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에 관한 내용은 철학적으로 분석할 만한 내용이다. 정재승도 사랑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증여론 등 선물에 관한 담론은 꽤 있다.

선물, 그 음험한 전략



진정 선물일까 아니면 일종의 교환일까, 데리다는 왜 선물이란 불가능하다고 했을까

▣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받은 것은 기원전 700년의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아마도 그전부터 선물은 존재했을 것이다. 원시 조상들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코끼리뼈를 조각하고 들꽃을 꺾어 선물하지 않았을까?

곧바로 답례하는 것이 실례인 이유

그런데 선물은 진정 선물일까, 아니면 일종의 교환일까?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질문이냐고? ‘진정한 베풂’은 무엇이든 돌려받겠다는 계산이 깔리지 않은 행위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선물은 진정한 베풂일까, 아니면 교환행위일까?



△ 선물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값비싼 신호이다. 영화 <색계>에서 이 대장(량차오웨이)은 장치아즈(탕웨이)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다. ‘시간 차이’를 둔 교환 행위인 선물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관계에 비극을 가져온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선물’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선물이 보답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선물이 아니라 교환의 시작이며, 그것이 거저 주는 것이라면 그 또한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가 거지에게 돈을 줄 때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주고받아온 것일까?
<왜 사랑에 빠지면 착해지는가>의 저자인 덴마크의 과학저술가 토르 뇌레트랜더스는 ‘구두’라는 하나의 제품이라 하더라고 선물과 상품에는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품 판매는 판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거래를 하는 순간 볼일을 다 본 셈이므로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선물이 오가면, 그들 사이에 남는 것이 있다. 선물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값비싼 신호이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사랑에 빠진 ‘초기’에 그토록 선물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결혼 30년차 부부들이 선물에 그토록 무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물은 관계를 형성한다.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초에 선물이란 말 그대로 ‘논리적 모순’이지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도입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 선물 교환은 교환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 차이를 두고 교환을 하는 행위다. 그래서 베풂의 성격을 담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란 ‘비연속적인 베풂의 행위’인 셈이다.
어느 사회나 받은 선물에 대해 곧바로 답례하는 것은 ‘받은 선물을 거절하는 것과 다름없는 결례’라는 문화가 존재한다. 답례를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간격을 두고 교환을 하는데, 그 시간 차이가 관계를 형성한다는 얘기다. 선물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답례를 하면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라는 뜻이 된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의 생일에 선물을 했다면, 나는 그 답례를 내 생일 때 받게 된다. 그 사이에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면.
사랑을 고백하는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가 한 달이라는 시간 차이를 둔 것도 그 때문이다. 선물을 받으면 관계가 형성되고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에 답례를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기대가 생겨난다. 토르 뇌레트랜더스의 표현대로, 선물은 서로에 대한 지배력을 갖는다.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진 빚은 미래를 공유하고 우리를 한데 묶는다. 전세계적인 스케일에서 선물을 퍼나르는 날인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연인들은 그 자리에서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시간 차이를 둔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의 관계는 점점 깊어진다.

