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 난 기사다. 딴지일보에 대한 윤곽을 대체로 알 수 있는 정보다. 유시민과 진중권의 이름도 보인다.  

 

 줌인]딴지일보 MB가 살려냈다

2009 08/25위클리경향 839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0908201129201&code=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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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곳에 올렸던 나의 닉네임에 대한 설명 헐. 

 

우쑵니다.
난감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로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나의 형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로 가서
우쑤가문에서 파문 당했던 제비우스.....
(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거야, 그런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ㅠㅜ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시큰거리다니요. 제가 어디 노친넵니까.
하여 우쑤 가문의 영광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저 허리우스의 정체를 xco에게 베이찡 거리의 그 당혹스러움으로 설명할까합니다.
마블의 동지들이여.... 혜량하여 주시길....

에잇! 자 짱꼴라 베이찡 샤오지에! 우쑤의 칼을 받아라!

Hi xco!!!
You wonder What means my nickname 허리우스? really?
허리우스=herrius, in short, ussu! yes! ussu.
translate 허리우스 to chinese = 虛裏憂愁,
허리우스 means 虛裏面的憂愁!
虛(허) means not nothing but potentialities in which all thing is.
裏(리) is the inside
憂愁(우스) means not fear or sadness but melancholy
so 허리우스 means the melancholy man in the empty(虛)

xco! understand my nickname!
thanks.
So I present my best favorite song to you.
Do you know the Rock group Queen?
I pray for you to meet good korean guy like me! yes, like me.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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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박정희에 관한 일화를 퍼왔다. 음. ..... 퍼오지 못하게 막아놓았네 ... 

주소를 붙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37599&CMPT_CD=P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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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 신문 기사를 퍼온다. 기독민주당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얼척이 없다.  특히 미국을 부모에 빗대어 얘기하는 것에 아연실색. 마치 조선조 시대 중화로 모신 명나라를 빗대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과연 주자학이 우리 시대에 미친 바는 무엇일까.

 

대형 교회 목사들이 창당한 기독자유민주당이 ‘좌익세력 1000명의 명단’을 올 연말께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 20일 창당한 기독자유민주당의 전광훈 고문(사랑제일교회 목사)은 22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빨치산의 육신적 디엔에이(DNA)를 가진 사람 가운데 한국 정치를 장악한 이들이 1천명”이라며 “기독자유민주당 대표인 김충립 박사가 1천명 명단을 곧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충립 기독자유민주당 대표는 “좌익 활동을 통해 교도소에 살았던 사람들 명단 등을 발표해 적어도 이들이 대한민국 지도자로 뽑히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라며 “기록과 사실을 토대로 명단을 만들어 배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명단에는 여야 인사가 두루 포함될 예정이다. 전광훈 목사는 “이재오 전 특임장관, 박형준 대통령실 사회특별보좌관, 정동영·박지원 민주당 의원,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등이 다 명단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전광훈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공산주의가 좋다는 분은 당신들이 원하는 나라, 북한이 있으니 재산을 포함해 다 가져가라’고 체제 선택의 자유를 줬고 그 이후에도 공산당 활동을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처단했다”며 “그때 처단이 무서워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간 사람들이 빨치산이고 그 빨치산의 육신적 디엔에이를 가진 사람이 한나라당 이재오, 민주당 정동영 등 1000명이나 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이들은 결국 사고나 논리에 따라 좌파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흐르는 가치관, 디엔에이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라며 “(이들이 계속 정권을 장악한다면) 대한민국에 소망 없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이들은 대부분 주한미군 철수, 예비군 철폐, 국군 10분의 1 감축,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던 민중당 출신 인사들”이라며 “이들이 정치활동을 계속하려면 자신의 민중당 활동 등 과거로부터 전향했다는 전향의 의사를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그 예로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들었다. 전 목사는 “김 지사는 ‘노무현 대통령 보면 내가 대학 다닐 때와 똑같은 생각 하고 있어’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건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향 발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정도 선언 해야지. 그말 하기 싫어서 뒤로 빠지면서 한국에서 대통령하겠다, 정치하겠다 나서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또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당시 국민이 마음으로 ‘이 나라의 지도자’라고 믿었던 사람 가운데 두 명인 이승만, 김구가 한국에 들어오는 데는 각각 두달, 세달이 걸렸다”며 “좌파가 좋아하는 김구를 한국에 올 수 있게 해준 것은 미국이었고,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박정희 전 대통령 손에서 구원한 것도 미국이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미국을 부모에 빗대어 설명했다. 전 목사는 “부모님이 나를 때려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존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없었다. 미국이 요즘 통상 문제 몇 가지 섭섭하게 한다고 해서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참 근본을 모르는 행위다”라고 설명했다.

