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엘마 알트파터 Elmar Altvater


엘마 알트파터는 1939년 독일의 카멘에서 태어났다. 뮌헨대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소련의 환경문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대표적인 68세대로서 당시 오펜바흐에 소재한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이론을 주도하는 핵심적 인물이었다. 1970년에는 대표적인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저널인 ‘계급투쟁의 문제’(PROKLA)를 창간하고, 2008년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저널은 창간호부터 서독 내 국가독점자본주의론자들과 수준 높은 논쟁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저널에서 당시로서는 선구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통화시스템, 금융시장 및 세계시장의 문제를 이론화하였다. 알트파터는 1971년에 베를린대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2008년에 은퇴할 때까지 자본주의 발전론, 금융시장 및 통화시스템, 나아가서 자본주의 경제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의 문제를 연구주제로 삼았다. 알트파터는 독일 녹색당의 창당당원이었으나 1990년대 후반 적록연정정부가 코소보전쟁에 개입한 뒤 거리를 두고 있다. 다수의 저작 중 <세계화의 한계>(1996)는 세계화에 대한 탁월한 비판서이며, 국내에는 <자본주의의 종말>(2005)이 번역되어 있다.

 

 

 


엘마 알트파터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유 금융-석유 의존-노동 경시에서 왔다고 보고 지속 가능한 생태 경제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는, 대체에너지의 확보는 그 자체로 화석에너지를 축으로 한 기존 권력의 해체를 뜻한다고 본다. 새 대안사회가 출현해 화폐와 자연, 노동이 재구성 되는 순간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 엘마 알트파터
 

독일의 원로 사회학자 엘마 알트파터는 전세계적으로 불평등과 빈곤이 증가하고, 이러한 현상이 문명사회의 위험이 되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러한 비판은 19세기 및 20세기에 있었던 자본주의 비판과는 달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2008년 하반기에 다시 찾아온 자본주의 위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상적인 자본주의 위기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해온 주기적 위기의 발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역사에서 발발한 위기의 성격, 그리고 사회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지 등을 포함한 위기 극복 가능성이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이 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일종의 강장제처럼 작용하였다. 자본주의는 위기 속에서 끊임없는 자정능력을 보여주었으며, 그 안에서 신기술(반도체, 생명공학기술 등)과 신상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초를 발견하였다.

알트파터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본주의 위기 경향은 화폐·자연·노동이라는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 기초하고 있다. 위기의 첫 번째 차원인 화폐는 마르크스가 강조하였듯이 화폐를 통해 상품이 교환되며, 그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적 존재가 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화폐가 위기에 처하면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되며, 이는 노동의 위기, 나아가서 인간 삶의 근거가 되는 자연의 위기로 전화된다. 알트파터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화폐의 위기는 금융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이는 20세기 후반기에 시작된 것으로 그 이전의 화폐위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 곧 국제적 차원에서의 금융시스템의 자립화 경향을 핵심으로 한다. 1970년대 초반의 변동환율제 도입과 금융시장의 자율화, 1980년대 제3세계의 외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워싱턴 컨센서스, 1997~98년 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적 금융위기, 2000~01년의 신경제 위기, 그리고 최근의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금융위기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왔다. 이제 금융위기는 정치적 규제 없이는 탈출구를 발견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위기의 두 번째 차원은 환경, 특히 화석에너지와 관계된다. 산업자본주의가 출현한 이후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본주의 성장을 가속화하였다. 발전의 가속화는 동일한 시간단위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이러한 경쟁은 지역과 국가 단위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석탄·석유와 같은 화석화된 에너지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이 발생함에 따라 화석화된 에너지의 소모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몇 차례 발생한 석유파동에서 보듯 제한된 석유자원의 공급은 시장의 가격을 불안정하게 한다. 따라서 소위 자본주의 선진국가들은 자원의 확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쟁은 화석화된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국제적 경쟁, 곧 군사적 경쟁으로 발전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라크 전쟁은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안보전략의 일환이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지역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석유자원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국의 안보전략은 군사적 요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럴수록 위험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알트파터는 화석에너지의 위기가 필연적으로 경제 및 사회 시스템, 나아가서 군사적 요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화석에너지의 경쟁적 소모는 지구온난화에도 영향을 미쳐 급속도로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위기의 세 번째 차원은 노동이다. 알트파터는 세계화된 금융시장자본주의에서 기본적으로 노동이 경시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금융시장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소득을 획득하기보다는 주가 상승을 통해 주식시장에서의 일확천금을 기대한다. 일반적으로 산업자본의 시대에 사람들이 고용을 통해 정기적으로 소득을 얻고,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승진을 기대하는 등의 평범한 노동자들의 전기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주식시장에서 기업가치가 낮아지면 장기적인 기업의 성장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대규모 해고가 이루어진다. 나아가서 기업의 시장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비정규 노동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전 인구의 90%, 라틴아메리카에서는 60%가, 심지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30% 이상이 비정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은 사회정책적 혜택도 온전히 누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알트파터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경향에 반하여 대안으로 ‘연대의 경제’를 제시한다. 이는 실현 불가능한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같은 구체적 실험 속에서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는 공동체의 재발견이다. 나아가서 알트파터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로서 화석에너지를 대체한 태양에너지 사회를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에너지 자원의 대체만을 의미하는 순진한 표현이 아니다. 알트파터에 의하면 자본주의 핵심세력의 힘은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한 에너지 자원의 공급권을 확보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대체에너지 자원의 확보는 그 자체로 기존 권력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례로 알트파터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권력을 교체하고 소유관계를 바꾸었지만,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양식 체계를 수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안사회의 실현에 실패하였다고 본다. 이제 새로운 대안사회의 출현은 화폐·자연·노동의 재구성을 탐색하는 새로운 기획 속에서 가능할 것이며, 그러한 기획이 실현되는 순간, 알트파터는 현존하는 자본주의의 종말이 도래할 것으로 본다.

