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혹은 정치학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하겠다. 그런 와중에 주목되는 사람이 있었다.

“시민사회에 힘 행사 땐 권위주의
한국 사회 자발적 에너지 감동”


제프리 알렉산더 미국 예일대 교수는 ‘신기능주의’를 주창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사회 체제의 조화·균형에 주목한 파슨스와 머튼의 구조기능주의 등을 비판하면서 행위자의 의지가 사회변동에 끼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기능주의 또는 구조기능주의가 외면했던 사회 갈등의 요소를 주목했다. 그가 쓴 <현대사회 이론의 흐름>은 국내 사회학 강의에 단골로 등장하는 입문 교재다.


 

 

 

 

그가 지난달 30일 오후,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권력, 정치, 그리고 시민 영역’을 주제로 강연했다. 한국이론사회학회가 후원하고 연세대·고려대 사회학과가 공동주최하는 자리였다. 시민사회를 ‘시빌 스피어’(Civil Sphere)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온 그는 이날 강연에서 “현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워 엘리트’와 시민사회의 관계”라고 말했다.

“나라에 따라 그 사회를 지배하는 파워 엘리트가 자본가일 수도, 지식인일 수도, 군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회의 파워 엘리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 파워 엘리트에 대항하는 시민사회가 존재하느냐, 그리고 파워 엘리트는 그런 시민사회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현대 정치권력은 시민사회를 설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교수들은 파워 엘리트죠. 대학에서는 그들도 권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넘어 공공의 권력을 행사하려면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정치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렉산더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권력의 중요한 원천인 것은 맞지만, 권력의 모든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일단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시민사회에 대한 설득과 동의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차이는 권력이 시민사회를 향해 힘을 사용하는지 설득을 시도하는지에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대단히 자발적인 한국 시민사회의 에너지에 감동 받았다”며 “종교적 상징인 촛불과 순수의 상징인 10대 소녀가 만나 이 운동을 촉발했다는 것은 매우 환상적이고도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좋은 사회는 조용한 사회가 아니라 스캔들이 많은 사회”라며 “모든 사회에는 부정과 부패가 있는데, 그것이 지속적으로 밝혀져서 시민들이 이에 반응하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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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랑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번째 주목할 만한 주제는 바로 즐거움이다. 이것은 평소 나의 관심거리였는데 박노자의 컬럼을 읽고 구체적으로 기획해 보아야 겠다는 판단이다. 흠흠

한겨레에 실린 박노자의 글이다. 한국인은 일상에서 억눌림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적 영역에서의 억압과 억눌림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억압과 억눌림을 어떻게 해소하고 해방할 것인가. 이제 해방이라는 문제는 일상에서의 해방이며 일상에서의 혁명을 논의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 영역과 분리될 수가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거대 담론으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소소한 문제에 대한 해방적 담론이다. 그리고 지향점은 즐거움과 명랑이다. 우석훈이 명랑을 주장하는 것도 탁견이다. 난 명랑이라는 단어보다는 농담과 유머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음.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지켜본 노르웨이 학계 동료들은 필자에게 “쇠고기 문제로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집회를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필자는 내심 당황하곤 한다. 대통령 취임 100일 만에 “재협상”과 함께 벌써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이유를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기란 고난도 과제이기 때문이다.

미 제국의 군사적 보호령 위치에 있는 나라의, 오래전부터 자존심에 수도 없는 상처를 입어온 시민의 처지에서 굴욕 협상은 마지막 자존감까지 짓밟는 듯한 행위였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과연 이해시키기가 쉽겠는가? 거기다 아직도 주요 대기업의 대주주로 국가가 남아 있고, 모두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국가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노르웨이와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대운하’나 ‘학교 우열반’, ‘영어 몰입교육’ 같은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용어들이다. 이런 망상적 프로젝트를 시행하겠다는 사람이 최고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들로서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그러나 필자의 동료들에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필자가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의 억압적이고 답답한 일상은, 그들로 하여금 광장에 나가 ‘갈아보자’를 목청껏 외치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이야기한 대목이다. “아니! 휴대폰, 자동차를 만들어서 파는 나라에서 삶이 뭐가 그토록 답답한가?”고 반문한다. 유럽 남부 국가 수준인 한국의 일인당 소득을 생각해 보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다. 한국인의 일상 코드는 무엇보다 ‘억눌림’이다.

