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국의 박근혜論]<10·끝> '계영배'의 싸움, 승리할 수 있을까 

 

"대세론에 안주하면 진다." 박근혜 독주가 2년 이상 계속되면서 울려오는 경고의 목소리다. 대세론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안주하면 필패'다. 백전노장 최형우는 정치 신인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날 마지막 한 표 때문에 떨어진다." 또 "전략적으로 낙관하되 전술적으로 비관하라"는 이수인 선생의 가르침도 새롭다.

6.2지방선거에서 박근혜는 간단치 않은 내상을 입은 바 있다. 박근혜는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수 선거에서 졌다. 국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치권에서는 선거의 여왕 박근혜가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진두지휘한 자기 지역선거에서 패배한 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였다.

박근혜가 지역구 관리를 일임한 '측근'의 호가호위와 전횡이 선거패배의 원인으로 분석됐고 '측근'의 사임으로 선거 후유증을 조기에 수습했지만 달성군의 패배는 대세론에 안주하면 어떤 위기가 올 수 있는지를 징후적으로 보여주었다. 달성군수 선거 패배가 박근혜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박근혜 하기 나름일 터이다.

선거'만' 생각하고 영혼을 팔아 당선된 대통령은 안돼

박근혜는 젊은 날의 일기에서 "바른생활소녀"라 불릴만큼 엄격한 자기절제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단련된 그의 품성은 '성실'과 '신뢰', 두 단어로 표현해도 될 듯하다. 이 같은 그의 생활태도와 자세가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부터 2년 간이다. 가히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인생의 최대 승부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뉴시스

선거란 99%의 땀과 1%의 운으로 이루어진다. '운칠기삼'은 도박판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정치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대권주자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별로 없으므로 선거를 특별한 일로 보지 않을지 모르나 선거야말로 인간 능력과 인간 한계의 극한을 시험 받는 현장이다. 만나도 만나도 끝나지 않는 사람들, 가도 가도 끝없는 유세의 길,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정책과 비전, 이리 짚어보고 저리 두들겨 봐도 모자라는 '한 표'. 한 마디로 선거는 고행이다.

선거는 유혹이다. 선거판을 다니면 표가 보인다. 후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저 표만 가져오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 듯, 후보는 표밭에 자신의 신념과 자존심을 팔고 싶은 유혹을 하루에도 몇 번씩 느낀다. 마음이 바쁘기는 표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유력한 주자일수록 선거 후를 보장 받기 위한 표들의 유혹은 강렬해진다. 때로 위협과 시위도 동원된다. 이런 류의 유혹과 시위와 위협에 굴하지 않아야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선거만 생각하고 영혼을 판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처럼 국가적으로 참담한 일은 없다.

선거는 수백만명이 몰려다니는 거대한 난장이다. 개중에는 5년 마다 서는 장이라 무작정 길을 나선 부랑자도 있고 1년 벌어 5년 먹고 사는 보따리장사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부담가지 않는 군것질거리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참 좋은 우리 국민들이다. 후보는 높은 무대올라 전황을 살펴보는 지휘관 노릇도 해야 하지만, 바로 이들과 함께 진흙바닥에 주저앉아 밥 먹고 잠깐의 새우잠으로 다음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대장이 되기도 해야 한다. '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아직은 '선점 효과' 누리지만…정권교체 지수는 높다

10월 16일~17일 한국정책과학연구원이 행한 국민의식조사에서 국민의 61.6%는 한나라당이 아니라 다른 정당으로 바뀌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한나라당이 다시 한 번 집권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38.4%에 불과했다. 이 같이 높은 정권교체지수는 한나라당의 재집권 가능성을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하게 한다. 아무리 박근혜가 주자들 중 앞서 있어도 지지율 30%대에 불과하므로 61.6%에 달하는 정권교체지수를 30%대의 지지율로 막아낸다는 건 숫자상으로만 보면 불가능해 보인다. '대세론'이 '필패론'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국민들은 다른 응답을 했다. 정당별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는 한나라당 후보 38.9%, 야당 후보 29.4%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높은 정권교체지수에도 불구하고 후보 구도에서는 박근혜가 아직 선점효과를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야권에게도 높은 정권교체지수에 부응할 수 있는 후보만 잘 내놓는다면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여권과 박근혜에게는 경계의 뜻이 야권과 손학규, 정동영, 유시민 등에게는 희망과 독려의 뜻이 담겨 있는 조사라 하겠다.

선두외롭다. 페이스 메이커도 없이 혼자 앞서나가는 선두는 더욱 외롭다. 더구나 이 게임은 42.195km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앞서가도 승부가 나는 시점까지는 계속 달려야 하는 게임이다. 먼저 완주하고 주저앉아 쉴 수 있는 그런 게임이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상황을 안정적으로 주도해나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박근혜, '계영배'의 싸움…승리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산을 오르건, 마라톤을 하건, 대권에 도전하건 먼저 자신을 이기지 않으면 승부는 불가능하다. 자신과의 싸움만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참담하면 참담한대로 고독하면 고독한대로 오로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박근혜는 친지들에 대한 선물로 계영배(戒盈杯, 넘침을 경계하는 잔. 술을 따를 때 일정 한도를 넘으면 밑으로 흘러내리게 만든 잔)를 애호한다고 한다.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계영배는 공자도 늘 곁에 두어 스스로를 경계했다. 대세론을 타고 있는 박근혜는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계영배를 마련해야 한다. 선거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체력과의 싸움이고 지력과의 싸움이며 정신력과의 싸움이고 자기 마음과의 싸움이다. 여기서 이겨낸 자만이 승리할 수 있고 여기서 이겨낸 자의 승리만이 의미 있는 정치의 출발이 될 수 있다.

1979년부터 1997년까지 박근혜의 '잃어버린 세월'이, 이 18년간의 담금질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지도 모른다. "단련에는 다 뜻이 있는 법이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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