임운택/계명대 교수



 




 

» 임운택/계명대 교수
 
임운택은 한양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독일 마르부르크대에서 프랑크 데페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세계화와 여성안보>(공저), <주주자본주의에 따른 기업지배구조 및 노사관계의 변화>(공저), <노조운동의 사회경제정책-신케인즈주의와 제3의 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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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사회로 가려면 ‘사회적 내부통합’ 선결돼야

김상봉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사실 지난 번에 교육문제에 대해 편지를 쓰면서 선생님께서 이 분야의 전문가이자 활발한 저술과 실천 활동을 해오고 계셔서 주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대담 준거가 공화국이고, 또 한국교육이 워낙 문제가 많다보니 비슷한 생각을 폭넓게 공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가 반성이 필요한 대학교사라는 공통점도 작용하였던 것 같고요. 사실 한국에서 교육문제는 공동체 성원 누구나 이대로는 안된다고 느끼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우리 주변에서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우리와 그들’이라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작동해 이주민들을 쫓아내거나 ‘우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사진은 불법 이주노동자 단속·추방에 항의해 집회를 여는 외국인 노동자들(왼쪽), 그리고 한국의 차례상 차리기를 배우는 다문화가정의 며느리들의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오늘의 대담 주제는 ‘근본주의를 넘어 다문화사회로’인데 말씀하신 대로 이 문제 역시 공화국과 연결시켜 논의하기에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점들에 대해, 진단과 대안을 포함해 저 역시 모두 동의하고요. 다만 한 가지 억울한(?) 점은 있습니다. 제가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선생님께서 인문학을 전공하셔서 그동안의 대담처럼 제가 이런저런 통계에 바탕해 말씀드리려고 준비해두었던 자료를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선생님께서 먼저 상세한 통계에 바탕해 말씀을 해주셔서요.