종교적 도덕률을 타율적으로 익히는 전근대의 학교와 달리 근대학교는 원칙상 즐거워야 한다. 코메니우스(1592∼1670)와 로크(1632∼1704) 이후, ‘흥미 유발’과 ‘자율적 관심 유발’ 등은 근대교육의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한국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즐거움’을 느낄까? 최근의 한 조사에서, “공부에 흥미를 느낀다”고 응답한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생은 18%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수치가 영국에서는 48%나 된다. 자신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간다고 답한 아이는 20%도 되지 못했다.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는 분위기’보다는 강제적인 ‘학습 노동’에 동원되고, 코메니우스나 로크가 일찍이 반대해 왔던 체벌과 살인적인 상호 경쟁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때, 그 효과와 결과는 무엇일까? 과로사 위험이 매우 높은 ‘한국적’인 고강도, 장시간의 노동에 종사할 미래의 기업 머슴은 그렇게 일찌감치 단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모르지만, 일면으로 그런 일상에서 심리적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학교라는 이름을 내건 고문실에서 고문의 강도를 더욱 높이겠다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자 학생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생뿐인가? 한국 월급쟁이들의 직장 만족도 역시 한국과 비교 가능한 산업국가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근로자들은 민주적 소통과 존중, 안정성을 원하지만, 군부대 또는 착취 공장을 모델로 하는 기업들이 그것을 만족시켜 줄 리가 없다. 즐거워야 할 노동은 저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친 소’가 도화선이 됐지만 우리들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보다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최근 대한민국의 고질병이다. 일터와 배움터의 민주화, 모든 위계질서들의 파괴, 재벌과 관벌에 대한 시민의 승리 없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갑갑한 ‘감옥’을 즐거움을 느끼며 살 만한 편안한 ‘가옥’으로 개조할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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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노동을 함께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은 참 괜찮은 시각이다.

 

사랑을 위한 노동을 하되 사랑은 하지 말라?

[사랑공부 : 사랑의 사회적 존재론] ①사랑과 노동

 [연세대학원신문 159호] 이브를 유혹한 대가로 땅을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되는 저주를 받은 뱀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흙을 파먹다 지친 그는 그리스 신화시대에 이르러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에 앉아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세이렌으로 환생한다. 유혹의 기술이 업그레이드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만약 선악과를 먹는다면…”이라는 가정법 형태의 거짓말은 버린 지 이미 오래. 뱀/세이렌은 이제 스스로 선악과가 된다. 응시가 닿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선악과가 아니라, 주체의 의지적 지각없이도 감각기관을 자극할 수 있는 고성능 무기. ‘노래’를 부르는 능동적인 선악과가 된 것. 그리하여 세이렌이 노래를 부르면 선원들은 노동을 하던 손을 멈추고 황홀경 속에서 넋을 잃은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1940년대 초반의 중국, 영화 <색․계>는 보다 복잡하고도 난감한 상황에 처한 시대적 세이렌을 조명한다. 여주인공인 왕치아즈가 항일 운동 연극 단체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연극팀을 이끄는 왕리홍을 사랑하기 때문. 전쟁에서 형을 잃은 원한을 항일 운동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가 상정하는 사랑의 출발점은 임무의 완성―친일 세력의 선봉장인 이대장의 암살―이후에 놓여 있다. 그는 그녀에게 생을 건 연극판을 제안하고 그녀는 그를 위해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주어진 노동은 막부인이 되어 이대장을 유혹하고 암살의 순간으로 그를 유인하는 것. 이 유혹의 노동에 필연적인 금지 조건 하나가 뒤따른다. 그를 유혹하되 그를 사랑하지 말라.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막부인의 옷을 입었을 뿐 옷 안의 육체는 왕리홍을 욕망하는 왕치아즈가 아닌가. 그러나 ‘하지 말라’는 명령은 언제나 ‘하라’는 명령의 강조형처럼 들린다. 이브와 판도라의 후손인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녀를 안쓰러워하는 왕리홍 옆에서, 국가와 당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암살단의 당수 앞에서, 그녀는 절망 섞인 울분을 토한다. “그는 뱀처럼 내 몸을, 내 마음을 파고들어요… 이러다가 내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될까봐 두렵다구요!” 그러나, 그녀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 건 과연 구시대적 유혹의 총수, 뱀의 형상을 갖춘 그일까?

