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의 평범한 악의 개념을 비속성으로 풀어서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김기협의 글이다.   

프레시안에서 퍼왔다.

 

히틀러의 웃음

칼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하수인이었다. SS 간부로서 1938년 비엔나에서,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라하에서 유태인 청소를 지휘했고, 1942년 이후에는 수용소의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관리했다. 그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체포돼 예루살렘에 압송되었을 때 이 '살인마'의 재판은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1961년 12월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교수형이 집행됐다.

아이히만의 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나왔거니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다. 독일 유태인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41년 미국에 이주한 아렌트는 전체주의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가진 학자였다.

아렌트가 많은 유태인들을 격분시킨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박해 당시 유태인 사회 지도층이 나치의 통제에 협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협조 없이 몇 년 안 되는 기간 동안 500만 이상을 처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아렌트는 지적했다.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협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 이 지적에 일반 유태인들이 발끈하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또 하나의 논점은 보다 미묘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히틀러와 아이히만을 '악마'가 아닌 비속한 인물들로 그렸다. 20세기는 과거와 달리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특이성이 없는 비속한 인물들이 술수만으로 권력을 쥐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비속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관점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을 가장 두드러진 예로 그는 꼽았다.

유태인들이 이 논점에 분노한 것은 대학살이 유태인 정체성(正體性)의 근거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적 범죄에 희생당했다는 비극성은 이스라엘의 호전적 대 아랍 정책까지도 정당화시켜 주는 시오니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희생을 비속한 인간들의 비속한 범죄로 격하시키는 것을 시오니즘에 대한 모욕으로 유태인들은 받아들였다.

히틀러의 웃는 얼굴을 만들어 담은 껌 광고에 독일 대사관이 항의한 배경에도 비슷한 상징성이 작용한 것 같다. 히틀러를 완벽한 악마로 규정해야만 나치즘의 죄악을 일반 독일인들로부터 절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이 광고를 봤다면 뭐라 했을까.



▲ 히틀러의 웃음.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최고 전범으로 '악마' 취급을 받았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가 천박한 욕망에 휘몰린 일개 선동 기술자에 불과하다고 논했다. 건전한 인간관을 가지지 못한 지도자가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준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히틀러의 세기적 범죄를 증오 아닌 경멸의 대상으로 직시한 아렌트의 지성에 경의를 표한다. ⓒ프레시안


한나 아렌트의 'banality of evil'이란 말을 인용할 때 나는 '악의 비속성'이라고 써 왔다. 그런데 아렌트의 책 우리말 번역서에는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라고 흔히 옮겨져 왔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사전적인 뜻으로는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그런데 아렌트가 이 말을 통해 내세운 논점을 놓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평범성'엔 아쉬운 느낌이 든다. 전통적인 '악(evil)'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렌트가 보는 20세기의 악은 경멸의 대상이다. 천재성도 용기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천박한 탐욕에 몰려 저질러지는 악, 그에 대한 아렌트의 경멸감이 '평범성'에는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비속성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명장(名匠)이 사라졌다. 싸움터에서는 용사(勇士)가 없어졌다. 천재(天才)조차도 20세기의 천재는 기능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20세기 예술계의 거장(巨匠)들은 복사의 바다 속에 빠져버렸다.

비속화 현상은 전쟁에서 제일 두드러진다. 전사와 전사 사이의 육박전은 비중이 떨어지다 못해 20세기 말의 전쟁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전쟁의 주류는 눈먼 대량 살상 무기의 몫이 되었다. 공격당할 위험이 없는 곳에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상대방을 인간으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옛날의 전사들이 자기 뜻에 목숨을 걸던 고귀한 활동이던 전쟁이 한낱 물량적 경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만이 아니라 일반 경쟁이나 투쟁에서도 20세기 세계에서는 비속화의 추세를 널리 읽을 수 있다. 돈벌이에서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보다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작용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공부도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나 '기득권'을 쌓고 활용하는 것이 '도전'보다 유리한 전략으로 채택되는 환경이 굳어지고 있다.

비속화 추세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의 하나가 정치다. 유행하고 있는 '정치공학'이란 말은 아마도 '정치철학'과 대비되는 뜻일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가. 한 사회의 진로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진로 결정을 위해서는 철학으로서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정치에서는 가치관도 철학도 가지지 않은 테크니션들이 선거 승리를 위한 기술만을 가지고 폴리티션들의 설 땅을 빼앗는 그레셤의 법칙이 판을 친다. 

 

 

 

 

   

지난 가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뉴라이트가 '성공'의 의미를 외면하며 '승리'에만 집착하는 행태를 지적한 바 있다. 정치철학 실종의 극단적 사례라 할 것이다. 정권 운용을 위한 승리만을 추구할 뿐, 국가 운영의 성공은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다.

정치의 비속화 추세는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을 보더라도 나름의 정치철학을 가졌다고 할 만한 대통령이 몇 안 된다. 아이젠하워야 워낙 인기 높은 전쟁 영웅이라 대통령이 된 것이고, 카터와 오바마 정도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닉슨과 부시가 워낙 국민을 지겹게 만들어 놓은 상황 덕분이었다.