경제선진국·지리적 요충지 한국‘들어오는 세계화’ 단계로 진입

저희 대담의 초반에 제가 ‘공준 없는 공동체’로서 한국사회의 본질을 언급하면서 공준 부재를 대체한 주요 현상의 하나로 사회의 근본화·근본주의를 말씀드렸는데 저는 그때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근본화·근본주의의 문제는 생래적이거나 원초적인 단위로 돌아가 인간과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와 정향으로서 더 넓고 큰 정체성·단위·연대에 대한 사유를 차단합니다. 따라서 공통점보다는 구별짓기·차별을 강조하는 것도 근본주의의 기본 속성이고요. 근본주의가 인종, 종족, 종교, 지역, 종파, 언어의 계선을 따라 형성·강화되는 소이는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원성을 넘을 때 그것은 자주 공준 또는 공동가치 창출에 장애를 초래하거나 심각한 내부 충돌 요소로 작용하지요.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사회는 지금 객관적으로 갑작스레 다문화 사회로 가지 않으면 안될 사회적 조건 및 흐름과 그것에 대한 내면적 저항 및 거부가 공존하는 기묘한 이중현상, 충돌상황에 놓여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랜 ‘단일 민족사회’, ‘역사적 국가’의 전통에 대한 신화적·현실적 관념이 이 객관적 현실에 대한 불편한 대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면에서 압축발전을 통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노정해온 현대 한국사회이지만 장구한 단일 정치공동체 역사에 비하면 최근의 급격하고도 불가피한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은 그 속도와 정도 면에서 너무도 급작스러운 압축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한국의 사회적·문화적 변동 요소 중 양극화와 함께 이보다 더 거시적·근본적인 것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급격한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에는 몇 가지 큰 흐름과 요인이 존재합니다. 먼저 지역통합과 세계화의 흐름입니다. 세계화와 지역통합으로 인해 한국이 국경을 넘는 이동의 산물인 다문화 사회로 가는 것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특히 한국으로부터 ‘나아가는 세계화’(outbound globalization)의 단계를 지나자 이제 한국으로 ‘들어오는 세계화’(inbound globalization) 단계를 맞고 있습니다. 여기에선 내부문제가 중요합니다. 말씀하신 출산율과 결혼문제, 농촌문제를 포함해 사회의 양극화 및 붕괴가 이러한 ‘들어오는 세계화’ 수요를 더욱 촉진하고 있지요. 게다가 한국의 사회·경제적 선진국 진입과 함께 재편되는 지역적 노동분업구조 역시 동남아, 서남아, 중국, 만주, 북한을 포함한 인근 국가와 지역으로부터의 한국으로의 하층 편입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사회계층의 국제적·지역적 분업구조와 재편현상의 산물인 것이지요.

외국인 노동자·탈북자 하층 편입…우리 안의 양극화 해소 급선무

게다가 한국은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특별한 교량의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오랫동안 동쪽과 대륙 방면이 꽉 막혀 있다가 다시 그곳이 열리면서 사통팔달의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은 교량과 가교로서의 한국의 지리적·지문화적(geo-cultural) 위치로부터 비롯된 바 아주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 다문화사회의 도래는 외부적 충격 또는 이물질화(異物質化)라거나 단기적 변화의 산물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지리적 위치 및 거시적 사회변화에 비추어 오히려 더 발전적이며 바람직한 요소로서 해석하고 대면해야 할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내부 변화에 바탕한 적극적 수용을 통한 긍정요소로의 전변이 어느 정도나 가능하겠냐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이미 접어든 다문화 사회를 잘 수용하고 적응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내부 문제의 극복이라고 봅니다. 이들 비국민을 동등한 국민으로, 시민으로, 인간으로 대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 내부의 정신적·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결요건입니다. 동일한 정체성을 갖는 국민조차 상층과 하층, 도시와 농촌, 엘리트와 대중, 일등 국민과 이등 국민, 지배와 배제, 주류와 비주류,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후자에 대해 우리 내면의 인간적 구별짓기와 차별이 지속되는 한, 이미 우리 사회의 객관적 일부로 자리잡은 다문화가정과 다문화인이 우리 내면의 정신세계 속에서 같은 국민·시민·인간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사회적 양극화가 빠르게 갈라놓는 우리들 정신과 영혼의 내면적 양극화를 보며 저는 다문화가정과 다문화인들이 한국사회에 내면적·정신적으로 통합되지 못할 때 미래에 우리가 어떤 모습의 사회를 갖게 될지, 또 어떤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 두렵습니다. 다문화사회의 빈발하는 갈등과 저항이 두 사회, 두 문화, 두 정체성, 두 세계의 평행화로부터 연유하는 최근의 세계적 현상을 볼 때, 그때에도 과연 한국 사회가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하나의 공화국으로서 외양과 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두 국민, 두 사회, 두 조직, 두 인식, 두 문화로 존재하며 한국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사회통합을 위한 국가의 사회경제정책 및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기존 ‘국민들’의 의식혁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세계화 시대 누구나 이민자·소수자…단일문화·다문화 분리 넘어서야