시작한다면 꽃, 오래됐다면 가방

연인들이 주고받는 선물에는 특별한 레퍼토리가 존재한다. 어느 온라인 쇼핑몰이 10대부터 50대까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받고 싶은 선물’을 조사한 결과, 여성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로 1위는 가방, 2위는 보석·액세서리, 3위는 지갑이라는 응답이 나왔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에는 1위가 가방, 2위가 시계, 3위가 구두라고 대답했다. 그 밖에도 장미꽃, 향수, 화장품, 케이크, 의류, 넥타이, 벨트, CD 등이 인기 있는 선물용 제품들이다. 흥미롭게도 선물용 아이템은 전세계적으로 유사한 경향이 있다. 연인들끼리 돈을 주고받는다거나, 커피포트나 의자, 전등, 체육복 등을 선물하진 않는다.
왜 연인들의 선물에는 특별한 레퍼토리가 존재할까? 선물이 관계를 형성하고 싶다는 값비싼 신호라면, 두고두고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할 때 선물은 가치를 갖는다. 평소에 자주 보고 심지어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일 때 선물은 빛이 난다. 꽃은 그 자리를 빛내주지만, 가방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한다(어버이날 부모님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 돈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관계 형성에는 관심이 없다. 실용주의 노선이 최고다).
만약 당신이 연인에게 줄 선물로 고민하고 있다면, 꽃과 가방의 의미를 되새겨보시라. 처음 만나는 사이에선 꽃이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래된 연인일수록 실용적인 아이템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첫 만남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싶다면, 이따금 꽃을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너무 자주가 아니라면 여성도 기뻐할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선물에 대한 반응이 크지 않다. 선물을 받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감동하지 않는 편이란 얘기다. 선물을 고르는 능력 또한 현저히 떨어지며,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을 즐기지도 않는다. 많은 연인들 사이의 불화는 여기서 비롯된다.
여성은 선물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길 원하는데, 남성은 선물에 마음을 담을 줄 모른다.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한국시리즈 티켓을 선물해주는 것처럼, 남성은 자신의 취미나 기호를 배려한 선물을 받고 싶어한다. 여성들은 남성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선물을 통해 읽고 싶어하는데, 남성들은 선물은 중요하지 않으며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될 수밖에.

선물 고르는 과정도 선물처럼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연구해온 많은 과학자들은 선물이 때론 값비싼 불화의 신호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선물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르고 선물을 고르는 취향이 서로 달라 불화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물은 관계 형성을 위해 주고받는 것이기에 잘못된 선물은 관계 형성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물에 대한 얘기를 평소 자주 주고받으며, 선물을 고르는 과정을 하나의 선물처럼 활용하라고 선물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선물을 함께 고르는 과정이 즐거우면 선물에 대한 만족도도 올라간다. 특히나 상대방의 취향을 선물에 자연스레 담을 수 있어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자면, 반드시 카드는 상의해서 쓰지 말고 깜짝 선물로 줄 것. 마음을 담은 ‘긴 글’로 말이다. 카드를 고르고 쓰는 데에는 상의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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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흥미있는 논쟁이 일어났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것도 뭔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어야할 문제일 듯도 하다. 혹은 논제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은 아닐까. 이념과 인격이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다. 인격만을 논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사회적 문제를 희석시키는 매우 보수주의적인 태도이지만, 그래도 인격이란 품격 혹은 인간의 유형으로 중국 전통에서는 知人의 문제였다. 바로 지인의 문제가 나의 관심사다.

몇 개의 글을 옮겨 놓는다.

 

 

 

 

 

 #### 손호철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가 이 논쟁을 먼저 일으킨 글이다.

 평소 아주 좋아하는 선배교수가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생각이 같은데 단 하나 인간에 대한 철학이 달랐다. 특히 한 후배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운동으로 잘 나가고 있는 한 후배교수였다. 그는 평소 삶의 방식에서 너무 문제를 많이 일으켜 주변사람들이 매우 싫어했다. 나 역시 그와 아주 좋지 않은 경험을 한 뒤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해 상대도 안 하고 있다.
그러나 선배의 경우 그가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고 일종의 공적 영역인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진보적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것은 다 거짓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건 ‘싸가지’
요즈음 바로 이 이념과 인간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념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아니 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클래스 내지 격이라는 생각이다. 한 마디로, 나는 “나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보적이지만 인간이 안 되고 격이 없는 사람보다는 보수적이어도 인간이 되고 격을 갖춘 사람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최근 이 같은 생각을 더욱 갖게 된다. 그 같은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대표적인 ‘극우’ 내지 냉전적 보수 정치인인 김용갑 의원이다.
사실 그의 냉전적인 정치행태와 관련해 나는 평소 그를 매우 싫어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시 민주노동당의 두 명에 불과한 지역구의원 중 한 명이었던 조승수 의원을 위한 서명에 김 의원이 서명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조 전 의원이 주민들에게 불려가 음식물 쓰레기처리장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민들에게 몇 마디 답을 한 것이 사전선거운동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명으로 기소를 당하자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서명을 한 것이다. 결국 이 서명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조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러나 자신과 정치철학이 전혀 다른 조 전 의원을 위해 서명을 하는 것을 보고 김 의원을 다시 보게 됐다. 이로부터 얼마 뒤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승리하자 그는 보수정권이 권력을 되찾았으니 이제 안심하고 정계를 떠나겠다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특히 이는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이 개인적인 노욕에 눈이 멀어 진보정치운동을 위기로 몰고 간 것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어 더욱 돋보였다.
계속 이어진 그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이념을 넘어서 인간의 격을 생각하게 했다. 그는 CEO대통령론을 주장하고 나선 이 대통령에게 국가는 기업이 아니고 대통령은 CEO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충고를 하고 나섰다.
지난 주 의원총회에서는 “지금 한나라당이 여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최근 한나라당에서 논의되고 있는 관리형 대표에 대해서도 이는 “과거 대통령이 당 총재를 할 때 이야기”이며 “지금 관리형 대표가 나와서 정권을 도와주고 견제할 수 있겠느냐”고 쓴 소리를 했다.
이념과 인격의 격이 같았으면
사실 386과 참여정부, 나아가 개혁세력과 진보운동이 죽을 쑨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같은 격의 결여 때문이다. 그 동안 사방에서 들렸던 것이 “싸가지가 없다”는 비판이었다. 또 손학규 통합민주당대표를 앞으로도 계속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낙인도 바로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그의 격 없는 정치행보다.
개혁세력과 진보진영이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 하나가 격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계를 떠나는 한 ‘골보수’ 정치인을 바라보면서 이념과 인간의 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 그 다음은 강준만을 글이다. 강준만은 지지의 입장이다. 

