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공적 결정과 ‘내 삶’ 직결… 참여가 시민되기 첫걸음

김상봉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이번에 주신 글에서 제 가슴 깊이 다가온 것은 우리 모두는 값없이 빚지고 사는 감사해야 할 존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 개인이 이룬 것들조차 사실 사회·자연·타인의 도움 없이 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공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감사야말로, 그리하여 그것이 낳는 헌신(의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필수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적’ 시민으로서의 세금은 ‘세금폭탄’이라고 결사 반대하면서도 수십배의 ‘사적’ 사교육비·조기유학비·유흥비는 아낌없이 소비·탕진하는 이율배반은 시민윤리와 개인윤리의 파탄이다. 한 시민사회단체의 종부세 세율 인하 반대 집회(사진 왼쪽). 어머니와 함께 공항 출국장으로 향하는 조기 유학생들.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을 논하는 오늘은 저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공화국의 의미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1988년의 어떤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워싱턴에서 미국의회인턴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국무성 한국과에서 한·미관계에 대한 토론이 있어 동료와 함께 발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광주학살에서 미국의 책임문제를 제기해 격한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국무성 한국과장이 얼굴을 붉히며 방을 나가버리는 작은 ‘외교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의회인턴은, 한·미의회의 공식 교환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국무성 안에서의 이 충돌은 ‘사고’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저는 “전두환은 미워해도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하기에 광주학살이 부끄럽다”고 말하였는데 이후 이 말은 늘 제 마음 한쪽에 자리해왔습니다. 그날 저는 사랑할 만한 조국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워싱턴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큰한 콧날과 굵은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이때의 체험은 제게 ‘국가의 일’과 ‘시민의 일’ ‘바른 나라 사랑’에 대해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직결됩니다. 개인 능력을 함양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둘러싼 사회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개인문제와 사회문제는 연결되어 있고, 또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은 함께 가기 때문에 공적 문제는 곧 자기문제이기도 합니다. ‘현실’과 유리된 내 삶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 국가·전체·정치·사회에 의해 결정됩니다. 국가가 전쟁 중일 때 개인 삶이 평화롭고 영혼이 안녕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종종 생명 자체가 국가 및 전체 상황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칸트가 힘주어 공화국 구성원리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강조한 소이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국가·사회가 개인의 ‘현실’ 결정
전체문제 관심 갖는 것은 당연


멀어 보이는 전쟁과 평화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의료·육아·교육·식품안전 문제를 포함해 나 혼자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한 국가공동체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을 때 (내게)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전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유를 포함해 우리들 삶의 핵심 가치와 조건을 둘러싼 문제는 대부분 전체적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바른 역할을 하는 국가 공동체를 세운다면 우리 삶은 개인적으로도 정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의 조건으로서의 참된 공화국이지요. 저는 그래서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은 같은 문제를 두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공화국 시민은 국가구성의 최종 주권자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의식적인 시민의 존재 없는 참된 공화국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은, 특히 근대 이래의 민주적 공화국은 시민주권성과 시민주체성에 바탕을 두고 건설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요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인민·시민의 주권 없는, 주권의 양도를 통하지 않은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기에 시민들은 국가에 당연히 생명·주권·안전의 보장을 요구할 권한이 존재합니다. 필수 생존과 생활 요소로서의 자유와 질서 유지에의 요구는 이로부터 발원하며, ‘국가안보’와 ‘국가안전’의 궁극적 목적과 귀결 역시 ‘인간안보’와 ‘인간안전’에 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공화국 시민의 권한은 거꾸로 참된 공화국의 구성, 즉 국가의 일로 승화됩니다. 루소가 자유 없는 애국, 시민 없는 조국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의 공화적 의미와 가치는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결과 공화국 시민의 ‘권한’에서 ‘책임’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내재적 인과를 구성합니다. 저는 그 핵심을 참여·절제·평등으로 봅니다. 먼저, 자기가 구성한 공동체의 개선을 위한 참여는 권한이자 책임의 이중성을 갖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타자·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자 자기 삶의 개선을 위한 자기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자유와 책임의 필연적 연계이기도 하고요. 결국 공동체에 대한 요구와 책임의 통합이 바로 공적 문제에의 참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국가를 도둑으로 보는 선생님의 견해는 저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공적 참여를 개인, 국가, 세계(인류)를 연결하는 요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특정 국가의 시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인류에의 의무와 은혜, 연대가 국가에 대한 그것에 앞선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개인 차원의 연대와 시혜·자선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루소나 칸트는 물론 근대 한국의 공화주의자들이, 참된 공화국의 건설을 통한 개인자유와 세계시민연대·인류애·평화를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동체 개선을 위한 공적 참여는
개인·국가·세계를 연결하는 요체