 전 목사의 역사인식에는 냉전체제 당시 미소와의 대립관계에서 미국이 세계정치에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38선을 획정하고, 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하도록 한 지점은 빠져있다.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어난 보도연맹 사건 등 숱한 양민학살에 대해서도 ‘정당한 것’으로 평가했다. 전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체제 선택의 자유를 줬고 그 뒤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 것으로 이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남북 이동의 자유를 준 적이 없다. 해방 뒤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인 군정 하에서는 비교적 느슨하게 남북간 왕래를 할 수 있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도 법적으로 남북 이동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편법적으로 서로 왕래를 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싫으면 떠나라’고 한 두 마디 한 적은 있지만, 법적으로 체제를 거부하는 인사들을 보내줬다는 발언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서 학살된 이들은 이념과는 무관한 순수 양민이 대부분이었다. 이이화씨는 “일례로 문경 학살만을 본다면, 어린아이, 부녀자 할 것없이 그냥 가만히 밥 하던 사람도 다 데려가 총살하고 파묻는 학살을 자행했다”며 “백번 양보해서 이념이 다른 사람만 죽였다면 체제가 다른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학살은 그야말로 순수 양민 학살이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전교조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전교조’를 연구하게 된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전 목사는 “5년 전,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부시 죽여’를 방에 써 놓고, 다음날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칼로 찍고 있었다”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시켰다고 말했고, 확인해보니 그 교사는 전교조 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부터 전교조를 철저히 연구했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전교조에 전교조 성향이 아닌 선생님을 침투시켜서 회비도 많이 내게 하는 등 집요하게 조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그 교사는 전교조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교조가 암암리에 ‘주한미군은 침략군’ ‘이승만은 미국에서 보낸 간첩’ 등 왜곡된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이 교육으로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영향을 받았다”며 “지금의 이런 좌경화 현상은 다 전교조 작품”이라고 말했다.

 전 목사는 자신이 기독민주당 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전교조에 의해서 잘못된 역사를 배운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대한민국 건국사를 너무나 모르기 때문”이라며 “내년 총선에서 전 지역구에 기독민주당이 후보를 내어 ‘대한민국을 인정하느냐, 불인정하느냐’를 묻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을 견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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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새롭게 연재되는 글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다. 

[동아시아를 묻다·1] 동아시아에 내재하기 위하여

 

동아시아론, 버블기의 끝자락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외래어였다는 흔적조차 희미해진 말 아시아(Asia)에 '동(東)'이라는 방위가 달린 이 말은 담론의 대상이자 통찰의 주제로 빈번이 회자되었습니다.

동아시아론. 동아시아에 관한 담론은 탈냉전, 세계화, 지역화, 탈국경화 등의 추세와 맞물려 부상했으며 역내 교류의 증가, 북핵 위기, 중국의 부상, 일본 우익의 준동, 한류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현실 사건과 반응하며 현실감을 더해 학술 쟁점 이상의 담론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학술 영역에서라면 동아시아론은 사상사, 문화 연구로부터 지역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전 방위로 논의되며 인문학에서는 주체 구성지평으로, 사회과학에서는 긴박한 분석 범주로서 조명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어 동아시아론은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출구라는 인상마저 풍겼습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론은 풍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론은 철지난 담론이 될지 모릅니다. 이미 내리막길로 들어섰다는 인상입니다. 여전히 여러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 위의 자전거 페달이 공회전하듯 담론은 지면(현실)과 무관하게, 그간 쏟아져 나온 동아시아론의 관성으로 인해 자기운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동아시아 사상사를 공부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론의 성장세가 멈췄다고 아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동아시아론이 외형적 성장을 거듭할 때도 그 번영과 사상적 공백 사이의 낙차가 제게는 눈에 밟혔습니다.