 

 '이념'과 '인격' 사이에서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노무현 대통령은 특유의 경박함으로 입만 열면 사고를 쳐오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시장의 입도 노 대통령 못지않다.…한 마디로, 언제 무슨 말을 해 사고를 칠지 모르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다.”
손호철 교수가 한국일보 2007년 2월 26일자 칼럼에서 한 말이다. 손 교수의 안목이 날카롭다. 대통령 리더십의 핵심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쇠고기 파동’에 관한 이야기는 홍수처럼 흘러 넘치니, 차분하게 ‘이념’과 ‘인격’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공적 활동만 옳은 ‘인간말종’들

손 교수의 칼럼을 하나 더 소개한다. 5월 26일자에 실린 손 교수의 칼럼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에 지지를 보내면서 그 취지를 좀더 발전시켜 볼까 한다. 공론화는 잘 되지 않고 있지만,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극소수 사람에게나마 ‘인간 말종’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공적으론 대단히 호평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누리고 있다. 아니 사적 영역에서도 그 나름의 장점이 많아 이 사람과 부딪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손 교수의 선배는 ‘인간 말종’이라는 평가를 낳게 할 만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고 일종의 공적 영역인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손 교수는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특정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것은 다 거짓이라는 입장이다.

얼른 보자면, 손 교수의 선배가 대국적이고 대범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바로 이런 생각이 그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공적 영역을 지배해 온 주류 정서이자 원리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작은’ 문제는 늘 ‘큰’ 문제에 압도 당한 채 그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지금도 수많은 정치ㆍ운동의 현장에서 다양한 주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이른바 ‘진영주의’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상대 진영의 내부 고발은 반기면서도, 우리 진영의 내부 고발은 금기시하는 것도 그런 논리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ㆍ운동이 늘 안으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상대편의 잘못에 의해 득세함으로써 ‘반작용의 악순환’ 게임을 벌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영주의 앞에서 도덕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정쟁(政爭)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주요 이유다. 진영의 지지와 열광은 가장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투사에게 돌아가게 돼 있다. 진영의 피를 끓게 만드는 데에 유능한 사람이 영웅이다. 그 사람도 자신의 진영이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있으므로, 인격 수양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인격은 막대한 공적 영역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인격과 도덕을 따지는 건 사치스럽다 못해 어리석은 일이었으리라. 일제의 가혹한 지배는 외면한 채 개인과 집단의 도덕을 강조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욕을 먹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독립도 하고 민주화도 이룬 오늘에까지 그런 ‘전통’이 아직 살아 있다는 점이다.

인격이 없더라도 이념이나 실적으로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사회 전체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고의 틀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일시적 성공을 거둘 수는 있어도 다음 단계에서 무너지고 만다. 이명박 식 실용주의의 함정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격’을 사소하고 사적인 것으로만 여겨온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격과 이념은 같이 가야 한다.