정치공학의 달인으로 자타가 공인한 닉슨의 전략 노선을 설명하는 '미치광이 이론(Mad Man's Theory)'이란 것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미국이 어떤 극한적 대응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켜 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대 베트남 전략 중에는 이 이론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 전략이 얼마만큼의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국의 국가정체성은 그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고 미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국가 사회의 큰 '성공'을 생각지 않고 목전의 '승리'만을 추구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행태를 보며 미치광이 이론을 떠올릴 때가 많다. <PD수첩> 탄압에서 언론법 '입법 전쟁'까지, "상식? 상식이 더 센지 우리 힘이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기만 한다. 지금의 승리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장래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가 힘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이 힘으로만 결정되는 형세를 만들려 든다.

아렌트가 히틀러와 스탈린을 지목해 말한 '비속한 악'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회의 성공'이란 거대한 욕심이 아니라 남에게 이기고 남보다 많이 갖기 위한 천박한 욕심만이 춤춘다. 힘 있는 사람들이 사회 전체의 성공을 외면하는 이런 사회는 망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사회가 망했던 것처럼.

이 미치광이 행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요즘 공격에서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부인과 아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했으면 '피의자'는 노 전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박연차의 진술을 인용한 '검찰 관계자'들의 폭로는 갈 데까지 갔다. "무는 호랑이는 짖지 않는다"던데 왜 이렇게들 짖어댈까? 정말로 우리의 전임 국가 원수에게 문제가 있다면 조용히 살펴봐서 피할 수 없는 문제가 확인될 때 어쩔 수 없이 발표하는 것이 '상식'이고 '예의' 아닌가? 왜 이렇게 속 보이도록 떠들어대는 걸까?

노 전 대통령은 부인이 박연차의 돈을 받은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액수는 3억 원 더하기 100만 달러인 모양이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국민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워낙 청렴과 도덕성을 간판으로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권력형 비리' 축에 낄 수도 없음은 물론, 지금으로서는 '비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의 사실 공표 금지 원칙' 때문에 ○○일보사 ○사장 이름신문 지상에 오르지도 못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검찰 관계자'는 전임 국가 원수의 피의 사실에 대한 자칭 뇌물 공여자의 진술 내용을 중계 방송하기 바쁘다. 당장 언론이 잘 받아먹어 주니까 목전의 승리에 도취된 꼴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이 요 며칠간 발표한 글에 거짓이 없다는 데 10만원 걸 용의가 있다. 그가 거짓말을 일체 않는 성인군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 안 될 자리를 살필 줄은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다른 나라 대통령의 정책 공약을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 하냐?"는 사람과는 전연 다른 사람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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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여성의 비정규직 문제를 기획연재한다.  

 

"'술집'만 안 나갔다. 어떻게 딴 '졸업장'인데…"


[벼랑 끝에 선 여성들①] 20대 여성 백수의 비애

이영선(가명·28) 씨. 서울 소재 대학교를 2007년 2월 졸업한 '백수'다. 졸업 전부터 200곳이 넘는 기업에 지원을 했지만 계속 구직에 실패했다.

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이 씨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가 이른바 'SKY'가 아니라는 점만 빼놓고는 빠지는 '스펙(specification)'은 아니다. 토익 점수는 만점에 가깝고, 졸업 학점도 4점대다. 방학 때마다 인턴 경력을 쌓는데 주력하느라 대학 생활의 '낭만' 이런 것과도 담을 쌓았다. 그러나 그를 불러주는 데는 아무 곳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 말대로 눈높이가 높은 걸까? 그건 맞다. "지금까지는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정규직만 지원했다. 대통령 말대로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걸까? 그런데 한 편으로는 억울하다. 대학 4년 동안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정규직이 되고 싶은 게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만큼 욕심을 부리는 건가?"

"그냥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싶은 것뿐인데…"

사실 이영선 씨가 정규직에 목을 매는 데는 까닭이 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닌 이 씨는 1년간의 구직 활동이 좌절되자, 지난 2008년 7월 보도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 배포하는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취직을 했었다. 야근, 주말 출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한 달에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은 130만 원. 물론 4대 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이 기업에서 전문성을 쌓다 보면 더 좋은 조건의 기업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1개월, 2개월, 결국 6개월이 흐르자 그런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평생 130만 원을 받으면서 영어 번역만 하다가 버려지는 '비정규직 인생'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앉아서 힘들게 학자금 융자를 받아가면서 학교를 다녔다. 백화점 판매원, 학습지 교사, 과외 등 여대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 안 해 본 게 없다. 시쳇말로 '술집'만 안 나갔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졸업 후엔 그래도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었는데…."

"어떻게 딴 대학 졸업장인데…"


▲ "우리는 인간이다. 아무 일자리에나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 이른 아침부터 취업 준비를 하는 대학생들. ⓒ뉴시스
결국 이 씨는 다시 130만 원짜리 비정규직을 그만두고 다시 구직 활동에 뛰어들었다. 시간을 더 허비하다가는 나이 때문이라도 합격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지난 1월부터 다시 이곳저곳에 원서를 넣고 있다. 그러나 취업의 벽은 여전히 높다. '경제 위기'에 '남녀 차별' 벽도 만만치 않다.

"얼마 전 지인이 일하는 중소기업 구매팀에서 '대졸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언니 스펙이면 가능하다'는 지인의 독려에 원서를 냈는데 결국 2차에서 떨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3000명이 지원했다. 최종으로 올라온 15명이 전부 남자였다. 내가 최종까지 못 간 이유가 여성이라는 이유라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다."

