거 투표에 참여한 결과가 그를 당선시킨 바 있었지요. 그런데 2년 후에는 무당파를 포함한 오바마의 잠재적 지지층들이 대거 기권했던 반면, 공화당 지지층이 모두 적극적으로 투표했던 것이 그러한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이예요. 한국에서의 앞으로의 선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소외 세력들의 정치참여가 진보적 정당들의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적 동원으로는 안될 것입니다.

정당의 리더십과 체질은 진보적인 언사나 레토릭을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좋은 정치적 리더십을 만드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됐다고 봅니다. 보수적 정당이든 진보적 정당이든 좋은 리더가 선출될 수 있는 구조가 좋은 정당이고, 좋은 정치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너무 쉬워요. 대통령까지의 여과과정이 너무 짧고, 우연적이고 운수가 너무 많이 작용합니다. 국회의원 한두 번 하면, 너나없이 대통령하겠다고 나서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정치 리더에 대한 스크리닝 과정이 너무 단순해요. 실제 정치적 실천 속에서 검증되고 걸러져서 위로 올라갈수록 좋은 인물이 리더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꼭 제도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리스크가 많은 제도적 맹점과 병행해서 일반의 정치적 무드를 끊임없이 흥분시키는 언론도 문제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무드에 따라 대통령이 선출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입니다. 386이니, 486이니 하는 사람들도 아마 한두 번 국회의원 하면 모두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운영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애국심이라는 말을 좋아하지않는데, 그러나 애국심이 정치인의 윤리적 덕목으로써 필요할 때도 있다고 봅니다. 권력추구의 야망이 큰 한 정치인이 있다면, 그에게는 애국심이 필요합니다. 그에게 애국심이 있다면 스스로의 능력을 잘 판단하고 자제해야 합니다. 본인 생각에는 누구보다 탁월한 리더십을 가졌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재난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는 4년차를 맞았습니다. 남은 임기 2년 동안 유념해야 할 점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최장집 : 보수적이라고 해서 안보에 대한 성과를 내겠다는 강박관념은 극히 위험합니다. 그런 관념은 과거 냉전시기, 권위주의 시기와 다를 바 없는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이성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보적인 쪽의 소리, 평화의 가치를 존중하는 의견을 수렴하는 게 필요합니다.

또 레임덕에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최근의 예산안 날치기도 레임덕을 돌파하자, 피해 보자는 동기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레임덕은 그런다고 피해갈수 있는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빨리 옵니다. 레임덕은 민주주의 제도, 임기를 갖는 모든 공직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선거제도의 사이클에 순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돌파하고자 무리한 수를 쓰는 것은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미 후반기로 넘어 갔는데, 과단성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벌여놓은 정책이나 과제를 잘 마무리하기 위한 시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헌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선거를 잘 관리해서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쪽으로 일을 해야지, 무리한 일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의 다양한 소리를 좀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폐쇄적인 결정구조 속에서 보수적 소리가 일방적으로 과다 투입되고 있고, 공익을 위해 공직에 봉사한다는 이미지보다 사익(私益)추구적 목적을 위해 공직을 휘두른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의사투입의 범위를 넓혀서 다양한 소리, 비판적 소리까지 광범위하게 듣는 것이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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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국의 박근혜論]<10·끝> '계영배'의 싸움, 승리할 수 있을까 

 

"대세론에 안주하면 진다." 박근혜 독주가 2년 이상 계속되면서 울려오는 경고의 목소리다. 대세론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안주하면 필패'다. 백전노장 최형우는 정치 신인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날 마지막 한 표 때문에 떨어진다." 또 "전략적으로 낙관하되 전술적으로 비관하라"는 이수인 선생의 가르침도 새롭다.

6.2지방선거에서 박근혜는 간단치 않은 내상을 입은 바 있다. 박근혜는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수 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치권에서는 선거의 여왕 박근혜가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진두지휘한 자기 지역선거에서 패배한 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였다.

박근혜가 지역구 관리를 일임한 '측근'의 호가호위와 전횡이 선거패배의 원인으로 분석됐고 '측근'의 사임으로 선거 후유증을 조기에 수습했지만 달성군의 패배는 대세론에 안주하면 어떤 위기가 올 수 있는지를 징후적으로 보여주었다. 달성군수 선거 패배가 박근혜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박근혜 하기 나름일 터이다.