이대장은 그녀를 일본식 유곽으로 불러낸다. 거기서 그녀는 세이렌의 본분을 잊지 않고 그를 위해 유혹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의 가사가 심상치 않다. 어린 청춘들이 겪는 사랑의 아픔을 호소하며 ‘당신’ 곁에 영원히 남아있기를 소망하는,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노동에 충실히 임하고 있는 왕치아즈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녀의 노래가 끝난 후 눈물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맺히는 순간. 우리는 노래 가사 속 그녀의 ‘당신’이 왕리홍에서 이대장으로 바뀌어버렸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왕치아즈이고, 사랑을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은 연극 속 막부인이지만 어느 순간 막부인의 옷은 그녀의 육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연극 무대에 올라 열연을 펼치던 그녀는 그만 객석이 무대가, 무대가 현실로 뒤바뀌어 버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불행한 역전의 기로에 그녀가 부른 ‘노래’가 위치한다. 세이렌은 더러운 노동을 이어가는 손을 파멸시키기 위해 유혹의 노래를 부르지만, 노래가 세이렌의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그것은 그 자체로 유혹이 되어 그녀의 입을 막고 그녀의 노동을 중지시킨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는 더 이상 이브의 응시를, 그녀의 입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의 응시는 그녀의 응시 이전에 이미 그녀에 닿아있고, 그녀가 입을 열어 그것을 깨물기 전에 그것은 이미 입을 벌리고 있다. 선악과는 더 이상 뱀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에게 가해진 형벌은 노동 자체에 있지 않다. 사랑을 위한 노동에는 일종의 성스러움이 묻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유한성에 놓여 있는 것 아닐까. “내 그대를 위해 손에 흙을 묻히고 엉겅퀴가 돋아난 땅을 경작하며 평생을 살겠소.” 아담은 위대하다. 그러나 질투쟁이 신이 그 꼴을 곱게 봐줄리 없다. “네가 사랑하는 여인은 곧 늙고 추해지리니 사랑은 가고 노동의 무게만이 고스란히 네 어깨에 지워지리라.”

왕치아즈가 그녀의 소원대로 이대장의 아내가 되어 그와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면 그들의 사랑은 죽는 날까지 지속되었을까? 그녀는 필시 이대장의 아내가 그에게 들었던 말 ― “(내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당신은 그냥 내려가서 노시오” ―을 똑같이 들으며 또 다른 연극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죽음이냐, 노동/삶이냐, 이것이 선택의 무게로 다가올 때 사랑 편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한 왕치아즈의 선택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그녀가 처한 시대적 배경, 사랑과 노동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못하고 서로 다른 극단에 놓일 수밖에 없는 불행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는 신에게, 이렇듯 숭고한 선택의 상황이 오리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정옥 / 연세대 비교문학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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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신문에 연재되는 글인데 담비에 실린 모양이다. 처음부터 모아본다.

[사랑공부 : 사랑의 사회적 존재론] ①사랑과 노동

 선택의 노동으로서 사랑

『실락원』의 사건과 함께 인간의 노동이 시작되었는가? 기원전 10세기경(또는 그 이전)에 씌어진 유태인의 경정 <창세기>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결정적인 범죄를 저지른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려하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는 없는 터.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공범자 ‘아담’에게도 중형이 내려진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와중에 ‘사랑’, 인간 남녀의 사랑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까? 애초부터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 보인다. <창세기>는 야훼가 여자를 일방적으로 창조해준 것으로 쓰고 있으니 아담이 여자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여자’가 먼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는 사건 기록에서, 둘의 관계가 애정에 기초한 것인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범죄행위의 동기가 애정과 관계있는 것인지에 대한 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건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입덧과 산고를 겪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 처지로 전락한 단계에서 둘 사이에 애정이 있었는지, 텍스트는 말이 없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둘이 “동침”한 결과(이러한 ‘동침’에 ‘사랑’이 개입했다는 가정은 그야말로 가정에 불과하다.) 생겨난 두 아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경쟁과 살인이 묘사된다. 이 최초 가정의 파탄과 ‘사랑’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노동’에 비해 ‘사랑’, 특히 우리가 ‘사랑’하면 떠올리는 남녀 간의 동반자적, 상호의존적 사랑은 그 연배가 한참 아래이다. 고대 지중해 문명에서 ‘에로스’에 대한 탐닉이 큰 몫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사랑’보다는 ‘동침’에 더 가까운 육체적 욕망의 세계이다.

