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노동을 함께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은 참 괜찮은 시각이다.
사랑을 위한 노동을 하되 사랑은 하지 말라?
[사랑공부 : 사랑의 사회적 존재론] ①사랑과 노동
[연세대학원신문 159호] 이브를 유혹한 대가로 땅을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되는 저주를 받은 뱀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흙을 파먹다 지친 그는 그리스 신화시대에 이르러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에 앉아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세이렌으로 환생한다. 유혹의 기술이 업그레이드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만약 선악과를 먹는다면…”이라는 가정법 형태의 거짓말은 버린 지 이미 오래. 뱀/세이렌은 이제 스스로 선악과가 된다. 응시가 닿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선악과가 아니라, 주체의 의지적 지각없이도 감각기관을 자극할 수 있는 고성능 무기. ‘노래’를 부르는 능동적인 선악과가 된 것. 그리하여 세이렌이 노래를 부르면 선원들은 노동을 하던 손을 멈추고 황홀경 속에서 넋을 잃은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1940년대 초반의 중국, 영화 <색․계>는 보다 복잡하고도 난감한 상황에 처한 시대적 세이렌을 조명한다. 여주인공인 왕치아즈가 항일 운동 연극 단체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연극팀을 이끄는 왕리홍을 사랑하기 때문. 전쟁에서 형을 잃은 원한을 항일 운동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가 상정하는 사랑의 출발점은 임무의 완성―친일 세력의 선봉장인 이대장의 암살―이후에 놓여 있다. 그는 그녀에게 생을 건 연극판을 제안하고 그녀는 그를 위해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주어진 노동은 막부인이 되어 이대장을 유혹하고 암살의 순간으로 그를 유인하는 것. 이 유혹의 노동에 필연적인 금지 조건 하나가 뒤따른다. 그를 유혹하되 그를 사랑하지 말라.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막부인의 옷을 입었을 뿐 옷 안의 육체는 왕리홍을 욕망하는 왕치아즈가 아닌가. 그러나 ‘하지 말라’는 명령은 언제나 ‘하라’는 명령의 강조형처럼 들린다. 이브와 판도라의 후손인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녀를 안쓰러워하는 왕리홍 옆에서, 국가와 당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암살단의 당수 앞에서, 그녀는 절망 섞인 울분을 토한다. “그는 뱀처럼 내 몸을, 내 마음을 파고들어요… 이러다가 내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될까봐 두렵다구요!” 그러나, 그녀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 건 과연 구시대적 유혹의 총수, 뱀의 형상을 갖춘 그일까?
이대장은 그녀를 일본식 유곽으로 불러낸다. 거기서 그녀는 세이렌의 본분을 잊지 않고 그를 위해 유혹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의 가사가 심상치 않다. 어린 청춘들이 겪는 사랑의 아픔을 호소하며 ‘당신’ 곁에 영원히 남아있기를 소망하는,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노동에 충실히 임하고 있는 왕치아즈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녀의 노래가 끝난 후 눈물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맺히는 순간. 우리는 노래 가사 속 그녀의 ‘당신’이 왕리홍에서 이대장으로 바뀌어버렸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왕치아즈이고, 사랑을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은 연극 속 막부인이지만 어느 순간 막부인의 옷은 그녀의 육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연극 무대에 올라 열연을 펼치던 그녀는 그만 객석이 무대가, 무대가 현실로 뒤바뀌어 버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불행한 역전의 기로에 그녀가 부른 ‘노래’가 위치한다. 세이렌은 더러운 노동을 이어가는 손을 파멸시키기 위해 유혹의 노래를 부르지만, 노래가 세이렌의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그것은 그 자체로 유혹이 되어 그녀의 입을 막고 그녀의 노동을 중지시킨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는 더 이상 이브의 응시를, 그녀의 입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의 응시는 그녀의 응시 이전에 이미 그녀에 닿아있고, 그녀가 입을 열어 그것을 깨물기 전에 그것은 이미 입을 벌리고 있다. 선악과는 더 이상 뱀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에게 가해진 형벌은 노동 자체에 있지 않다. 사랑을 위한 노동에는 일종의 성스러움이 묻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유한성에 놓여 있는 것 아닐까. “내 그대를 위해 손에 흙을 묻히고 엉겅퀴가 돋아난 땅을 경작하며 평생을 살겠소.” 아담은 위대하다. 그러나 질투쟁이 신이 그 꼴을 곱게 봐줄리 없다. “네가 사랑하는 여인은 곧 늙고 추해지리니 사랑은 가고 노동의 무게만이 고스란히 네 어깨에 지워지리라.”
왕치아즈가 그녀의 소원대로 이대장의 아내가 되어 그와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면 그들의 사랑은 죽는 날까지 지속되었을까? 그녀는 필시 이대장의 아내가 그에게 들었던 말 ― “(내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당신은 그냥 내려가서 노시오” ―을 똑같이 들으며 또 다른 연극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죽음이냐, 노동/삶이냐, 이것이 선택의 무게로 다가올 때 사랑 편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한 왕치아즈의 선택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그녀가 처한 시대적 배경, 사랑과 노동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못하고 서로 다른 극단에 놓일 수밖에 없는 불행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는 신에게, 이렇듯 숭고한 선택의 상황이 오리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정옥 / 연세대 비교문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