기실 이주노동자, 국제결혼, 단기 체류자, 이민자에 대한 그동안의 한국사회의 인식과 처우는 우리의 문명성과 국격, 집합적 인간성을 엄중히 묻는 수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빈발하는 숱한 부당대우와 인간적 억압·노동착취, 기업화·인신 거래화·씨받이화한 일부 국제결혼, 교육적·문화적·언어적·정책적 통합 장치의 결여,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화… 등을 보면 일부 국가와 지역에서 한국의 집합적 차별에 항의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저는 전공 상 자주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한국과 동아시아문제에 대해 발표나 토론을 하는 편입니다만, 일부 근방 지역과 국가의 국민들이 한국에서, 또는 한국민들로부터 당한 대우 및 그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최소한의 문명과 양심,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는 사회인지조차 돌아보게 만들 지경이었습니다. 옌볜동포와 탈북자들, 그나마 옛 고국이라고 찾아온 그들 소수자에게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와 자세를 보면 저들이 느낄 분노와 저항의 마음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잘 사는 나라에서 온 국민들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또 정반대이지요. 외려 아무 자격 없는 사람에게조차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지불하면서 영어를 배우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네 모습과 시민의식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 한국인들의 물질주의 및 그에 바탕한 인간차별은 내부와 다문화는 물론 아예 국경을 넘나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 처녀와 결혼하세요”와 같은 지독한 인종차별적, 성차별적인 플래카드가 이토록 오랫동안 민주국가의 수도를 포함해 도시와 농촌의 대로 곳곳에 공개적으로 걸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고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들 비국민을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는 법률, 그중에서도 특히 헌법을 바꾸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헌법의 ‘모든 국민은’에 관한 수많은 조항들은, 특히 권리조항들은 이제 ‘누구나’, ‘모든 인간은’, ‘모든 시민은’이란 주어로 바뀌어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진민주국가의 많은 헌법들은 이러한 정신을 반영해 벌써 국민권리가 아닌 인간권리 장전으로서의 헌법기능을 상정하고 있지요. 우리가 참된 공화국을 구성하려 한다면 ‘국민’ 이전에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동등하면서도 보편적으로 공화국 근본법으로서의 헌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문화 하나의 공동체로 수용하는 국민 의식혁명과 헌법개정 필요

모든 인간은 사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영원한 이민자이고 소수자이며 비주류입니다. 근대로의 진입 이후의 고난으로 인해 한국민들 현재 인구의 11%가 해외에 거주할 만큼 이미 글로벌 소수자, 비주류, 이민자의 역사를 가장 대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태인에 비견하여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세계의 다문화 사회 진입을 통한 혜택을 크게 받은 한국민들이 내부에서 다문화주의를 배척하는 것이야말로 이중적 이기성의 발로로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정주 관념과 관행, 단일 정체성이 크게 약해진 21세기 들어 ‘만인의 소수자화’ ‘이민자화’는 더욱 더 그러하지요. 누구도 이 세계화와 디지털 시대에 영토적·공간적 정주를 통한 우위성과 차별을 주장하고 강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한 사람 역시 이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세계화 시대의 모든 인간은 삶을 마칠 때까지 필연적으로 여러 차례 소수자의 위치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우리가 다수자, 주류, 순혈자, 정통, 정주자의 관점에서 소수자, 혼성자, 이주자, 비주류를 차별하고 공격한다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차별받고 공격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문화 자체가 인종차별적, 문화차별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표현임을 고려하여 이제 우린 단일문화와 다문화의 분리 자체를 넘어서야 합니다. 인간들 사이의 어떤 차별과 격차도 인간으로서의 공통점을 초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단일성, 통일성, 순수성보다는 다원성, 혼성성, 복합성이 정체성의 확장을 통해 오히려 사회통합에 더 낫다는 점을 우리 모두 이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존의 협애한 종족, 문화 정체성 확인과 고착은 자기 위축과 축소로 연결되므로, 이를 넘어 타자 및 타공동체와의 정체성 중첩을 통해, 즉 새롭고도 공통적인 국가·지역·세계시민 정체성의 창출을 통해 자아 및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범주를 넓혀갈 때 우린 비로소 자기로부터 타자, 국가, 그리고 세계로 나아가며 연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담이 막바지에 다다르니 오히려 더욱 어려워짐을 느낍니다. 평안하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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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다문화 사회는 거부할 수 없는 ‘현대적 삶의 조건’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지난번에 주신 글은 잘 보았습니다. 저는 ‘학벌 없는 사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육운동에 참여해 왔고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만, 지난번 글을 쓸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말미암아 정작 교육에 대해 할 말을 다 못했는데, 선생님께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오늘 주제는 ‘근본주의를 넘어 다문화사회로’인데, 우리 대화가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저는 이제 험한 산은 다 넘은 줄 알았더니 이 문제야말로 쉽게 넘을 수 없는 정말 험하고 높은 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급속한 외국인 거주자 증가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느냐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장래를 위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과제가 됐다. 바람직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두 가지 대원칙은 외국인을 한갓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일단 받아들인 외국인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의 거친 손. | 경향신문 자료사진 