이러던 이영선 씨는 다시 비정규직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마냥 놀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말에는 보도 자료를 대신 써주는 홍보 대행업체 면접을 봤다. 월급은 역시 100만 원 조금 넘는 수준. 합격한다면 당분간 구직 활동과 병행하면서 이 기업을 다녀볼 생각이다.

"최근 한 중견기업의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사실 면접을 보러 이 기업, 저 기업 다니다보면 여러 번 만나는 친구들이 많다. 그 때도 아는 얼굴도 몇 있었는데…. 다들 사정이 딱하다. 또 다들 나 못지않게 준비를 많이 한 친구들이다. 나 같은 취업 준비생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 이제 올해 졸업한 친구들까지 더 많아질 테니…."

"좋은 일자리는 그나마 20대 남성의 몫"

이영선 씨의 말처럼 2009년 대한민국에서 20대 여성이 보통 기업의 정규직으로 취직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은 질 나쁜 일자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3월 18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9년 2월 고용 동향'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이 자료를 보면, 2월 취업자는 20대 남성의 경우 174만7000명으로 작년 동월대비 5.6% 감소했고 여성의 경우 198만3000명으로 3.3% 감소했다. 취업자 수치의 감소 추이는 남성이 더 가파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은수미 박사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더 직장 선택에 까다롭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20대 남성이 경제 위기 속에서 더욱 수가 적어진 질 높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순번을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수미 박사는 "20대 여성은 대기를 해봤자 질 높은 일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자진해서 질이 낮은 일자리라도 선택하고 있다"며 "취업률만 놓고 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낮지만 일자리 질을 보면 결코 20대 여성이 좋은 편이 아닌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즉 임시직, 일용직의 대부분이 20대 여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은수미 박사의 분석은 현실과 들어맞는다. 경제 위기 속에서 30대 여성의 실업률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구조 조정을 할 때, 30대 여성 임시직, 일용직을 우선 정리하는 것이다. 물론 기업의 여건이 나아지면 그 자리는 20대 여성이 다시 차지한다. 악순환이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에나 집어 넣는 물건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3월 19일 4조9000억 원 규모의 추경 예산을 편성 55만개 일자리 창출 유지를 목표로 하는 '일자리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주목할 부분은 취약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책이다. 정부는 중소기업 빈 일자리에 취업할 경우 한 달에 30만 원을 지급한다. 신규 대졸자 교육 훈련 지원 등의 사업도 새로 추진한다.

하지만 이영선 씨는 답답하기만 하다.

"하다 못해 나사, 볼트도 딱 맞는 자리가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아무 일자리에나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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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정치는 곧 ‘가치배분’… 시민과 연대해야 ‘가능의 예술’

김상봉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나라 안팎이 몹시 혼란스러운데 별고 없으신지요. 작금의 정치·사회 상황은 차분한 일상을 영위하고 싶은 우리네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삶은 사회적·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오늘의 한국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가 우리를 놓아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중심 문제들의 근원은 정치로부터 발생하고 있으며, 정치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바람직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사진은 2000년 1월 서울역 광장에서 부패정치를 타파하자는 집회를 하고 있는 총선시민연대 회원들(왼쪽 사진)과 2003년 11월 국회 앞에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오늘 말씀 나눌 주제는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인데, 정치학도로서 요즘처럼 곤혹스러운 경우도 많지 않았습니다. 최근 우리를 가장 큰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는 일은 부패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금번 부패추문을 보며 저는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정의의 관념을 다시 구축하려면 앞으로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 도덕과 윤리는 물론 사회 도덕과 정의를 가장 소리 높여 주창한 정부와 세대-그들을 민주정부, 또는 70·80세대, 386세대 무엇으로 부르든-에 의해 그것들이 붕괴된 데서 오는 충격은 집단 트라우마에 가깝습니다. 도덕과 정의는 궁극적으로 개인 내면에서 출발하여 다시 내면으로 귀결되지만, 그 사회적 완성은 오직 행위로서만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재화의 충돌 불가피…합리적 배분이 정치의 요체

오늘의 한국 정치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저는 인식과 실천 모두에서 한 사회를 바르게 건설하려 할 때 요체는, 인간들의 집합행위로서의 ‘정치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공동(체)적’ 가치와 자원의 배치가 결국 개인적·집합적 삶의 방향과 수준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공공적’ 기능과 영향의 측면에서 사회·문화·군사·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과 선차성을 말하는 것이지 목적이나 비중, 가치로서의 정치 우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때문에 ‘정치가 문제’라고 할 때 이 말은 그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함축하는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 사회에서 정치는 공동의 목표·가치·이상을 결정하는 토론과 합의의 차원은 물론 그것을 추구하는 실천과 이행, 리더십과 대표의 역할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떠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공공가치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때문에 더욱 더 저는 한국에서는 단연 정치가 문제라고 봅니다. 즉 지금 한국 사회의 중심 문제들의 근원은 바로 정치로부터 발생하고 있으며, 정치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바람직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은 전연 불가능합니다.