저는 최근 한말~20세기 초의 안중근·신채호·이승만·기미독립선언·조소앙·여운형의 사상이 어떻게 민족주의-제국주의(탈민족주의) 이분법을 넘어 개인해방·자유·평등·인권과 독립국가 건설, 세계 및 동양평화·인류애라는 세 차원(개인-국가-세계)을 동시에 말할 수 있었는가, 그 도저한 보편주의를 탐색하는 가운데 개인과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으로서 공화국 위치지우기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이것은 서구 공화주의자들이나, 말씀하신 함석헌에게서도 발견되는 점으로서 동료 시민·개인과 공동체·공화국에 대한 대승적이며 통합적인 양면 연대와 사랑을 함의하는 카리타스(caritas), 또는 카리타스 레이푸블리케(caritas reipublicae)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서 인간·인류·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원천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최근 G20에서의 합의는,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가 파괴시킨 국가의 일과 개인사랑, 세계연대를 회복하기 위한 내용을 약간은 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시민들의 참여가 없다면, 즉 무관심과 불참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공적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무관심과 불참은 공동체를 위해서는 물론 자기 삶의 개선을 위해서도 바른 선택이 결코 아니지요. 공동체에의 참여는 공화국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참여 없이 개선되고 발전하는 공화국 전체와 나의 문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화국의 수준은 공화국 시민참여의 수준이자 궁극적으로는 시민의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공적 결정이 바로 나의 삶에 직결되어 있다는 의식이야말로 공화국 시민되기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절제·배려는 시민의 핵심덕목
상류층, 헌신은 없고 욕망 집착


시민덕성으로서의 책임이 필수적인 이유는, 과도한 자유와 방종이 초래할 공공성·공화성·공동체의, 나아가 타자(와 자기) 삶의 파괴 때문입니다. 즉 절제와 배려는 공화국 시민의 핵심 덕목입니다. 절제는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인 인간이 공적 주체성과 책임을 깨닫는 필수 요목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일부 상류층의 문제점은, 전체 공동체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과 애정이 없거나 지극히 파당적이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는 절제를 모를 정도로 집요하다는 점입니다. 개인적 재물과 욕망에 대한 집착에 비하면 시민적 공공적 요구에 대한 자각과 헌신은 너무 적습니다. 예컨대 ‘공적’ 시민으로서의 세금은 세금폭탄이라고 결사반대하면서도 수십배의 ‘사적’ 사교육비·조기유학비·유흥비·뇌물은 전혀 아낌없이 소비하고 탕진하고 있습니다. 이 이율배반은 시민윤리와 개인윤리의 동시 파탄이지요.

기실, 책임의 동의어인 절제는 시민윤리이기에 앞서 실용적으로도 개인 삶의 자유에 기여합니다. 예컨대 공교육을 위한 증세·시민부담과 고른 혜택으로 공동체가 자녀교육을 상당 부분 책임지면 자신의 경제적 문화적 삶은 그만큼 윤택해집니다. 언제까지나 개별 사교육과 조기유학으로 세대·사회·인간 문제로서의 교육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만약 공동체·국가의 적절한 역할을 거치지 않는 절제 없는 개별화와 사사화가 세계적 차원의 개별화·무한경쟁·불평등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끝내, 과거의 독점·파시즘·전쟁과 금번의 월가붕괴가 보여주듯, 개인과 공동체의 공동 파탄을 결과할 뿐입니다. 무한 자유화와 사사화가 궁극적 인간문제와 사회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의 월가붕괴를 통해서도 확인되었습니다만, 저는 개인 삶 역시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자신의 그것을 위해서라도 공공적 가치와 균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평등은 ‘인간다운 사회’ 전제
지역·지방·생활 현장 참여를


공화국 시민의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인간적 사회적 차별금지, 즉 평등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역시 나와 같은 공동체의 독립적 성원임을 인정하고 대우하는 예의인 것이지요. 거기에서 비로소 인간을 자기 욕망과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인간다운 사회로서의’ 공화국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인간사랑과 공동체 사랑, 상호 신뢰와 대화의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공화주의를 꿈꿨던 한국과 세계의 사상·이론들이 모두 평등을, 특히 인간적 평등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평등을 공화국의 기저가치로 여겼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인간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평등한가, 서로 얼마나 목적적 존재로 대우하고 있나, 참으로 무거운 마음입니다.

결국 근본 출발로서의 튼튼한 시민윤리적, 또는 사회윤리적 하부구조를 구축하지 않고는 참된 공화국의 구성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젠 시민 개개인이 좋은 삶, 좋은 공화국을 위한 결단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크빌 같은 민주주의자들·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듯 삶의 현장인 지역·지방·생활 단위의 자치와 참여가 너무 중요합니다. 이곳이 바로 시민성·연대성·공화성이 실험되고 발현되는 최초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세계는 그 연장이지요. 우리 모두는 참된 삶을 위해 반드시 전체·국가·타인·세계를 생각해야 하는 ‘공화적 계기’(republican moment)에 직면합니다. 즉 공화적 참여, 공화적 지혜, 공화적 책임의 계기를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공화국 시민의 권한과 책임이지요. 
 

 

 

 

 


선생님. 희망 없는 공동체라고 해서 우리 시민들조차 희망 없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먼저 희망 있는 시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권한과 책임을 함께 행사하는 희망의 시민만이 자유와 정의가 넘실대는 희망공동체, 희망공화국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겁고도 소망스러운, 가슴 먹먹한 책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 시대의, 그리고 다음 세대의 희망을 선생님과 함께 이 아침에 묵상해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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