군말 없이 먼저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8년 현재 외국인의 수는 144만명 정도가 됩니다. 이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는 70만명가량인데 그중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의 수가 약 20만명 정도라는군요. 다른 한편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2008년 새로 결혼한 사람들 가운데 11%가 외국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농촌 지역의 경우는 무려 41%가 외국인과의 결혼이랍니다.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다문화가정의 자녀 수 역시 계속 증가하는 추세여서 작년 기준으로 5만8000명이었으나, 2010년에는 10만명이 넘을 것이라 하고 2020년이 되면 16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통계 전문가가 아니어서 이런 예상치가 정확히 어떻게 계산되어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세한 숫자에서 조금씩 예상이 빗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앞으로도 이 추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 최저수준의 한국 출산율 외국인 거주자 증가는 필연적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국제결혼을 통한 이민자 외에도 한국 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가운데 일부를 이루는 사람들이 학생들입니다. 학위취득이나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한국의 전문대학 이상 고등교육기관에 적을 두고 있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숫자는 2004년 1만6832명이었던 것이 2007년에는 4만9270명으로 급증하는 추세를 보여주는데, 이 숫자 역시 당분간 줄어들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장 저의 경우만 하더라도 다음 학기에는 베트남에서 오는 유학생을 박사과정에서 제자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단기 체류자들이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한국 사회에 거주하는 주민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고, 한국 사회의 필요에 따라서 이들은 언제라도 장기체류자나 이주민으로 바뀔 수 있는 사람들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더 늘어나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근거를 댈 수 있겠지만, 저는 다른 무엇보다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의 출산율을 고려하면, 그것이 거의 필연적인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비인간적인 교육환경과 점점 더 열악해지는 노동조건, 그리고 맹목적인 자본숭배 아래서 전반적으로 반생명적인 문화는 점점 더 출산 자체를 축복받지 못하는 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여성이 임신하면 축하하기보다 어떻게 낳고 키우고 교육시킬지 걱정부터 먼저 해야 하는 사회에서 출산율이 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그런 사회를 바꾸어야 하겠지만 하루 아침에 지옥이 천당이 될 수도 없는 일이니 당분간 우리는 출산율 저하를 우리가 스스로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죗값으로 알고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출산율 감소는 노동인구의 감소를 부르는데, 사회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모자란 노동력을 채워넣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외국으로부터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급속한 외국인 거주자의 증가는 한국 사회에서 전에 없던 변화이며, 그 변화가 이전에 없던 많은 문제들을 낳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 가느냐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장래를 위해 더는 무관심하게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문제에 관해 가능한 한 감정적 대응이나 관념적인 당위론을 배제하고 현실에 입각하여 우리가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할 대응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갈등·충돌 피할 수 없는 문제 ‘민족’에 갇혀 배척해선 안돼

외국인의 급속한 증가와 함께 늘어나는 외국인들의 범죄행위나 인종 간의 갈등, 그리고 문화적 차이가 낳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우려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염려를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살게 될 때 충돌과 갈등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한국인들이 다문화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부작용을 비판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폭로하고 말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 한다면, 결과적인 부작용을 비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태를 전체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문화사회의 부작용 때문이든, 단일민족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외국인 이주민들을 무작정 배척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처럼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 역시 우리나라에 와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원하면 받아들이고 원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는 가변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임의로 거부할 수 없는 현대적 삶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이 수십 년 전에 정확히 지적했듯이 우리 시대는 더 이상 민족국가가 개인의 삶의 최종적 울타리가 아니게 된 시대입니다. 이제 삶의 지평은 국가에서 세계로 넓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타인과 만나고, 노동하고 사업을 펼치며, 자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미 수백만의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데, 이제 한국 사회 내에 수백만의 외국인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용납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은 억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대적인 삶의 조건 위에서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노동력 조달·인신매매 아닌 참된 만남의 주체로 대접을

저는 이를 위해 두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외국인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회가 모든 타자를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 타자를 위해 의로운 일도 아니고 자기를 위해 지혜로운 일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 특정 계층의 남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배필을 찾기 어렵게 된 것은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서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극복하고 해결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를 일종의 대규모 국제결혼을 통해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사회에서 기업적으로 이루어져 온 국제결혼이 과연 용납될 수 있는 일인지 되물어야 합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명박 정부가 4대 강 정비라는 이름으로 운하 사업을 시작한다면, 수십 조 원이 들어가는 토목공사에 참여하는 건설 회사들은 값싼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수입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문화 사회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분별없이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칸트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한갓 수단으로 보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가르쳤는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외국인들을 받아들일 때 지켜야 할 첫째가는 원칙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외국인을 한갓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런 나라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역사의 법칙입니다.