물론 ‘노동’도 이전 시대의 노동과 근대의 노동이 같지 않다. “종신토록 수고하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경제적 가치 창출, 소유권과 잉여를 추구하는 행위로 그 의미가 바뀌던 17세기 영국. 왕을 처형하고 ‘거룩한 공화국’을 세우는데 진력하던 혁명가 존 밀튼은 엉뚱하게도 <창세기>의 실낙원 이야기를 다시 쓴다. 혁명이 실패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 착수해서, 왕정복고의 패배를 맛보며 『실낙원』을 완성한다.

태어난 배경이 이러하니 이 작품에서 창조주에 대한 사탄의 봉기라는 정치적 사건이 큰 몫을 차지한다. 혁명을 선동하고, 패배 후에 다시 세력을 규합, 새로운 반격 작전에 들어가 이브에 대한 ‘심리전’을 펼치는 등의 사탄의 ‘노동’은 ‘사랑'이 아니라 ’원한‘으로 충전돼 있다.

아담은 어떠한가? 바로 이 대목에서 근대주의자 밀튼은 아담의 공범행위에 근대적 ‘사랑’을 결정적으로 개입시키므로, 고대 유태인의 신화를 근대적, 동반자적 남녀관계의 신화로 전환시킨다.


밀튼의 이브는 누구인가. 아담이 낙원의 적적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며 창조주에게 떼써서 얻어낸, 애지중지하는 배필이 아니던가. 천사들이 그간 수차례 경고하고 교육시킨 덕에 사탄의 존재와 그의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아담. 잠시 이브를 혼자 놔 둔 사이에 사건이 터지자, 아담은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진다. 혼자 낙원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이브와 함께 ‘죽음’을 택할 것인가. 이성은 전자를 추천하지만 감성은 후자로 아담의 등을 떠민다. “내 그대 없이 어찌 살겠나, 그대와의 달콤한 대화와 사랑을 끊고 어찌 지내겠나, 다시 이 황량하고 적막한 숲에서 나 홀로!” 에덴동산이 “황량하고 적막한 숲”이라니, 창조주가 들으면 보통 섭섭하고 괘씸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에겐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으로 들린다.

바로 이러한 힘겨운 선택의 노동, 노동의 선택이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사랑과 노동은 숙명적 선택에서 가장 당당하게 하나가 된다. 그러한 선택의 노동만이 사랑의 가치를 보전해 줄 수 있다.

윤혜준 / 영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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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글들을 모으고 있는데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시각이 괜찮은 글이 담비에 있길래 퍼왔다.

 

[사랑공부 : 사랑의 사회적 존재론] ①사랑과 노동

 코뮨을 코뮤니케이팅 하는 뫼비우스의 띠

[연세대학원신문 159호] 수수께끼 하나.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은 무엇일까? ‘나를 인간의 삶과 결합시키고 사회와 결합시키며, 자연과 또 다른 인간과 결합시키는 끈, 모든 끈을 풀기도 하고 다시 맬 수도 있게 하는 끈….’ 답은 화폐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세 번째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화폐를 ‘보편적 연결수단이자 절연(絶緣)수단’이라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답다고? 진짜 마르크스다운 얘기는 이 대목 바로 뒤에 나온다. 청년 마르크스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을 끼적거려 놓았다. “화폐는 진정 ‘보조’화폐일 뿐이며, 진정한 결합수단은 (…) 사회의 화학적 힘이다.” 인용문에서 (…)으로 표시된 부분은 악필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초고에서 식별할 수 없는 어떤 단어(들)이다. 화폐를 ‘보조적’ 지위로 밀어내는 사회의 ‘진정한 화학적 힘’, 연결과 절연의 참된 끈을 마르크스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썼던 걸까? 마르크스주의 역사 동학(dynamics)인 유물론은 표면상 계급투쟁을 분석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혁명을 이끄는 이 ‘화학적’ 에너지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 ‘(…)’이 ‘사랑’ 혹은 ‘노동’,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과 노동이 만드는 코뮤니케이팅(꼬뮨-하기), 즉 동사형으로 존재하는 ‘꼬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랑과 노동의 상호소외

