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신문에 연재되는 글인데 담비에 실린 모양이다. 처음부터 모아본다.
[사랑공부 : 사랑의 사회적 존재론] ①사랑과 노동
선택의 노동으로서 사랑
『실락원』의 사건과 함께 인간의 노동이 시작되었는가? 기원전 10세기경(또는 그 이전)에 씌어진 유태인의 경정 <창세기>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결정적인 범죄를 저지른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해 보려하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는 없는 터.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공범자 ‘아담’에게도 중형이 내려진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와중에 ‘사랑’, 인간 남녀의 사랑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까? 애초부터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 보인다. <창세기>는 야훼가 여자를 일방적으로 창조해준 것으로 쓰고 있으니 아담이 여자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여자’가 먼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는 사건 기록에서, 둘의 관계가 애정에 기초한 것인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범죄행위의 동기가 애정과 관계있는 것인지에 대한 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건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입덧과 산고를 겪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 처지로 전락한 단계에서 둘 사이에 애정이 있었는지, 텍스트는 말이 없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둘이 “동침”한 결과(이러한 ‘동침’에 ‘사랑’이 개입했다는 가정은 그야말로 가정에 불과하다.) 생겨난 두 아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경쟁과 살인이 묘사된다. 이 최초 가정의 파탄과 ‘사랑’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노동’에 비해 ‘사랑’, 특히 우리가 ‘사랑’하면 떠올리는 남녀 간의 동반자적, 상호의존적 사랑은 그 연배가 한참 아래이다. 고대 지중해 문명에서 ‘에로스’에 대한 탐닉이 큰 몫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사랑’보다는 ‘동침’에 더 가까운 육체적 욕망의 세계이다.
물론 ‘노동’도 이전 시대의 노동과 근대의 노동이 같지 않다. “종신토록 수고하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경제적 가치 창출, 소유권과 잉여를 추구하는 행위로 그 의미가 바뀌던 17세기 영국. 왕을 처형하고 ‘거룩한 공화국’을 세우는데 진력하던 혁명가 존 밀튼은 엉뚱하게도 <창세기>의 실낙원 이야기를 다시 쓴다. 혁명이 실패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 착수해서, 왕정복고의 패배를 맛보며 『실낙원』을 완성한다.
태어난 배경이 이러하니 이 작품에서 창조주에 대한 사탄의 봉기라는 정치적 사건이 큰 몫을 차지한다. 혁명을 선동하고, 패배 후에 다시 세력을 규합, 새로운 반격 작전에 들어가 이브에 대한 ‘심리전’을 펼치는 등의 사탄의 ‘노동’은 ‘사랑'이 아니라 ’원한‘으로 충전돼 있다.
아담은 어떠한가? 바로 이 대목에서 근대주의자 밀튼은 아담의 공범행위에 근대적 ‘사랑’을 결정적으로 개입시키므로, 고대 유태인의 신화를 근대적, 동반자적 남녀관계의 신화로 전환시킨다.
밀튼의 이브는 누구인가. 아담이 낙원의 적적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며 창조주에게 떼써서 얻어낸, 애지중지하는 배필이 아니던가. 천사들이 그간 수차례 경고하고 교육시킨 덕에 사탄의 존재와 그의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아담. 잠시 이브를 혼자 놔 둔 사이에 사건이 터지자, 아담은 존재론적인 고민에 빠진다. 혼자 낙원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이브와 함께 ‘죽음’을 택할 것인가. 이성은 전자를 추천하지만 감성은 후자로 아담의 등을 떠민다. “내 그대 없이 어찌 살겠나, 그대와의 달콤한 대화와 사랑을 끊고 어찌 지내겠나, 다시 이 황량하고 적막한 숲에서 나 홀로!” 에덴동산이 “황량하고 적막한 숲”이라니, 창조주가 들으면 보통 섭섭하고 괘씸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에겐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으로 들린다.
바로 이러한 힘겨운 선택의 노동, 노동의 선택이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사랑과 노동은 숙명적 선택에서 가장 당당하게 하나가 된다. 그러한 선택의 노동만이 사랑의 가치를 보전해 줄 수 있다.
윤혜준 / 영세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