 

### 이어서 고종석의 글이다.

 

주제넘은 개입이다 싶어 잠자코 있으려 했으나, 입이 근질근질해 몇 자 적는다. 이 글은 5월26일자 손호철의 정치논평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와 그 글에 대한 긍정적 논평 격인 6월4일자 강준만 칼럼 <‘이념’과 ‘인격’ 사이에서>의 독후감이다.
우선 두 분의 논지에 내가 공감하고 있음을 밝혀야겠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므로 손 교수와 똑같이 말할 수는 없지만, 손 교수 발언에서 ‘진보적’을 좀 모호한 용어인 ‘리버럴’로 바꿔치기하면, 그의 말을 고스란히 되풀이할 수 있다.
곧 “나 자신은 리버럴하다고 생각하지만, 리버럴하면서도 인간이 안 되고 격이 없는 사람보다는 보수적이어도 인간이 되고 격을 갖춘 사람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진보적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것은 다 거짓”이라거나 “이념 못지않게, 아니 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클래스 내지 격”이라는 그의 말에도 공감한다.

이념과 윤리, 이념의 윤리
마찬가지로, “진영주의 앞에서 도덕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정쟁(政爭)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주요 이유”라는 강 교수의 진단에도, “인격은 막대한 공적 영역이므로 인격과 이념은 같이 가야 한다”는 그의 처방에도 공감한다.
이념에 앞서 ‘인격’이나 ‘인간’을 중시하는 두 분의 견해에 이렇게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개운치 않은 생각이 가슴에 얹힌다. 우선 특정한 사람의 ‘인격’은 누가 판단하는가? 나 자신을 두고도 어떤 사람들은 썩 형편없는 인간이라 판단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썩 괜찮은 사람이라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인격’의 판단에는 연고나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할 수도 있고, 심지어 ‘이념’이 개입할 수도 있다. 연고나 이해관계, 심지어 ‘이념’에서 독립된 ‘인격’을 추출해내는 것이 늘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대체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문제는 미묘하다. 예컨대 나는 소설가 복거일씨나 이문열씨와 두터운 친분은 없지만, 이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사람됨’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이 두 작가의 ‘인격’은 일반인 평균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몇몇 소설과 신문칼럼에서 드러나는 우승열패적 자유지상주의나, 보수를 넘어서 복고적, 봉건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념’에 화가 난다. 그리고 그 ‘이념’의 해악은 그들 ‘인격’의 넉넉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믿는다.
반면에 역시 나와는 친분이랄 게 거의 없지만, 주변에서 험담의 표적이 되고 있는 소설가도 있다. 그 험담들의 반만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는 평균 이하의 도덕성을 지닌 이다. 그러나 그의 몇몇 소설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 노릇을 해 왔다. 그와 이념을 달리 하는 이들도 그 작품들의 격은 인정한다.
이럴 때, 그 인격의 하찮음 때문에 작품의 격도 ‘거짓’으로 백안시해야 하는 걸까? 선뜻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은 적중률이 매우 낮은 격언이다. 사람에게는 제 글로 제 인격을 가릴 수 있는 ‘교활함의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격’이 ‘이념’보다 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적용의 한계 문제가 남는다. 나는 손 교수가 ‘이념’과 ‘인격’을 논하면서 김용갑씨를 예로 든 것은 적절치 않았다고 판단한다. 김용갑씨의 정계은퇴 선언 앞뒤로, 그의 ‘인격’을 기리는 갖가지 미담을 나 역시 접했다.
그러나 김용갑씨는, 이념이고 뭐고를 떠나서,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 기조실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이다. 반란-내란정권의 비밀경찰과 사정기관을 지휘했던 사람이, 제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리 넉넉한 ‘인격’을 발휘했다 해도, 나는 그에게 너그러울 수 없다.

 

### 다시 강준만의 글이다.

인격의 중요성을 역설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자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부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인격이 중요하다고 떠드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있으랴. 내 경우에도 그럴 위험이 다분하기에 매우 조심스럽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이 지난 주 <손호철과 강준만에 잇대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밝힌 ‘몇 가지 개운치 않은 생각’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같이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그 ‘생각’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씀 드려 볼까 한다.