오늘날 사랑과 노동에는 흥미로운 모순이 딸려 다닌다. 모두들 각론에 몰두하지만 누구도 총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우연하거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뜻밖이거나 필연적인 이별에 이르기까지, 연애사의 온갖 세목과 정서적 요동들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을 쏟는다. 결혼을 둘러싼 각종 이벤트들에도 거의 목을 매는 분위기여서 ‘짝짓기’는 이제 ‘중매’라는 수공업적 단계에서 각광받는 전문산업(mating system)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정작 ‘사랑’이란 말에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랑?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분위기다. 노동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자리와 연봉의 등락은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이나 노동 자체는 기피, 혐오, 염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높은 연봉을 주는 일자리’이지 더 이상 일이나 노동은 아닌 것이다. 사랑 없는 연애와 결혼, 노동 없는 일자리와 연봉의 추구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이나 노동이라는 이념과 사랑과 노동의 구체적 행위, 사건들 사이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있으며 우리는 이 간극을 지배하는 연결과 절연의 매체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잇다. 바로 돈이다. 사랑과 사랑-유사 행위들을 매개하는 것은 돈이고 노동과 노동-관련 사안들을 끊어놓는 것도 돈이며, 노동과 사랑을 연결하는 것도 돈이라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문제는 화폐라는 이 고약한 매체가 원활한 소통이 아니라 불통과 왜곡, 착복을 일삼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손발도 마음도 없는 화폐가 절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따라서 화폐라는 물신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회의 물적, 정신적 구조―사랑과 노동을 제물로 삼는 ‘등가교환’이란 제의를 통해, ‘자본’이라는 모호한 신의 제단에 ‘잉여’라는 공물을 쌓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신앙체제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라는 황무지

노동과 사랑은 사회적, 개인적 삶의 가장 큰 줄기여서 (‘노동이 사라졌다’느니 ‘사랑은 없다’느니 하는 헛소리들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우리 삶의 시간은 노동과 사랑으로 점철돼 있고 지배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는 그걸 망치는 것으로 점철돼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경제생활을 소득과 지출로 나눌 때,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노동에서 소득을 얻고 (자기애와 가족애가 포함된) 사랑 쪽에서 지출을 한다. 반면, 자본가와 기업은 사랑(을 미끼로 한 상품)을 팔아 소득을 얻고 노동을 열악하게 만듦으로써 지출을 줄인다. 그래서 자본과 기업이 헤게모니를 쥔 사회에선 자기애, 가족애, 성애 등등 사랑의 온갖 형태들이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처럼 부풀려지고 이제 사랑은 초자아의 의무적 명령처럼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변질된다(“너 아직 솔로니?” “인생을 즐겨라!”). 노동 또한 사회의 물적, 정신적 재생산 동력이라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사랑하는 나, 연인, 가족이 요구하는)상품 소비를 위한 돈을 버는 ‘고역의 장소’로 추락한다. 그 결과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랑의 증거로 보험금만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지는, 생명보험 광고의 가장(家長) 이미지다. 노동(사라진 가장)과 사랑(과장된 평화와 행복)이 돈(보험금)을 통해 연결되는 이 끔찍한 광고는 우리시대의 가장의 욕망 ― ‘가족이라는 짐을 벗고 훌훌 이 세상을 뜨고 싶구나’ ― 과 가족의 욕망 ― ‘돈만 남기고 꼰대는 사라져주었으면 좋겠어’ ― 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양손으로 노동과 사랑을 지배하고픈 금융자본의 욕망과 자기 이미지(잘생긴 신사로 등장하는 자애로운 보험회사 직원)의 표현이다.

자본이 더 많은 잉여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는 곳에서 사랑은 독버섯처럼 화려해지고 노동은 곰팡이처럼 음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사랑과 노동의 대지는 황무지로 변해가고 사라들은 잔인한 계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누가 이것을 인간의 숙명이라 말하는가. 잔혹한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들, 가야할 때를 모르고 버티는 노회한 왕과 그의 부패한 신하들이 아닌가. 우리가 요즘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 권력체제는 바로 이 죽어가는 왕, 즉 자본주의 체제의 말기 증상이다.