동아시아론은 풍년처럼 보였지만 실은 버블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권이 바뀌고 동아시아론에 관한 정책적 수요가 줄고, 관련 사업지원이 끊기자 동아시아론은 거품이 빠지듯 쇠락하는 풍경입니다. 역시 정책적 지원이 줄었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책적 지원 속에서 웃자란 동아시아론은 바로이유로 '동아시아'에 관한 담론임에도 '내수용' 담론으로 성장해왔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한국의 사상계는 어느 사상계보다 '동아시아'를 자주 입에 담지만, 몇몇 값진 시도들을 제외하고는 타국의 사상계와 공유할 만한 동아시아론을 생산해냈는지는 의문입니다. 한국의 조건으로부터 긴장어린 사상 자원을 빚어내 다른 지역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모호한 지평에 자신의 기대를 투사하는 형국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모호함, 동아시아론의 애매함

동아시아는 분명 모호한 말입니다. '아시아'의 어감에 배인 모호함은 '동'아시아로 좁힌다고 그다지 희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은 모호함을 대가로 지불하는 대신 풍부한 환기 능력을 얻습니다. '동아시아'는 그리하여 화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은 사회 현실의 다양한 면모에 새로 빛을 비추고, 기존의 학문적 대상과 범주들은 그 말 안에서 자명함을 잃거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말은 주체/타자, 근대/탈(반)근대, 국가/지역, 이론/역사 어느 개념과도 복잡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라는 말을 통해 환기되는 문제의식들은 멀리서 넉넉하게 표현하면 다양하다고 하겠으나, 바짝 다가가서 내실을 들여다보면 여러 모순, 불균형한 갈등이 엿보입니다. 동아시아는 하나의 문제의식이 전개되는 전제로 오기도 하며, 문제 상황을 갈무리하는 자리에 오기도 했습니다. 문화 연구에서는 현실의 면모를 새롭게 들추는 분석 틀로 쓰이기도 하며,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힘을 잃으면서 만들어진 공백을 메우며 이념의 위상에 서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말은 직관과 추상의 영역을 오가면서 다양하게 회자되었습니다.

그것은 동아시아가 지리적 개념으로 안착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동적으로 사용된 까닭은 '동아시아'를 문제의식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시대 배경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론은 어떤 배경에서 왜 요청되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갈라졌습니다. 앞서 탈냉전, 세계화, 지역화, 탈국경화 등 동아시아론이 부상하게 된 배경들을 늘어놓았는데, 그런 시대 조건들은 동아시아론이 성장해온 토양이자, 동아시아론을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동아시아라는 말은 모호성을 씻어낼 수 없었고, 그 모호성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론은 생산성을 띠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추상화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는 때로 자국을 지역의 수준에서 확대 재생산하는 지평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국민 국가 단위의 자국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장으로 모색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는 때로 지역 공동체설립경제적 근대화를 기도할 때 조명되기도 하며, 때로는 서구적 근대에 대한 '탈근대적 대안'으로 모색되거나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동학을 지닌 지역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문명론으로 경사되기도 했죠.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를 앞으로의 비전과 결부시켜야 하는 이유들은 쏟아져 나와 사상계를 넘어 정부 기구와 민간 단체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 관한 상이한 접근들이 논의의 지평을 넓혀 갔지만,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라는 내적 원리는 밝혀지지 않은 채 동아시아라는 말의 모호함에 기대어 동아시아론은 애매하게 확산되었다는 인상입니다.

지금껏 다뤄오던 연구 주제나 기획을 그대로 '동아시아'라는 애매한 담론 장으로 옮겨도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고, '동아시아'라는 말이 붙으면 어떤 현실성마저 띠는 듯한 착시 현상 속에서 '동아시아'는 사고의 지평이라기보다 그럴듯한 수사로 전락해갔습니다. 그리하여 만연한 동아시아론은 구체적 현실에 직면하면 담론의 물질성이 휘발되고 추상성, 관념성을 노출하곤 했습니다.