■ 경계할 것은 이념의 절대 우위
특정한 사람의 ‘인격’은 누가 판단하는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어렵기 때문에 건너뛰자는 게 아니다. 인격을 누가 판단하건, 인격보다는 이념이 절대 우위에 있다고 보는 기존 통념을 의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 조직의 목표 실현을 앞둔 매우 급박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 조직의 지도자는 “해일이 이는데 조개 줍고 있다”며 그 사건을 묵살하려 하고, 그 조직에 몸 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대국적인 판단으로 간주해 그 사건의 은폐에 가담한다.
한국 정치와 운동의 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성격의 문제다. 극단적인 사례인지라 인격 판단의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겠지만, 큰 걸 위해 작은 건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평가하는 데엔 유효하리라 믿는다.
고 논설위원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격은 일반인 평균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건 동의하기 어렵다.
인격은 사교술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격은 주로 갈등관계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람됨’이 뛰어나다고 극찬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예컨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의 고향을 따져 물어 어떤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면, 이건 인격 파탄에 가까운 것이다.
고 논설위원은 ‘이념의 해악’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 해악은 ‘인격’의 넉넉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자신의 믿음을 털어 놓았다. 이건 논점을 좀 벗어난 말씀인 것 같다.
고 논설위원이 화를 내는 ‘이념’의 소유자들은 똑같이 고 논설위원의 ‘이념’에 화를 낼 것이다.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이런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느 이념이건 그 실천이 그 신봉자의 나쁜 인격에 의해 왜곡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옳으리라 본다.
소설가의 인격으로 그의 작품까지 평가해도 좋으냐는 의문도 논점을 벗어난 비약인 것 같다. 논점은 인격과 작품의 관계가 아니라, 작품만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그 소설가의 인격을 문인들의 술자리 가십으로만 소비하는 기존 풍토에 대한 평가다. 범죄행위거나 그에 가까운 인격적 일탈행위가 빈발했음에도 그걸 너그럽게 껴안는 것이 문인다운 도량이라고 생각하는 풍토는 바꿔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 인격이 되레 이념을 망친다면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건 많겠지만,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인격이 이념의 실천에 미치는 영향력에 주목해 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인격이 이념을 망친다. 이 세상이 꼭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여야만 한다고 믿는 야심가들의 아집과 탐욕은 수많은 분열과 파쟁을 낳지 않았는가.
한국은 ‘이념 과잉’의 사회다. ‘명분 중독증’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가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고 개탄했던 거나, 민세 안재홍이 “조선의 운동은 걸핏하면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열중 집착한다”고 탄식한 건 여전히 유효하다. 진짜 문제는 인격을 강조하는 게 정치적으로 잘 팔리는 상품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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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평가는 아마도 시위 문화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의식, 주권 의식의 확인일 것이다. 국민 주권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시민사회는 무엇으로 구성되고 유지되어야 할까 등등의 문제가 이전에는 단순하게 넘어갔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현실로 보니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국민 주권은 더더욱.... 홍기빈의 글을 옮긴다.

 