둘째로 일단 받아들인 이주민은 참된 만남의 주체로서 대접해야 하며,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장기체류든 단기체류든, 이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인종과 직업을 막론하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대접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잘못은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민에 대한 인권침해를 여기서 세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특히 어린 아이들의 문제만 언급하려 합니다. 70만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더라도, 그렇게 태어난 새 생명은 우리 사회에서 의료와 육아 그리고 교육 모든 면에서 아무런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정부가 그 아이들에 대한 통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그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쓰고 한국인으로 자라지만 한국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된 유령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와 사정은 다르지만 대다수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경우에도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차별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학교에서는 학습부진아라고 차별받습니다. 그리고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는 혼혈아라 해서 군대에도 가지 못합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을 멈추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온 사회가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증오의 지옥불이 우리 사회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문제 풀려면 인간적 사회 돼야 그래서 참된 공화국 더욱 절실

언제나 타자는 자기의 거울입니다. 오늘 이주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들 자신이 보다 성숙해져야 하며, 우리 사회가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힘을 쏟아야 할 정부가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급기야 남의 이메일까지 뒤지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입니다.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나라에서 시민으로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 저 또한 원치 않게 고국을 등지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더 늦기 전에 이 땅에 참된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 절실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마처럼 우울한 말,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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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시장원리 아닌 ‘공동체원리의 교육’이 희망이다

김상봉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참으로 혼돈스럽고 힘든 안팎의 현실입니다. 개인문제로부터 사회문제, 나라의 안위문제에 이르기까지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의 놀랍고도 충격적인 서거까지….

한마디로 힘겨운 실존, 회색빛 전망이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상황입니다. 이제 저희 대담이, 선생님과 제가 몸담고 있는 교육문제에 다다랐습니다. 자기가 속한 영역의 문제를 다루려니 먼저 반성적 접근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소득이 많을수록 사교육비가 늘어나고 진학률이 높아지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교육이 시장화·사사화된 단적인 증거이다. 사진은 서울 대치동 학원가 버스 정류장에서 밤 늦게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귀가를 기다리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교육, 사교육 보조로 ‘본말전도’ 부모 학력·소득이 자녀교육 결정

오늘의 한국 교육현실을 볼 때 저희 역시 교사로서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육문제는 정부철학과 정책의 문제인 동시에 교육기관의 문제이며,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제이자 교사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편지를 읽으며 같은 교사로서 교육은 인간성의 자기실현 과정, 곧 사람됨의 길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람됨이란 자기 삶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는 뜻이라는 말씀을 포함해서요. 교육과 자발성, 창의성, 상상력의 관계에 관한 말씀에서 인간과 교육의 본질에 대한 선생님의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화국(의 성격·발전)과 교육은 완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무리 공동체나 조직이 어려워도 교육만 살아있으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 교육주의자에 가깝습니다. 교육이야말로 개인적 사회적 희망의 요체인 동시에, 무엇보다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시켜주는 첫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비로소 공동체의 주체적 성원이자 시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건국 이래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교육의 힘이 결정적이었고, 또 오늘날 우리가 더 발전·성숙하지 못하는 연유도 상당 부분 교육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건국 직후 한국교육은 ‘교육기적’ ‘교육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폭발적 성장을 이루어 학교설립-취학-진학-문자해독률의 기록적 상승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탈식민 국민혁명과 국가발전의 한 거시적 바탕을 이루었지요. 배우지 못해 망국과 빈곤을 겪었다고 믿는 국가와 국민으로서 특유의 ‘교육열’-이 말은 서구학계에선 한국교육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함축하는 고유어가 되었습니다-에 바탕해 국민만들기, 국민되기에 열과 성을 다 했기 때문이었지요. 헌법정신과 교육관련 법률의 기저를 이룬 ‘무상교육’ ‘균등교육’ ‘국민교육’에의 추구는 교육정책의 최우선과제였습니다. 건국의 교부들이 품었던 균등주의, 균등사회 건설 사상이 가장 잘 반영된 분야가, 헌법관련 편지에서 말씀드린 경제와 함께 바로 교육부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냉전대결의 전방초소에서, ‘반공전쟁’ 종식 7년 만에 폭발한 4·19 ‘민주혁명’은 이승만 정부의 부정적 유산인 동시에 긍정적 산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즉 교육혁명을 통한 학생급증에 더해, 근대화와 반공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를 교육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민주주의를 파괴하자 학생저항으로 연결되었던 것이지요. 시민·노동계층이 허약한 상태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중상황으로부터 연유하였습니다. 국민교육의 시민적 효과, 반공교육의 민주적 효과라는 역설이었던 것이지요.