정치는 한마디로 ‘가치의 배분’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배분행위는 합리성·합법성·민주성에 기반한 공적 집합행위를 말합니다. 즉 공동체의 한정된 여러 재화와 물질, 자원들을 어떻게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구성원들에게 배분하느냐가 정치의 요체이지요. 우리가 공화국을 포함한 공적 기구를 구성하는 이유는 가치의 공적·권위적·합리적 배분을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시민이 공적 기구의 대표 선출과 구성에 참여하는 행위는 곧 가치배분에 참여하는 의무이자 권한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습니다. “인간들의 무한한 욕망과 이기심” 및 “재화와 자원의 제한” 사이의 불가피한 충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정치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근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를 보는 두 대립적인 시각, 즉 ‘가능(성)의 예술’로 본 비스마르크와 ‘숙명’으로 본 나폴레옹의 시각 중 전자를 선호합니다. ‘가능의 예술’로서의 정치는, 결국 ‘불가능한 최선’과 ‘가능한 최악’을 배제하고 ‘가능한 최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 ‘가능한 최선’은 ‘차선의 이상’을 의미합니다. ‘정치는 현실’이라는 과도한 정치현실주의나 특정 종교·이념·도덕을 정치화하려 시도했던 급진근본주의의 양 극단이 실패한 이유는 정치가 현실과 이상 사이의 존재라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선의 이상’을 향한 ‘현실적 가능성’이 중요한 이유는,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우린 가능한 것조차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정치를 교육과 함께 헌신과 소명으로 본 막스 베버를 좋아합니다. 교육이 한 영혼(의 양육)을 향한 헌신과 소명이라면, 정치는 공동체의 발전을 향한 헌신과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정치 사사화·시장화가 문제…기업·시장이 중심행위자로 기능

선생님, 저는 한국 정치가 갖는 중심 문제를 네 가지로 봅니다. 그것은 첫째 정치의 시장화·사사화·기업화, 둘째 사법화·형사화, 셋째 탈시민화·탈주권화, 넷째 협소화와 과잉화의 모순입니다. 먼저 정치의 시장화·기업화·사사화는 정치영역에서조차 사적 시장논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는 점과, 실제 정치에 기업의 힘이 압도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뜻합니다. 한국 정치는 필수 역할인 가치배분, 토론과 합의, 기회 균등, 법치를 외면한 채 효율성과 생산성 지상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업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으며 평가기준 역시 공공성·책임성·정당성이 아니라 생산성·효율성·경쟁성입니다. 둘째 실제 기업과 시장이 정치의 중심 행위자로 기능합니다. 정치에서의 기업 역할 증대는, 정치자금 제공과 이익의 교환 같은 거래행위 및 부패의 구조화·전면화 차원을 넘어 아예 정치의 공적 역할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광고주의 성격이 기사의 성격, 즉 언론의 본래 성격을 좌우하듯, 그리하여 기업논리가 언론논리를 좌우하듯 오늘날 정치의 기업화와 사사화는 이제 시장에서의 권력과 힘 관계가 정치영역에도 연장되어 정치 본래의 기능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제가 중첩된 현재의 한국정치 대립의 본질은 보수/진보, 좌우, 급진/수구가 아니라 실제로는 공공 대 사사이며, 결국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한국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봅니다. 즉 한국 정치는 지금 정당경쟁, 제도, 이념대결에 은폐되어 있는 사사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특히 ‘정치’영역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기업·언론·교육·종교·노동·금융·의료·정보통신 등 ‘시장’과 ‘사회’ 영역은 거꾸로 더욱 불평등화·과두화했음을 고려할 때, 정치마저 사사화할 때 그것은 시장과 사회의 불평등과 과두성을 정당화(正當化)하고 공화국 전체의 가치로 전도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고대 이래의 공화주의자들이 가장 깊이 우려한 점으로써 공공행위로서의 정치과정과 정치의 존재 이유 자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司法化)와 형사화(刑事化)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편지에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점을 말씀드리면 먼저, 민주화 이후 한국의 사회·정치·경제·안보·인권·헌법의 핵심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한과 주체가 시민과 대표 영역을 넘어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사법 차원으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선거과정을 포함한 정치(인)의 행위들 역시 범법의 문제, 부패문제를 고리로 검찰의 인지 여하와 판단에 따라 정치 ‘기준’이 형사문제로서의 위법 여부가 되고 그 결정 주체 역시 검찰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핵심문제 최종결정권 상실…정치 사법화·탈시민화 심각

물론 참된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부패 제거는, 너무도 중요하여 모든 공화주의 이론과 실천의 핵심가치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법화와 형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4권분립을 말씀드렸을 때 핵심은 부패문제를 포함해 낡은 3권분립으로는 바른 민주공화국의 건설도, 민주정부에 대한 감독도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4권분립과 함께, 근대 공화국 이론의 개척자인 마키아벨리가 말했던 부패공직자에 대한 ‘(모두의) 뇌리에 박히는 처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부패를 근절하지 않고는 정치의 사법화와 형사화는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법화와 형사화를 극복하는 문제는 한국 정치의 핵심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는 정치의 탈시민화, 탈주권화입니다. 이 문제는 대의민주주의, 즉 대의정부 및 의회 정치의 한계와 직결됩니다. 한국 정치는 선거의 종료와 동시에 시민의 손을 떠나 즉각 대표기구, 즉 정부와 정당으로 전이됩니다. 동시에 많은 문제들은 정부 무능과 정당 대결로 인해 해결되지 않거나 더 악화됩니다. 결국 대안은, 정부 없는 공화국이나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능한 정부의 건설을 위한 제도적 대안 마련과, 정당의 성격과 역할의 변화로 귀결됩니다. 오늘은 후자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선 현행 국회의원 공천제도의 폐지가 가장 시급합니다. 위로부터의 공천제도는, 미리 후보를 결정하여 유권자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행위로 직접·평등·비밀·보통선거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반민주적 제도이자, 대표 선출 과정에 시민 참여를 봉쇄하는 사실상 위헌입니다. 시민들은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미리 결정된 후보를 상대로 단지 대대표(代代表)의 선출을 강요받을 뿐입니다. 따라서 공천과정은 즉각 시민들에게 돌려져야합니다. 저는 이를 꽤 오래 주장해왔는데 현실은 요지부동입니다.

