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흥미있는 논쟁이 일어났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것도 뭔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어야할 문제일 듯도 하다. 혹은 논제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은 아닐까. 이념과 인격이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다. 인격만을 논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사회적 문제를 희석시키는 매우 보수주의적인 태도이지만, 그래도 인격이란 품격 혹은 인간의 유형으로 중국 전통에서는 知人의 문제였다. 바로 지인의 문제가 나의 관심사다.

몇 개의 글을 옮겨 놓는다.

 

 

 

 

 

 #### 손호철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가 이 논쟁을 먼저 일으킨 글이다.

 평소 아주 좋아하는 선배교수가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생각이 같은데 단 하나 인간에 대한 철학이 달랐다. 특히 한 후배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운동으로 잘 나가고 있는 한 후배교수였다. 그는 평소 삶의 방식에서 너무 문제를 많이 일으켜 주변사람들이 매우 싫어했다. 나 역시 그와 아주 좋지 않은 경험을 한 뒤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해 상대도 안 하고 있다.
그러나 선배의 경우 그가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고 일종의 공적 영역인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진보적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것은 다 거짓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건 ‘싸가지’
요즈음 바로 이 이념과 인간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념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아니 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클래스 내지 격이라는 생각이다. 한 마디로, 나는 “나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보적이지만 인간이 안 되고 격이 없는 사람보다는 보수적이어도 인간이 되고 격을 갖춘 사람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최근 이 같은 생각을 더욱 갖게 된다. 그 같은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대표적인 ‘극우’ 내지 냉전적 보수 정치인인 김용갑 의원이다.
사실 그의 냉전적인 정치행태와 관련해 나는 평소 그를 매우 싫어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시 민주노동당의 두 명에 불과한 지역구의원 중 한 명이었던 조승수 의원을 위한 서명에 김 의원이 서명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조 전 의원이 주민들에게 불려가 음식물 쓰레기처리장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민들에게 몇 마디 답을 한 것이 사전선거운동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명으로 기소를 당하자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서명을 한 것이다. 결국 이 서명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조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러나 자신과 정치철학이 전혀 다른 조 전 의원을 위해 서명을 하는 것을 보고 김 의원을 다시 보게 됐다. 이로부터 얼마 뒤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승리하자 그는 보수정권이 권력을 되찾았으니 이제 안심하고 정계를 떠나겠다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특히 이는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이 개인적인 노욕에 눈이 멀어 진보정치운동을 위기로 몰고 간 것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어 더욱 돋보였다.
계속 이어진 그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이념을 넘어서 인간의 격을 생각하게 했다. 그는 CEO대통령론을 주장하고 나선 이 대통령에게 국가는 기업이 아니고 대통령은 CEO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충고를 하고 나섰다.
지난 주 의원총회에서는 “지금 한나라당이 여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최근 한나라당에서 논의되고 있는 관리형 대표에 대해서도 이는 “과거 대통령이 당 총재를 할 때 이야기”이며 “지금 관리형 대표가 나와서 정권을 도와주고 견제할 수 있겠느냐”고 쓴 소리를 했다.
이념과 인격의 격이 같았으면
사실 386과 참여정부, 나아가 개혁세력과 진보운동이 죽을 쑨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같은 격의 결여 때문이다. 그 동안 사방에서 들렸던 것이 “싸가지가 없다”는 비판이었다. 또 손학규 통합민주당대표를 앞으로도 계속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낙인도 바로 지난 대선에서 보여준 그의 격 없는 정치행보다.
개혁세력과 진보진영이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 하나가 격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계를 떠나는 한 ‘골보수’ 정치인을 바라보면서 이념과 인간의 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 그 다음은 강준만을 글이다. 강준만은 지지의 입장이다. 

 

 '이념'과 '인격' 사이에서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노무현 대통령은 특유의 경박함으로 입만 열면 사고를 쳐오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시장의 입도 노 대통령 못지않다.…한 마디로, 언제 무슨 말을 해 사고를 칠지 모르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다.”
손호철 교수가 한국일보 2007년 2월 26일자 칼럼에서 한 말이다. 손 교수의 안목이 날카롭다. 대통령 리더십의 핵심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쇠고기 파동’에 관한 이야기는 홍수처럼 흘러 넘치니, 차분하게 ‘이념’과 ‘인격’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공적 활동만 옳은 ‘인간말종’들

손 교수의 칼럼을 하나 더 소개한다. 5월 26일자에 실린 손 교수의 칼럼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에 지지를 보내면서 그 취지를 좀더 발전시켜 볼까 한다. 공론화는 잘 되지 않고 있지만,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극소수 사람에게나마 ‘인간 말종’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공적으론 대단히 호평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누리고 있다. 아니 사적 영역에서도 그 나름의 장점이 많아 이 사람과 부딪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손 교수의 선배는 ‘인간 말종’이라는 평가를 낳게 할 만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고 일종의 공적 영역인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손 교수는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특정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것은 다 거짓이라는 입장이다.