교육의 인간화·공공화 위해선 대학·언론·교사 발본적 변화를

선생님, 제 생각에 오늘날 한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공공성과 시민성, 개별성과 일반성이 모두 실종된 것이라고 봅니다. 있다면 오직 시장성과 경쟁성만 남았습니다. 인간 행위에서 교육처럼 개별성과 보편성이 만나는 영역도 없습니다. 즉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개별적 교육은 곧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교육과 같은 원리를 갖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기본존재 이유인 개체적 인간교육과 공적 시민교육·시민양성 기능의 동시 실종, 이것이야말로 민주공화국 한국이 위기에 직면한 핵심입니다. 교육은 국가공동체가 시민에게 제공해야 하는 최소 공공재이지 재산의 크기에 따라 구매와 교환 여부가 결정되는 사유재가 아닙니다. 고대 이래 인간·시민·교육에 관한 주요 이론들이 반드시 교육과 국가·정치·공동체를 연결해서 접근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개체적 인간교육과 공동체적 시민교육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근대 민주공화국에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역할과 내용 모두에서 교육을 철저하게 ‘시장에의 예종’ ‘사사화의 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한국은 사교육 예산과 비중이 공교육에 버금가는 희귀한 사례입니다. 근대 교육체계의 등장 이래 일반교육 부문에서 사교육 비중이 이토록 큰 나라는 없었습니다. 2009년 OECD 통계를 볼 때 한국은 GDP 대비 민간부문 교육지출이 OECD 평균 3.5배를 넘습니다. 시장과 사적 이익집단에 교육을 장악당한 결과, 이제 우린 교육재벌·대체교육체계의 등장을 목도하면서 일반교육체계를 공교육체계와 사교육체계로 나누어 접근해야 할 상상불능의 상황을 목도합니다. 게다가 사교육은 경쟁교육·입시교육·물량교육을 본질로 하는 한국교육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의 한국 공교육이 최소한의 시민교육·윤리교육·인간교육을 담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보조역할에 그칠 뿐입니다. 공교육이 사교육에 부담이 되는, 완전한 본말역전입니다.

교육의 본질이 전도되니 시민되기는 고사하고 인간되기의 최초 단계부터 차별받고 왜곡됩니다. 역근대화이지요. 교육은 국가의 바른 역할에 의해, 신분·지위·재산을 넘는 평등한 기회보장이라는 공공성·공화성·근대성의 표상이어야 하나 우린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부모의 학력·소득과 자녀의 학력·소득의 상관성은 이제 명백합니다. 진학·경쟁교육을 좌우하는 사교육비를 보면 월평균 소득 700만원 이상 가구는 100만원 미만 가구보다 8.8배를 지출합니다. 게다가 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비율은, 학력에 따라 중졸 이하는 15.7% 대 84.3%, 고졸은 38.9 대 61.1, 전문대졸은 60.7 대 39.3, 대졸 이상은 71.8 대 28.2로 정확히 학력과 비례합니다. 현재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52.3%를 차지하는 가운데 남성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100 대 39.1로서 사상 최대이며, 법정 최저임금(시간당 4000원) 이하 노동자는 222만명 중 비정규직은 무려 93.6%를 차지합니다. 학력과 노동양태, 수입규모, 자녀교육 사이에 고도의 상관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두려운 통계입니다.