둘째로 국회의원은 당론 뒤에 숨어 견해 표명과 역할을 방기해선 안됩니다. 한국 정치에는 정당은 있으나 국회의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점 역시 위로부터의 공천제도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국회의원의 역할과 책임의 증대를 위해서는 모든 당내·의회 결정과정을 공개하는, 즉 자기행위에 대해 직접 시민에게 책임을 지는 기속위임(羈束委任)의 원칙을 도입해야 합니다. 정책결정과 입법행위의 전면 공개로, 그동안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지적되어온 자유위임과 기속위임의 균형을 통해 시민과 대표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셋째는 의회의 증대와 강화입니다. 현재 한국의 의원 1인당 인구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 평균의 약 2배 수준(8만3000명 대 16만명)이므로 현재의 의회 성원을 대폭 늘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표성과 민주성을 높이되 시민의 참여와 통제, 대표의 역할과 책임은 키우는 이중 개혁이 필요합니다. 특히 상당수 지역에서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는 현재의 지역정당체제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정당명부제를 포함한 비례대표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半직접민주 = 半대의정치 위해…시민은 정치의 生費者 돼야

선생님, 그동안 한국에서 정치는 의회·정당 영역으로 이해되는 협소화와 동시에,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정권교체·정치논리가 즉각 침투하는 과잉화가 모순되게 공존하였으나 이젠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저는 사사화·사법화·탈시민화를 통해 동시에 협소화·과잉화하고 있는 이 모순을 넘는 요체를 정치의 자기영역·자기역할 확보에서 찾습니다. 그 길은 의회정치와 시민정치, 참여와 대의,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연대와, 결합을 통한 정치의 독립성, 공공성, 시민성의 회복이라고 봅니다.

즉 기업·시장과 사법·검찰의 넘치는 영향을 넘는 동시에 사회 모든 영역으로의 정권 논리 침투를 방지하여 자율성을 보장하는, 그리하여 가능의 영역인 정치 본래의 역할을 회복하고 공공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치의 존재 이유이자 태반인 시민과의 연대가 필수적입니다. 저는 이것을 반(半)직접민주주의=반(半)대의정치라고 표현합니다. 시민들은 이제 정치의 소비자이자 생산자, 즉 생비자(生費者, prosumer)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공공문제의 해결을 통한 사회의, 삶의 인간화에 있다고 할 때 저는 이 결합을 한국정치가 가야 할 바른 길로 이해합니다. 오늘의 혼란스러운 한국 정치 현실에서 누구보다 깊은 인문적 고뇌를 하고 계실 선생께 이 어려운 문제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을 기다리며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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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

1947년에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중심인 본의 와인제조업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미국 소크생물학연구소의 한 실험실에 대한 민족지 연구를 통해 과학적 사실이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한 <실험실 생활>로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동료인 미셸 칼롱과 더불어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정립하면서, <프랑스의 파스퇴르화>, <과학의 실천> 등의 저서를 발표하여 과학기술학의 대표적 학자로 부상하였다. 1990년대에는 자신의 이론을 생태적 정치철학으로 발전시킨 <우리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자연의 정치학> 등의 저서로 더욱 각광을 받았고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넓히게 되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산실인 국립고등광업대학교 혁신사회학센터의 교수로 20년 넘게 재직하다가, 2006년에 파리 정치연구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옮겨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www.bruno-latour.fr)

 

 



수많은 잡종들의 탄생, 온난화, 이로 인한 생태위기 등 과학기술의 생산 및 소비와 관련된 엄청난 집단적 실험은 그동안 아무런 정당한 과정도 없이 결정되어 왔다. 인간과 비인간이 좀더 바람직하게 결합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학기술의 산물이 논란과 타협, 조정의 정당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기술학에서 출발하여 정치생태학에까지 그 사상의 폭을 넓혀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학자다. 그가 동료인 미셸 칼롱과 더불어 1980년대에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구축한 독특한 접근은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이론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자연 실재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입장이나 사회 실재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 모두를 거부한다. 그 대신에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이질적 행위자들이 동맹을 맺어 공고한 연결망의 구축을 성취할 때 성공적으로 과학과 기술이 출현하며, 이 과정에서 사회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곧 과학기술과 사회는 연결망 구축의 결과로서 공동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파스퇴르의 탄저병 백신 개발에 관한 라투르의 사례 연구다.
 

1870년대 후반에 탄저병은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가축, 축산농민, 수의사, 위생학자를 괴롭히던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이 병은 지역별로 숱한 변이를 보였기 때문에 세균과 같은 단일한 원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실험실 과학과는 연관이 없다고 흔히 믿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탄저병이 발생한 농장에 임시 실험실을 차려 농민과 수의사에게 정보를 얻고 이를 자신의 실험과학 언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농장에서 채취한 탄저균을 파리의 실험실로 가져와 본격적으로 분리 배양하는 실험에 착수하였다. 그는 이미 약화된 닭콜레라 배양균이 백신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탄저균 백신을 동물에게 주사하여 병독성의 다양한 변이를 실험실에서 모방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1881년 파스퇴르는 농업협회의 후원으로 푸이 르포르 마을의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저병 백신의 공개 시연을 열었고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상했던 대로 대성공이었다.