얼른 보자면, 손 교수의 선배가 대국적이고 대범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바로 이런 생각이 그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공적 영역을 지배해 온 주류 정서이자 원리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작은’ 문제는 늘 ‘큰’ 문제에 압도 당한 채 그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지금도 수많은 정치ㆍ운동의 현장에서 다양한 주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이른바 ‘진영주의’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상대 진영의 내부 고발은 반기면서도, 우리 진영의 내부 고발은 금기시하는 것도 그런 논리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ㆍ운동이 늘 안으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상대편의 잘못에 의해 득세함으로써 ‘반작용의 악순환’ 게임을 벌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영주의 앞에서 도덕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정쟁(政爭)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주요 이유다. 진영의 지지와 열광은 가장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투사에게 돌아가게 돼 있다. 진영의 피를 끓게 만드는 데에 유능한 사람이 영웅이다. 그 사람도 자신의 진영이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있으므로, 인격 수양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인격은 막대한 공적 영역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인격과 도덕을 따지는 건 사치스럽다 못해 어리석은 일이었으리라. 일제의 가혹한 지배는 외면한 채 개인과 집단의 도덕을 강조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욕을 먹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독립도 하고 민주화도 이룬 오늘에까지 그런 ‘전통’이 아직 살아 있다는 점이다.

인격이 없더라도 이념이나 실적으로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사회 전체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고의 틀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일시적 성공을 거둘 수는 있어도 다음 단계에서 무너지고 만다. 이명박 식 실용주의의 함정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격’을 사소하고 사적인 것으로만 여겨온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격과 이념은 같이 가야 한다.

 

### 이어서 고종석의 글이다.

 

주제넘은 개입이다 싶어 잠자코 있으려 했으나, 입이 근질근질해 몇 자 적는다. 이 글은 5월26일자 손호철의 정치논평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와 그 글에 대한 긍정적 논평 격인 6월4일자 강준만 칼럼 <‘이념’과 ‘인격’ 사이에서>의 독후감이다.
우선 두 분의 논지에 내가 공감하고 있음을 밝혀야겠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므로 손 교수와 똑같이 말할 수는 없지만, 손 교수 발언에서 ‘진보적’을 좀 모호한 용어인 ‘리버럴’로 바꿔치기하면, 그의 말을 고스란히 되풀이할 수 있다.
곧 “나 자신은 리버럴하다고 생각하지만, 리버럴하면서도 인간이 안 되고 격이 없는 사람보다는 보수적이어도 인간이 되고 격을 갖춘 사람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진보적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 보아야 그것은 다 거짓”이라거나 “이념 못지않게, 아니 이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클래스 내지 격”이라는 그의 말에도 공감한다.