6월10일 ‘국민주권’의 날



▣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5월31일 시청 앞에 모인 10여만의 시민들은 드디어 청와대로 행진하기로 결정했다.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 다른 한 갈래는 소공동을 돌아 종각에서 경복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 갑자기 이들 눈앞에 텅 빈 하늘이 나타났다. 공사 중인 경복궁 담이 보였고 그 위에는 바로 북악산의 능선과 검은 밤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 600년이 넘도록 조선조의 궁궐, 일제의 총독부와 관저, 대한민국의 청와대 등 한반도에 군림하는 지배세력들이 복작거리는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신들을 깃들여왔던 공간이다. 그런데 시위대가 광화문 넘어 이 공간까지 진출한 것은 600년간 최초로 벌어진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600년간 고요하고 그윽하게 멈춰 있던 이 하늘 위로 시위대의 소리는 가차 없이 울려퍼진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우린 신비스런 존재가 아니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날 밤 우리 머릿속에서 몇 개인가의 매트릭스가 산산조각 깨져나가는 경험을 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2주간 한국 사회의 변화는 분명히 어딘가 전인미답의 지경으로 나아갔고, 이제 두 달 전의 세상과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직감은 우리의 머리 위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지금 움트고 있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역동성의 근본적 의미가 단지 ‘광우병 쇠고기가 싫다’ 하나만이라고 생각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600년간 편히 자고 있었을 북악산 산신과 그 앞자락의 지신을 두드려 깨운 지난 2주간의 꿈틀거림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드디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주권’의 담지자임을 스스로 깨닫고 선언한 사건이 아닐까. 물론 이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생겨난 지 몇백 년도 더 되었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 맨 앞을 장식하고 있으며, 심지어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나오는 진부한 명제다. 1968년 파리 혁명에서는 ‘쾌락의 해방을!’과 같은 새롭고 ‘섹시’한 구호가 나왔다. 그런데 2008년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국의 이 새로운 사태에서 전면에 등장한 구호는 기껏 이 심드렁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인 것이다.
이미 동학에서 3·1운동과 4·19혁명, 광주민중항쟁과 6월항쟁에 이르도록 사람들은 이 땅의 궁극적인 임자가 자신들임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에만 나타났던 움직임이었다. 물론 위험천만의 미국 쇠고기로 온 나라가 뒤범벅이 되는 것도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지만, 일제 강점, 대학살, 독재 타도와 같은 문제와는 그 규모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정도로 나라 전체가 크게 결딴이 나야만 비로소 소처럼 꾹 참고 묵묵히 살아오던 사람들이 성난 황소로 돌변해 나라를 엎어놓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아온 낯익은 패턴이었다. 그런데 세기가 바뀐 다음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빈도와 강도와 그 주제의 성격을 생각해보라. 2002년에는 미선이 효순이를 위한 촛불이 나왔고, 2004년에는 탄핵 반대 촛불이 나왔다. 그리고 2008년에는 다시 광우병 쇠고기를 두고서 수만 명이 밤과 낮을 이어가며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푸른 바닷속 깊이 모비딕 고래처럼 숨어 있다가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스런 존재가 아니다. 가엾은 여중생이 되었건, 발칙하기 짝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되었건, 무능하고 교활하고 폭력적인 정부가 되었건, 이 나라의 임자가 자신들이라는 자존심과 주인 의식을 건드리는 일이 벌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나오며 아무도 자신들을 통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1년 전과 지금의 외침

본래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그 ‘국민’이라는 행동의 주체가 구체적인 실체로서 나타나지 않는 한 추상적인 공염불이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원칙은 지난 200년간 이 추상적인 ‘국민’을 앞세워 오히려 지배세력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장치로까지 타락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말이 심드렁한 죽은 어구가 되어버린 바 있었다. 하지만 2008년 5월 한국에서는 ‘국민’의 실체가 낮밤을 이은 집단 행동으로서 현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6월10일에 100만 명이 모일지 몇 명이 모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21년 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나왔던 기껏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의 외침은 이제 ‘모든 권력은 우리로부터 나온다’로 변모했다. 그날 눈앞에 보일 머릿수가 얼마가 되었건, 6월10일은 우리 역사상 드디어 ‘국민주권’이 명실상부하게 북악산 앞자락으로 왕림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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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해서 꼭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 정중하게 거절하고, 매몰차게 떠나보내는 것이 그 사랑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다.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꼭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것인가.

 

로봇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현재는 감정 이해가‘바퀴벌레’ 수준이지만 기계적으로 알고리듬화할 수 있으면 가능해
▣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환경대재앙으로 인해 인간들이 지구를 떠나버린 뒤 지구에 홀로 남겨진 로봇 ‘월·E’. 그는 700년 동안 묵묵히 지구를 청소하며 지내다 문득 ‘인격’을 얻게 된다. 덕분에 호기심과 고독을 느낄 수 있게 된 월·E는 인간들이 탑승한 거대 우주선 엑시엄의 파견 탐사로봇 이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월·E의 감정표현을 이해 못하는 이브는 지구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열쇠가 월·E에게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우주선으로 급히 귀환하고, 그 뒤를 월·E가 쫓아 나서면서 은하계를 누비는 로봇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 윌·E(오른쪽)는 ‘700년 동안의 고독’ 끝에 감정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영화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서서히 ‘아니요’에서 ‘예’로 바뀌고 있다.(한국 소니픽쳐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주)제공)
2008년 여름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윌·E〉는 로봇공학의 오랜 숙제인 “과연 로봇은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도전한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이나 〈A.I.〉가 그렇듯, 이 영화도 언젠가 로봇은 의식이란 걸 가지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오직 ‘영화를 볼 때만’ 이 가정에 너그럽다.