푸이 르포르의 야외 실험이 성공했던 것은 사람들에겐 기적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실험실과 동일한 조건(소독·청결·보존·주사 동작·타이밍·기록 등)을 단순히 농장으로 확장시킨 덕분이었다. 이 실험 이후 탄저병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집단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이 생겨났다. “만일 당신의 가축들을 탄저병으로부터 구하고 싶다면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의 실험실에 백신 플라스크를 주문하라.” 이에 따라 탄저병 백신이 공급되는 상업적 회로 비슷한 것이 파스퇴르 실험실에서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의 통계기구는 탄저병의 전국적 감소를 도표로 기록했다. 이 사례 연구는 파스퇴르의 위대함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질적인 행위자들(탄저균·가축·농민·수의사·위생학자·언론·정부 등)이 과학자의 실험실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구축된 공고한 이해관계의 동맹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탄저병 백신을 둘러싼 이 행위자-연결망이 구축되기 전과 후의 프랑스 사회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사회 역시 연결망 구축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탈냉전과 생태 위기의 본격적 전개에 따라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이 이러한 지구적 문제에 던지는 철학적·정치적 함의를 모색하는 쪽으로 연구를 확대하였다. 그는 탈냉전이 기존의 낡은 근대주의적 정치를 벗어나 이제야말로 평화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를 할 기회를 좌파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냉전 시대에는 그 치열했던 계급전쟁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좌파와 우파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즉 근대화의 필요성, 진보의 불가피성, 경제의 토대적 역할,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 등에 대해 다양한 우파와 좌파 사이에 항상 깊은 의견일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탈냉전 이후에 우파뿐 아니라 좌파도 역시 ‘지구화’, ‘시장의 자유’, ‘탈규제’, ‘유연성’, ‘기술혁신’ 등을 외치며 누가 근대화를 더 잘 근대화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을 뿐이라고 그는 꼬집는다. 오늘날 진정 중요한 문제는 수십억의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지구 온난화, 종의 보존, 인구 증가, 환경오염, 유전공학의 영향 등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과학기술의 생산 및 소비와 관련된 이런 엄청난 ‘집단적 실험’이 그동안 아무 의정서도, 피드백 기회도, 사후보고도, 기록보관도, 모니터링도, 정당한 정치 과정도 없이 결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근대화냐, 생태화냐”로 요약되는 그의 문제의식에서, 좌파는 근대화의 심화에 몰두하는 우파와 이제야말로 진정한 차이를 만들 기회를 만났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생태화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현재의 녹색운동과는 다르다. 비인간들로만 구성된 절대적 ‘자연’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녹색운동은 문제의 궁극적 원인인 근대주의를 탈피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에서는 모든 실체들을 두 가지의 완전히 분리되는 존재론적 영역인 순수한 비인간들의 세계와 순수한 인간들의 세계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물질/정신 이원론에서 비롯되어, 칸트의 객체/주체 이분법으로 전개되었고, 뒤르켐의 사회학에 와서는 자연/사회의 이분법으로 고정되었다. 여기서 전자는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사실’의 세계이고, 후자는 영혼과 자유의지가 작동하는 ‘가치’의 세계로 간주된다. 근대인들은 의식으로는 이런 이분법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무의식적으로는 행위자-연결망을 통해 점점 더 수많은 잡종들을 양산하여 생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사실과 인공물이 이러한 잡종들인데, 근대인들은 이들을 순수한 비인간으로 간주하여 ‘사실’ 세계로만 단순히 파악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투르는 새로운 정치생태학을 제안한다. 그것은 절대적 실재로서의 ‘자연’이나 이를 반영한다고 간주되는 유일한 ‘과학’, 또는 인간에게만 행위성을 부여하는 ‘사회’ 개념을 모두 거부한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이 좀더 바람직하게 결합하는 공동세계(코스모스)의 점진적 구성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과학기술의 산물이 논란과 타협·조정의 정당한 정치적 과정을 거쳐서 공동세계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라투르는 이를 위해 ‘사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논란’과 ‘제도’로,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협의’와 ‘위계’로 분해한 다음에, ‘논란’과 ‘협의’를 상원으로 하고 ‘위계’와 ‘제도’를 하원으로 재편성하는 새로운 권력분립의 정치 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예를 들면 광우병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단백질인 프리온의 경우, 상원에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며 과연 존재하는지 ‘논란’을 벌이고 이에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과학자, 축산농민, 도축장, 정부, 동물단체 등)이 충분히 ‘협의’를 하도록 맡긴다. 그 다음에 하원에서는 공동 세계에서 기존 구성원들과 프리온의 양립 가능성을 평가하고 상대적 위치를 조정하는 ‘위계’ 부여를 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프리온에 대해서는 논의를 종결하고 ‘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상원과 하원이라 한 것은 비유적 용어이고 공동 세계의 구성을 위한 의사결정의 권한을 그렇게 나누자는 것이다. 요점은 이러한 정치 모델에서 자연/사회, 사실/가치의 이분법은 마침내 사라지며, 모든 사물들이 관련 행위자들의 논란과 협의 및 조정을 거쳐야만 공동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으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은 지구적 혼돈과 생태위기 시대에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는 이들에게 참신한 의제와 통찰을 던져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환석/국민대 교수