노동과 사랑의 주고받음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이다. 공장이나 회사에서의 일, 임노동만을 노동이라 생각하는 상식적 노동 이미지와 달리 마르크스는 노동을 사회를 가능케 하는 인간적 매개활동의 총체로 이해했다. 이때 노동이란 자급자족을 위한 생계유지 활동이 아니다 ― 그건 동물들도 다 하는 일이다. 노동이란 우선 그 산물이 타자에게 유용한 한에서 자신에게도 의미있게 되는 그런 활동들을 가리킨다. 노동에는 그처럼 원초적으로 사랑의 계기(조건 없는 증여/수수)가 포함돼있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고 노동은 (의식하든 못하든) 타자들에 대한 일반화된 사랑의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노동은 사랑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랑과 노동을,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의 노동’과 ‘노동 속의 사랑’을 사회의 일반질서이자 구성적 문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자본주의는 등가교환과 예외로서의 잉여만을 알뿐, 그 자체가 잉여인 교환, 즉 선물의 논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모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타산적 개인주의자들은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음으로써, 또한 누구도 예외 없이 그 부등가의 질서에 의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성취되는 참된 등가(궁극적이고 인간적인 평등)의 풍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궁핍과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자본주의에게 사랑은 풀 수 없는 방정식이고 견딜 수 없는 무리수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사랑에 젖줄을 대고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일반적 질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착취하거나 악용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더 많은 잉여의 산출,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발전’이라 부르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행태들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사랑을 마시고 인간적 얼굴을 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독약을 삼킨 짐승처럼 죽어버릴 것이다.



   
 
▲ 마담 맹트농
 
노동과 사랑을 산다는 것

여기서, 뜬금없이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돈 주고 사랑을 살 수 있나? 없다! 그건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거울 속의 내가 미소 짓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은 사랑을 주면서만 받을 수 있고, 오직 사랑과만 교환(증여/수수)할 수 있다. 사랑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면 내 마음이 기쁘다는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증여론>에서 모스가 관찰한 바 있듯이, 선물증여는 증여자에게 사회적 위신과 권위를 가져다준다. 그는 선물한 것들과 등가의 것들을 조만간 돌려받지 않지만, 그런 타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증여의 순간에 곧장 무언가를 돌려받는 묘한 계산대 위에 선다(이런 계산을 하는 것은 증여적 사회이지 증여의 수행자들이 아니다). 그가 받는 것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만족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의 객관적 확인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그가 타자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사랑하는 자’)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ㅎ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사)준다는 뜻인가?

라캉은 사랑이 ‘두 개의 결핍이 만나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주는가? 데리다는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비판서인 <주어진 시간 : 위조화폐>에서 “시간을 준다”는 마담 맹트농의 편지 구절을 오래 붙들고 늘어지는데, 이때 자신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의 시간)을 바친다는 뜻이다. 삶의 시간은 준다고 줄어들지 않고 주지 않는다고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바로 이 ‘삶의 시간’의 증여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증여라기보다 전달의 ‘몸짓’이며 교통의 ‘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며 몸을 붓으로, 시간을 물감으로 삼아 타자의 세계에 그리는 생의 무늬(紋畵)이다. 우리는 오직 그 타자의 캔버스에만 자신의 생을 남길 수 있으며, 우리 생은 타자의 사랑이 남긴 무늬를 모두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백지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향한 사랑의 몸짓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살아감을 통해서만 사랑을 ‘돌려받는다.’ 사랑의 수행자(agent)는 증여가 곧 수수인 사랑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뿐 사랑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도 이와 마찬가지다. 노동은 (임금의 형태든 뭐든) 계량화되어 되돌려 받는 것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노동을 살 수 없으며 그것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도 없다. 노동은 오직 노동과만 교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품앗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사랑의 계기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내어준 생의 시간의 총량, 즉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세계 전체를 향유하고 세계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길 기대하며, 세계 전체가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이 그리움 속에서 타자를 향해 가는 생의 증여/수수라면 노동은 그 사랑의 능동적 표현이자 실현이고 우리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생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화폐를 ‘보조’ 수단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비로소 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생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보희 / 연세대 비교문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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