 

 

 

 



누가 로봇과 사랑하고 싶겠냐고?

5년 전만 해도 “과연 로봇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절대다수는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최근 로봇공학자들이나 인지신경과학자들은 로봇의 사랑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카이스트에서 내 사랑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절대다수는 “로봇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고 대답한다(물론 카이스트 학생들이라서 이런 유물론적인 대답을 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것은 최근 들어 급속히 진행되는 ‘감정을 가진 로봇 개발’의 진척과 ‘사랑에 대한 뇌과학’의 성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듯싶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놔두고 왜 로봇을 사랑하겠느냐고? 로봇과 사랑에 빠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천만의 말씀! 앞으로 로봇은 10년 내에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가정의 동반자나 학교와 병원의 도우미로 가까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로봇이 인간과 공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외형이나 목소리를 흉내내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감정을 읽고 감정을 나누는 능력이 필요하다. 로봇의 ‘공감 능력’은 어쩌면 학습이나 기억 능력보다 로봇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인간형 로봇 ‘아시모’나 ‘휴보’는 자연스레 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들의 뇌는 거의 비어 있다. 그들이 쥐 수준의 뇌만 가져도 사회적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로봇공학자들은 감정을 읽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심지어 인간처럼 느끼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물론 로봇이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준은 현재 딱 ‘바퀴벌레’다. 사람처럼 스스로 복잡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다양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만족할 만한 수준이란 얘기다. 얼마 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과 컴퓨터공학과 교수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휴머노이드 로봇 ‘넥시’를 선보인 바 있다. 넥시는 다양한 얼굴 표정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비록 상황에 맞춰 알고리듬적으로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것이지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과 대화를 하거나 명령을 따를 때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얼굴 표정을 지으며 공감을 표현하는 로봇들이 부쩍 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개발된 원격 진료 로봇 ‘RP-7’는 의사 얼굴이 담긴 모니터와 카메라가 탑재된 바퀴형 이동 로봇으로, 병원을 돌며 환자에게 다가가 진료를 하기도 하고 질병을 진단하기도 한다. 이 로봇은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듯 모니터가 끄덕이며 환자의 질문에 반응해, 환자는 의사에게 직접 진료를 받는 느낌을 얻게 된다. 이런 작은 표현이 로봇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로봇공학자들은 로봇에게 감정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아직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알고리듬적으로 감정 표현을 할 뿐이지만 조만간 실제로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다. 영화 <아이, 로봇>에 나오는 ‘의식 있는 로봇’처럼 말이다.