 

» 김환석/국민대 교수
 
김환석씨는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대 임페리얼칼리지에서 과학기술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이며, 시민과학센터 소장과 유네스코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으로 활동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과학사회학의 쟁점들>(문학과지성사), 번역한 책으로는 <과학학의 이해>(당대) 등이 있고, 현재 라투르의 책 <자연의 정치학>과 <사회학의 재구성>을 번역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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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공적 결정과 ‘내 삶’ 직결… 참여가 시민되기 첫걸음

김상봉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이번에 주신 글에서 제 가슴 깊이 다가온 것은 우리 모두는 값없이 빚지고 사는 감사해야 할 존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 개인이 이룬 것들조차 사실 사회·자연·타인의 도움 없이 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공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감사야말로, 그리하여 그것이 낳는 헌신(의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필수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적’ 시민으로서의 세금은 ‘세금폭탄’이라고 결사 반대하면서도 수십배의 ‘사적’ 사교육비·조기유학비·유흥비는 아낌없이 소비·탕진하는 이율배반은 시민윤리와 개인윤리의 파탄이다. 한 시민사회단체의 종부세 세율 인하 반대 집회(사진 왼쪽). 어머니와 함께 공항 출국장으로 향하는 조기 유학생들.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을 논하는 오늘은 저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공화국의 의미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1988년의 어떤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워싱턴에서 미국의회인턴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국무성 한국과에서 한·미관계에 대한 토론이 있어 동료와 함께 발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광주학살에서 미국의 책임문제를 제기해 격한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국무성 한국과장이 얼굴을 붉히며 방을 나가버리는 작은 ‘외교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의회인턴은, 한·미의회의 공식 교환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국무성 안에서의 이 충돌은 ‘사고’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저는 “전두환은 미워해도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하기에 광주학살이 부끄럽다”고 말하였는데 이후 이 말은 늘 제 마음 한쪽에 자리해왔습니다. 그날 저는 사랑할 만한 조국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워싱턴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큰한 콧날과 굵은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이때의 체험은 제게 ‘국가의 일’과 ‘시민의 일’ ‘바른 나라 사랑’에 대해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직결됩니다. 개인 능력을 함양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둘러싼 사회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개인문제와 사회문제는 연결되어 있고, 또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은 함께 가기 때문에 공적 문제는 곧 자기문제이기도 합니다. ‘현실’과 유리된 내 삶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 국가·전체·정치·사회에 의해 결정됩니다. 국가가 전쟁 중일 때 개인 삶이 평화롭고 영혼이 안녕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종종 생명 자체가 국가 및 전체 상황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칸트가 힘주어 공화국 구성원리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강조한 소이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국가·사회가 개인의 ‘현실’ 결정
전체문제 관심 갖는 것은 당연


멀어 보이는 전쟁과 평화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의료·육아·교육·식품안전 문제를 포함해 나 혼자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한 국가공동체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을 때 (내게)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전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유를 포함해 우리들 삶의 핵심 가치와 조건을 둘러싼 문제는 대부분 전체적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바른 역할을 하는 국가 공동체를 세운다면 우리 삶은 개인적으로도 정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의 조건으로서의 참된 공화국이지요. 저는 그래서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은 같은 문제를 두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공화국 시민은 국가구성의 최종 주권자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의식적인 시민의 존재 없는 참된 공화국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은, 특히 근대 이래의 민주적 공화국은 시민주권성과 시민주체성에 바탕을 두고 건설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요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인민·시민의 주권 없는, 주권의 양도를 통하지 않은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기에 시민들은 국가에 당연히 생명·주권·안전의 보장을 요구할 권한이 존재합니다. 필수 생존과 생활 요소로서의 자유와 질서 유지에의 요구는 이로부터 발원하며, ‘국가안보’와 ‘국가안전’의 궁극적 목적과 귀결 역시 ‘인간안보’와 ‘인간안전’에 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공화국 시민의 권한은 거꾸로 참된 공화국의 구성, 즉 국가의 일로 승화됩니다. 루소가 자유 없는 애국, 시민 없는 조국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의 공화적 의미와 가치는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결과 공화국 시민의 ‘권한’에서 ‘책임’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내재적 인과를 구성합니다. 저는 그 핵심을 참여·절제·평등으로 봅니다. 먼저, 자기가 구성한 공동체의 개선을 위한 참여는 권한이자 책임의 이중성을 갖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타자·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자 자기 삶의 개선을 위한 자기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자유와 책임의 필연적 연계이기도 하고요. 결국 공동체에 대한 요구와 책임의 통합이 바로 공적 문제에의 참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국가를 도둑으로 보는 선생님의 견해는 저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공적 참여를 개인, 국가, 세계(인류)를 연결하는 요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정 국가의 시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인류에의 의무와 은혜, 연대가 국가에 대한 그것에 앞선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개인 차원의 연대와 시혜·자선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루소나 칸트는 물론 근대 한국의 공화주의자들이, 참된 공화국의 건설을 통한 개인자유와 세계시민연대·인류애·평화를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동체 개선을 위한 공적 참여는
개인·국가·세계를 연결하는 요체