동아시아가 환기한 것

저는 동아시아론의 쇠락이 안타깝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쇠락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라면 동아시아론의 유산화 작업에 착수하고 싶습니다. 동아시아론 자체에 가치가 있어서라기보다 동아시아론을 통해 환기된 몇몇 문제의식들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동아시아론은 서구 중심주의와 학문의 식민성을 문제로 부각시켰습니다. 사실 '동아시아(East Asia)'는 '극동(Far East)'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국무부 내에는 '극동 업무(Far Eastern Affairs)'를 대신해 '동아시아 업무(East Asian Affairs)'라는 명칭을 단 부처가 등장했고, 아시아는 전후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의 필요에 따라 '동아시아(East Asia)',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 '서남아시아(South-West Asia)'로 구획되었습니다. 즉, '동아시아'는 미국 지역 정책의 필요성에서 등장한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동아시아'는 미국 주도의 지역학에서 한 가지 하위 영역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사상계에서 '동아시아'는 다른 맥락으로 전용되었습니다. 동아시아론의 포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최원식의 "탈냉전 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은 한국 사상사의 흐름 안에 있는 '변방적 경직성'을 질타하며 시작합니다. 교조의 권위에 매이지 않고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의 변증법적 관여를 통해 창조적 비약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백영서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제기하는 데 이릅니다. 그밖에도 '동아시아'를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성찰하는 지적 지평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런 시도 안에 내재된 역오리엔탈리즘이 문제로 제기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동아시아론을 매개해 서구 중심주의, 학문의 식민성 문제는 더욱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이 지역에서 사상적 연대를 도모하기 위해서도 동아시아 논의는 필요합니다. 이 지역에는 '동아시아 공동의 번영'이라는 수사로는 감출 수 없는 적대 관계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분단, 과거사 문제, 양안 문제, 영토 분쟁, 경제 패권 등의 문제가 상존하여 한국과 북한, 중국과 타이완,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 사이에는 어지러운 갈등이 잠재해 있습니다. 긴장 관계가 어려 있는 각국 간의 역사인식의 충돌, 현실적 규모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지역 인식과 세계 인식의 간극은 동아시아의 문제 상황에서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지만,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를 지리적 실체가 아닌 사유의 지평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은 지난 20년 간 이 지역의 문제들을 들춰냈으며, 동시에 자국인 대 외국인, 내부 대 외부처럼 정합적으로 짜인 패러다임에 담겨지지 않는 사고를 산출해냈습니다. 앞으로도 현실상의 갈등 가운데 사상적 연대는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다만 사상적 연대를 도모할 때 국가 단위의 표상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적절한지, 그리고 이 지역 내에 존재하는 지리적·역사적 규모의 비대칭성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셋째, 동아시아론은 한국 사상계 내부의 소통을 가능케 했습니다. 한국의 사상계에서 공동 언어의 소실 현상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론은 한국 사상계의 다양한 차원에서 논점을 생산하고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동아시아론의 애매함이 가중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한국의 사상계에서 동아시아론이 달아올랐던 까닭이 한국의 장소성에 관한 재인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해두고 싶습니다.

역시 여기서 창비 논자의 동아시아론은 더욱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논의는 건조한 동아시아 공동체론으로 경사되지 않고, 한국의 장소성에 근거해 한국의 동아시아론에 오리지널리티를 주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을 냉전 체제의 결절 지대로 인식합니다. 또한 복합 국가론은 분단 체제와 세계 체제의 고리로서 동아시아를 사고한다는 문제의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물론 이를 둘러싸고 여러 논자들의 논의가 거듭되었습니다. 무척 값진 충돌의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론이 공론이 되지 않고, 한국의 상황에 근거하되 타국의 사상계와 공유할 만한 사상적 자원으로 연마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에 내재하기 위하여

결국 저는 '내재하는 동아시아'를 함께 탐색해보고 싶습니다. 즉 그저 지역 범주 혹은 지리적 근접성을 뜻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가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를 공동으로 모색해보고 싶습니다. 지금껏 제가 적은 내용에서도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라는 내적 논리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 지점을 공동의 토의 주제로 다듬어나가고 싶습니다.

아직은 동아시아론을 장사지낼 때가 아닙니다. 후원 담론의 지위를 상실하고 거품이 꺼지는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론은 사상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지, 자립할 수 있는지가 진정으로 추궁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윤여일 수유너머R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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