영혼이 없어도 감정은 있다

‘로봇도 의식을 갖게 될 것이며 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과학자로, 미래전문가이자 문명비평가인 한스 모라벡 박사가 있다. 그는 로봇의 기억과 학습 능력, 주의집중 능력은 인간을 능가한 지 오래며, 조만간 그들이 의식과 감정을 갖게 될 것이며, 2030년 이전에 인간은 그들에게 지배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자신의 저서 <마음의 아이들>(1988)에서 처음 이런 주장을 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의 주장이 ‘근거 없이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로봇의 머릿속에서 감정을 어떻게 생성해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며, 심지어 인간의 대뇌가 어떻게 감정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이센테니얼 맨’처럼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로봇을 기대하는 것은 오직 영화 속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로봇공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 중에선 ‘감정도 기계적으로 알고리듬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인간의 감정이 대뇌에서 편도핵을 중심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됐는데(물론 아직도 멀었다!), 만약 언젠가 그 실체가 밝혀진다면 감정의 생물학적 토대를 그대로 컴퓨터 회로에 구현하는 일은 원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신경전달물질은 전기신호로, 시냅스와 세포체는 작은 집적회로(IC)로 구현하는 일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영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도 사랑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이다(지난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사랑은 오히려 ‘감정’이라기보다는 ‘욕구’에 가까워서 더 구현하기 쉽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믿음’ 수준이지만.
만약 내게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질 날을 점쳐보라면 ‘2030년 이전엔 어렵다’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이미 미국에선 ‘섹스 토이’가 판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섬세한 것이어서 매우 정교한 행동과 감정 표현을 요구한다. 로봇의 감정 표현 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떨어지면 보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으며 섹스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로봇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만큼 ‘엄청난 도전’이 될 것이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을 이뤄내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니, 언젠가는 로빈 윌리엄스만큼 매력적인 로봇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의 사랑을 책임질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과연 인간은 로봇이 느낄 사랑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제목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지만 실제로는 ‘인공감정’(Artificial Emotion)을 주된 모티브로 다룬 영화 〈A.I.〉는 첫 장면에서 관객에게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외롭고 심심해서 자신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을 만들게 된다면(이 영화에선 ‘메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면, 언제든지 숲에 버리거나 폐기처분해도 될까? 로봇에겐 사랑의 상처를 줘도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단언하건대, 우리는 2050년 어느 날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이 주제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로봇과 인간의 공생은 오랫동안 우리의 화두가 될 것이다. 물론 그날의 사회자는 손석희 교수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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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글이다. 예술의 종말을 헤겔이 역사의 종말을 자유로 규정하는 것과 유사하게 자유로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로웠는데 역사 시대로 진입하여 자유롭지 못하며 구속받게 된다. 사회적 구속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 상태로의 자유를 쟁취하는 목적을 가진다. 이것은 완전하게 필론의 돼지가 아닌가.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예술의 종말’에 대한 아서 단토의 답…자유의 확장,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

▣ 로쟈 인터넷 서평꾼 http://blog.aladin.co.kr/mramor

‘예술의 종말’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거 뭐 유행 아닌가? (근대)문학, 철학, 역사 가릴 것 없이 떼로 종말을 고했다고 하는데, 예술이 끝났다는 게 굳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더 구체적인 질문을 재차 드린다. 예술은 언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그 종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너무 과한 질문인가? 얼핏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나름의 예술관과 예술철학으로 무장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에 따르면, 너무도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함께 상자 하나만 잘 기억해두면 된다. 비누 상자다.
‘예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아트’(Art)가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미술’을 뜻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술의 종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64년의 한 전시회에서다. 그는 당시 미국 뉴욕 이스트 74번가의, 마치 재고품 창고 같은 모양새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슈퍼마켓에서나 진열돼 있을 법한 ‘브릴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미적 혐오감을 넘어서는 철학적 흥분을 느낀다(‘브릴로’는 청소용 세제의 브랜드다. 이 비누 상자 옆방에는 켈로그 상자들도 쌓여 있었단다).
물론 워홀이 슈퍼마켓에서 이 상자들을 사다가 미술관으로 그냥 옮겨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상자들은 그가 브릴로 상자를 모방해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즉, 진짜 브릴로 상자는 골판지로 만들어졌지만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재질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똑같은 두 종류의 상자가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상품 상자로서의 브릴로 상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홀의 팝아트 작품으로서의 브릴로 상자. 하지만 이 두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흔히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는 ‘보면 안다’고 말하지만 이 경우엔 ‘봐도 모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미술이 시각(눈)의 문제에서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술은 더 이상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따져보자. 똑같아 보이는 두 상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는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되는가?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단토가 내놓은 대답이 ‘예술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1965년에 발표한 ‘예술계’란 논문과 1981년에 출간되고 최근 번역돼 나온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펴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면 거기서 예술의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소식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국내에는 단토가 1995년에 이 문제를 다시금 총정리해서 내놓은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펴냄·2004)가 먼저 소개됐다.
이 책에서 단토는 헤겔주의자로서 예술의 종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중대한 목적을 갖는다. 곧 자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에 도달하게 되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그것은 달리 역사의 완성이기도 하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다면 예술은 종말에 이른다. 예술의 민주주의가 곧 예술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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