선거'만' 생각하고 영혼을 팔아 당선된 대통령은 안돼

박근혜는 젊은 날의 일기에서 "바른생활소녀"라 불릴만큼 엄격한 자기절제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단련된 그의 품성은 '성실'과 '신뢰', 두 단어로 표현해도 될 듯하다. 이 같은 그의 생활태도와 자세가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부터 2년 간이다. 가히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인생의 최대 승부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뉴시스

선거란 99%의 땀과 1%의 운으로 이루어진다. '운칠기삼'은 도박판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정치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대권주자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별로 없으므로 선거를 특별한 일로 보지 않을지 모르나 선거야말로 인간 능력과 인간 한계의 극한을 시험 받는 현장이다. 만나도 만나도 끝나지 않는 사람들, 가도 가도 끝없는 유세의 길,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정책과 비전, 이리 짚어보고 저리 두들겨 봐도 모자라는 '한 표'. 한 마디로 선거는 고행이다.

선거는 유혹이다. 선거판을 다니면 표가 보인다. 후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저 표만 가져오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 듯, 후보는 표밭에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을 팔고 싶은 유혹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낀다. 마음이 바쁘기는 표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유력한 주자일수록 선거 후를 보장 받기 위한 표들의 유혹은 강렬해진다. 때로 위협과 시위도 동원된다. 이런 류의 유혹과 시위와 위협에 굴하지 않아야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선거만 생각하고 영혼을 판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처럼 국가적으로 참담한 일은 없다.

선거는 수백만명이 몰려다니는 거대한 난장이다. 개중에는 5년 마다 서는 장이라 무작정 길을 나선 부랑자도 있고 1년 벌어 5년 먹고 사는 보따리장사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부담가지 않는 군것질거리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참 좋은 우리 국민들이다. 후보는 높은 무대올라 전황을 살펴보는 지휘관 노릇도 해야 하지만, 바로 이들과 함께 진흙바닥에 주저앉아 밥 먹고 잠깐의 새우잠으로 다음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대장이 되기도 해야 한다. '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아직은 '선점 효과' 누리지만…정권교체 지수는 높다

10월 16일~17일 한국정책과학연구원이 행한 국민의식조사에서 국민의 61.6%는 한나라당이 아니라 다른 정당으로 바뀌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한나라당이 다시 한 번 집권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38.4%에 불과했다. 이 같이 높은 정권교체지수는 한나라당의 재집권 가능성을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하게 한다. 아무리 박근혜가 주자들 중 앞서 있어도 지지율 30%대에 불과하므로 61.6%에 달하는 정권교체지수를 30%대의 지지율로 막아낸다는 건 숫자상으로만 보면 불가능해 보인다. '대세론'이 '필패론'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국민들은 다른 응답을 했다. 정당별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는 한나라당 후보 38.9%, 야당 후보 29.4%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높은 정권교체지수에도 불구하고 후보 구도에서는 박근혜가 아직 선점효과를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야권에게도 높은 정권교체지수에 부응할 수 있는 후보만 잘 내놓는다면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여권과 박근혜에게는 경계의 뜻이 야권과 손학규, 정동영, 유시민 등에게는 희망과 독려의 뜻이 담겨 있는 조사라 하겠다.

선두외롭다. 페이스 메이커도 없이 혼자 앞서나가는 선두는 더욱 외롭다. 더구나 이 게임은 42.195km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앞서가도 승부가 나는 시점까지는 계속 달려야 하는 게임이다. 먼저 완주하고 주저앉아 쉴 수 있는 그런 게임이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상황을 안정적으로 주도해나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박근혜, '계영배'의 싸움…승리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산을 오르건, 마라톤을 하건, 대권에 도전하건 먼저 자신을 이기지 않으면 승부는 불가능하다. 자신과의 싸움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참담하면 참담한대로 고독하면 고독한대로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박근혜는 친지들에 대한 선물로 계영배(戒盈杯, 넘침을 경계하는 잔. 술을 따를 때 일정 한도를 넘으면 밑으로 흘러내리게 만든 잔)를 애호한다고 한다.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계영배는 공자도 늘 곁에 두어 스스로를 경계했다. 대세론을 타고 있는 박근혜는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계영배를 마련해야 한다. 선거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체력과의 싸움이고 지력과의 싸움이며 정신력과의 싸움이고 자기 마음과의 싸움이다. 여기서 이겨낸 자만이 승리할 수 있고 여기서 이겨낸 자의 승리만이 의미 있는 정치의 출발이 될 수 있다.

1979년부터 1997년까지 박근혜의 '잃어버린 세월'이, 이 18년간의 담금질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지도 모른다. "단련에는 다 뜻이 있는 법이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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