이념과 윤리, 이념의 윤리
마찬가지로, “진영주의 앞에서 도덕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정쟁(政爭)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주요 이유”라는 강 교수의 진단에도, “인격은 막대한 공적 영역이므로 인격과 이념은 같이 가야 한다”는 그의 처방에도 공감한다.
이념에 앞서 ‘인격’이나 ‘인간’을 중시하는 두 분의 견해에 이렇게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개운치 않은 생각이 가슴에 얹힌다. 우선 특정한 사람의 ‘인격’은 누가 판단하는가? 나 자신을 두고도 어떤 사람들은 썩 형편없는 인간이라 판단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썩 괜찮은 사람이라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인격’의 판단에는 연고나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할 수도 있고, 심지어 ‘이념’이 개입할 수도 있다. 연고나 이해관계, 심지어 ‘이념’에서 독립된 ‘인격’을 추출해내는 것이 늘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대체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문제는 미묘하다. 예컨대 나는 소설가 복거일씨나 이문열씨와 두터운 친분은 없지만, 이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사람됨’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이 두 작가의 ‘인격’은 일반인 평균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몇몇 소설과 신문칼럼에서 드러나는 우승열패적 자유지상주의나, 보수를 넘어서 복고적, 봉건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념’에 화가 난다. 그리고 그 ‘이념’의 해악은 그들 ‘인격’의 넉넉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믿는다.
반면에 역시 나와는 친분이랄 게 거의 없지만, 주변에서 험담의 표적이 되고 있는 소설가도 있다. 그 험담들의 반만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는 평균 이하의 도덕성을 지닌 이다. 그러나 그의 몇몇 소설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 노릇을 해 왔다. 그와 이념을 달리 하는 이들도 그 작품들의 격은 인정한다.
이럴 때, 그 인격의 하찮음 때문에 작품의 격도 ‘거짓’으로 백안시해야 하는 걸까? 선뜻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은 적중률이 매우 낮은 격언이다. 사람에게는 제 글로 제 인격을 가릴 수 있는 ‘교활함의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인격’이 ‘이념’보다 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적용의 한계 문제가 남는다. 나는 손 교수가 ‘이념’과 ‘인격’을 논하면서 김용갑씨를 예로 든 것은 적절치 않았다고 판단한다. 김용갑씨의 정계은퇴 선언 앞뒤로, 그의 ‘인격’을 기리는 갖가지 미담을 나 역시 접했다.
그러나 김용갑씨는, 이념이고 뭐고를 떠나서,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 기조실장과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이다. 반란-내란정권의 비밀경찰과 사정기관을 지휘했던 사람이, 제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리 넉넉한 ‘인격’을 발휘했다 해도, 나는 그에게 너그러울 수 없다.

 

### 다시 강준만의 글이다.

인격의 중요성을 역설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자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부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인격이 중요하다고 떠드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있으랴. 내 경우에도 그럴 위험이 다분하기에 매우 조심스럽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이 지난 주 <손호철과 강준만에 잇대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밝힌 ‘몇 가지 개운치 않은 생각’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같이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그 ‘생각’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씀 드려 볼까 한다.


■ 경계할 것은 이념의 절대 우위
특정한 사람의 ‘인격’은 누가 판단하는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어렵기 때문에 건너뛰자는 게 아니다. 인격을 누가 판단하건, 인격보다는 이념이 절대 우위에 있다고 보는 기존 통념을 의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 조직의 목표 실현을 앞둔 매우 급박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 조직의 지도자는 “해일이 이는데 조개 줍고 있다”며 그 사건을 묵살하려 하고, 그 조직에 몸 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대국적인 판단으로 간주해 그 사건의 은폐에 가담한다.
한국 정치와 운동의 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성격의 문제다. 극단적인 사례인지라 인격 판단의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겠지만, 큰 걸 위해 작은 건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평가하는 데엔 유효하리라 믿는다.
고 논설위원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격은 일반인 평균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건 동의하기 어렵다.
인격은 사교술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격은 주로 갈등관계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람됨’이 뛰어나다고 극찬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예컨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의 고향을 따져 물어 어떤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면, 이건 인격 파탄에 가까운 것이다.
고 논설위원은 ‘이념의 해악’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 해악은 ‘인격’의 넉넉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자신의 믿음을 털어 놓았다. 이건 논점을 좀 벗어난 말씀인 것 같다.
고 논설위원이 화를 내는 ‘이념’의 소유자들은 똑같이 고 논설위원의 ‘이념’에 화를 낼 것이다.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이런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느 이념이건 그 실천이 그 신봉자의 나쁜 인격에 의해 왜곡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옳으리라 본다.
소설가의 인격으로 그의 작품까지 평가해도 좋으냐는 의문도 논점을 벗어난 비약인 것 같다. 논점은 인격과 작품의 관계가 아니라, 작품만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그 소설가의 인격을 문인들의 술자리 가십으로만 소비하는 기존 풍토에 대한 평가다. 범죄행위거나 그에 가까운 인격적 일탈행위가 빈발했음에도 그걸 너그럽게 껴안는 것이 문인다운 도량이라고 생각하는 풍토는 바꿔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 인격이 되레 이념을 망친다면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건 많겠지만,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인격이 이념의 실천에 미치는 영향력에 주목해 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인격이 이념을 망친다. 이 세상이 꼭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여야만 한다고 믿는 야심가들의 아집과 탐욕은 수많은 분열과 파쟁을 낳지 않았는가.
한국은 ‘이념 과잉’의 사회다. ‘명분 중독증’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가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고 개탄했던 거나, 민세 안재홍이 “조선의 운동은 걸핏하면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열중 집착한다”고 탄식한 건 여전히 유효하다. 진짜 문제는 인격을 강조하는 게 정치적으로 잘 팔리는 상품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