저는 최근 한말~20세기 초의 안중근·신채호·이승만·기미독립선언·조소앙·여운형의 사상이 어떻게 민족주의-제국주의(탈민족주의) 이분법을 넘어 개인해방·자유·평등·인권과 독립국가 건설, 세계 및 동양평화·인류애라는 세 차원(개인-국가-세계)을 동시에 말할 수 있었는가, 그 도저한 보편주의를 탐색하는 가운데 개인과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으로서 공화국 위치지우기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이것은 서구 공화주의자들이나, 말씀하신 함석헌에게서도 발견되는 점으로서 동료 시민·개인과 공동체·공화국에 대한 대승적이며 통합적인 양면 연대와 사랑을 함의하는 카리타스(caritas), 또는 카리타스 레이푸블리케(caritas reipublicae)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서 인간·인류·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원천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최근 G20에서의 합의는,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가 파괴시킨 국가의 일과 개인사랑, 세계연대를 회복하기 위한 내용을 약간은 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시민들의 참여가 없다면, 즉 무관심과 불참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공적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무관심과 불참은 공동체를 위해서는 물론 자기 삶의 개선을 위해서도 바른 선택이 결코 아니지요. 공동체에의 참여는 공화국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참여 없이 개선되고 발전하는 공화국 전체와 나의 문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화국의 수준은 공화국 시민참여의 수준이자 궁극적으로는 시민의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공적 결정이 바로 나의 삶에 직결되어 있다는 의식이야말로 공화국 시민되기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절제·배려는 시민의 핵심덕목
상류층, 헌신은 없고 욕망 집착


시민덕성으로서의 책임이 필수적인 이유는, 과도한 자유와 방종이 초래할 공공성·공화성·공동체의, 나아가 타자(와 자기) 삶의 파괴 때문입니다. 즉 절제와 배려는 공화국 시민의 핵심 덕목입니다. 절제는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인 인간이 공적 주체성과 책임을 깨닫는 필수 요목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일부 상류층의 문제점은, 전체 공동체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과 애정이 없거나 지극히 파당적이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는 절제를 모를 정도로 집요하다는 점입니다. 개인적 재물과 욕망에 대한 집착에 비하면 시민적 공공적 요구에 대한 자각과 헌신은 너무 적습니다. 예컨대 ‘공적’ 시민으로서의 세금은 세금폭탄이라고 결사반대하면서도 수십배의 ‘사적’ 사교육비·조기유학비·유흥비·뇌물은 전혀 아낌없이 소비하고 탕진하고 있습니다. 이 이율배반은 시민윤리와 개인윤리의 동시 파탄이지요.

기실, 책임의 동의어인 절제는 시민윤리이기에 앞서 실용적으로도 개인 삶의 자유에 기여합니다. 예컨대 공교육을 위한 증세·시민부담과 고른 혜택으로 공동체가 자녀교육을 상당 부분 책임지면 자신의 경제적 문화적 삶은 그만큼 윤택해집니다. 언제까지나 개별 사교육과 조기유학으로 세대·사회·인간 문제로서의 교육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만약 공동체·국가의 적절한 역할을 거치지 않는 절제 없는 개별화와 사사화가 세계적 차원의 개별화·무한경쟁·불평등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끝내, 과거의 독점·파시즘·전쟁과 금번의 월가붕괴가 보여주듯, 개인과 공동체의 공동 파탄을 결과할 뿐입니다. 무한 자유화와 사사화가 궁극적 인간문제와 사회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의 월가붕괴를 통해서도 확인되었습니다만, 저는 개인 삶 역시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자신의 그것을 위해서라도 공공적 가치와 균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평등은 ‘인간다운 사회’ 전제
지역·지방·생활 현장 참여를


공화국 시민의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인간적 사회적 차별금지, 즉 평등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역시 나와 같은 공동체의 독립적 성원임을 인정하고 대우하는 예의인 것이지요. 거기에서 비로소 인간을 자기 욕망과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인간다운 사회로서의’ 공화국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인간사랑과 공동체 사랑, 상호 신뢰와 대화의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공화주의를 꿈꿨던 한국과 세계의 사상·이론들이 모두 평등을, 특히 인간적 평등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평등을 공화국의 기저가치로 여겼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인간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평등한가, 서로 얼마나 목적적 존재로 대우하고 있나, 참으로 무거운 마음입니다.

결국 근본 출발로서의 튼튼한 시민윤리적, 또는 사회윤리적 하부구조를 구축하지 않고는 참된 공화국의 구성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젠 시민 개개인이 좋은 삶, 좋은 공화국을 위한 결단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크빌 같은 민주주의자들·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듯 삶의 현장인 지역·지방·생활 단위의 자치와 참여가 너무 중요합니다. 이곳이 바로 시민성·연대성·공화성이 실험되고 발현되는 최초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세계는 그 연장이지요. 우리 모두는 참된 삶을 위해 반드시 전체·국가·타인·세계를 생각해야 하는 ‘공화적 계기’(republican moment)에 직면합니다. 즉 공화적 참여, 공화적 지혜, 공화적 책임의 계기를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이지요. 
 

 

 

 

 


선생님. 희망 없는 공동체라고 해서 우리 시민들조차 희망 없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먼저 희망 있는 시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권한과 책임을 함께 행사하는 희망의 시민만이 자유와 정의가 넘실대는 희망공동체, 희망공화국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겁고도 소망스러운, 가슴 먹먹한 책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 시대의, 그리고 다음 세대의 희망을 선생님과 함께 이 아침에 묵상해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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