수유하는 어머니 마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 키워내야

하여 교육의 공공성 상실과 사사화·물질화, 그리고 그로 인한 탈시민화·속물화·불평등화는 오늘날 한국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성(humanity), 비전, 상상력, 창의력, 비판정신, 자기책임성에 기초한 개별 인간과 공동체 시민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려와 사랑이 배제된, 공동체내의 사회적 실존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시민성을 학습하지 않은 존재들이 만들어갈 미래 공동체의 모습은 두렵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른 공동체를 위한 시민교육을 위해 교육의 인간화와 공공화를 위한 발본적 선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공적 책임과 역할의 회복이 가장 절실합니다. 그것은 민주공화국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합니다. 동시에 국가는 반드시 시장원리 대신 공동체·공화의 원리 위에 교육에 접근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결코 개별 학습능력 향상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교육예산의 대폭증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처럼 국가가 교육책임과 역할을 계속 방기할 경우 우리 공동체는 시민 대신 속물이 범람하는 속물사회가 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공동체를 더욱 빠르게 해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대학의 변화입니다. 대학은 더 이상 직업교육 준비기관이 아니라, 인간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본역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근대 대학교육의 본질은 원래 교양교육, 즉 자유교육으로서의 인간교육·시민교육이자 일반교육·종합교육이었지요. 즉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민적 덕성과 교양, 상상력, 문제대처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대학이 본연의 인간교육 역할을 회복할 때 요즈음 말하는 통합교육·융합교육·전문교육 자체가 필요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이미 인간교육·일반교육에 내재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대학의 시장화, 기업화, 물량화는 최소한 OECD 평균 수준으로의 정부의 공공성 회복 및 예산지원과 함께 이제 중단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어떤 경우에도 자율적 공공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대학은 공동체를 향한 가치와 정신, 인재와 상상력을 창출하는 중심 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기업과 사회 역시 지식과 세계는 늘 바뀌기 때문에 즉각적이고 단기간 사용할 수 있는 직업교육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비전·양식·지식을 갖춘 사람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취업경쟁기관으로 대학을 내몰아서는 안됩니다. 창의성, 인간성, 사회성, 일반성=세계성을 갖춘 인재는 자신과 조직 모두의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학 교사들은 이제 그런 시민을 길러 사회에 기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탈시민·속물·불평등화의 제자들 그들이 만들 미래모습 두려워

셋째, 선생님과 꼭 나누고 싶은 교육관련 말씀은 사회와 언론의 변화입니다. 선생님은 ‘낙오자가 될 각오’로서의 시민윤리를 말씀하셨지만 저 역시 우리 세대 교육이 만들 다음 세대의 사회모습이 정말 두렵습니다. 경쟁담론을 넘어 ‘초등학교 때 1억 만들기’ ‘부자 되세요’와 같은 속물담론과 속물교육을 통해서는 자녀들이 1억원을 만든다고 해도 그들이 살아갈 공동체는 결코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지금 세금을 늘려서라도 먼저 인간교육과 시민교육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시에 언론 역시 시민교육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언론은 기업논리와 특정이념의 대변자를 넘어 사회의 공동가치와 덕성을 교육하기 위한 원칙과 품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현재와 같은 편향과 수준, 공격적 언사로는 시민교육에 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는 역시 교사의 중요성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공부’와 ‘교육’이라는 말이 모두 사람 되기, 사람 만들기라는 뜻을 갖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인간을 교육동물(homo educandus)로 본 견해를 수용합니다. 교육은 원래 어머니의 수유(授乳)라는 말에서 나왔으니 본래 사랑과 돌봄의 뜻을 담고 있지요. 이 때문에 오늘의 교육현실을 볼 때 저희 교사들이 과연 어머니가 자기 젖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길렀는지 무겁게 돌아보게 됩니다.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좋은 교육 없이 좋은 시민없고, 좋은 시민없이 좋은 공동체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좋은 교육은 좋은 공동체의 출발입니다. 현재와 같은 교육체계와 내용이 지속되어서는 우린 좋은 시민과 공동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교육의 중심이 공적 시민교육인 이유는 사회의 윤리적·도덕적 하부구조의 구축이 교육으로부터 시작되며, 거기에서 비로소 인간교육과 사회교육으로의 확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시민교육 없이 인간과 사회의 인간화-윤리화와 사회화-합리화라는 쌍방향 과제는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무거운 자기과제를 새기며 오늘 편지를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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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옮긴다. 이제 교육에 대한 문제이다.  

 10)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말미암아 오늘에서야 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제는 교육입니다만시절이 시절이니만큼노 전 대통령 죽음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그것은 한국 교육의 병리현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람이 또한고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신문에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한 시대의 종말이라고 표현하고, 뜻을 다 말하지는 못했는데, 먼저 그 ‘시대’에 대해 몇 마디 보태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는 이 나라에서 민족이 탄생한 시대였습니다. 해방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국민으로 훈육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부마항쟁으로 유신이 끝나고 광주항쟁으로 새시대가 시작된 뒤에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민이 탄생한 시대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시민의 시대가 만들어낸 시민대통령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치가에 의한 시민의 지배는 동등한 시민들 사이의 지배라는 점에서 주인의 노예에 대한 지배나 가부장의 가족에 대한 지배와 다릅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 이전의 대통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왕적 대통령이었습니다. 왕처럼 행세하지 못하면 조직 폭력배의 보스처럼 굴었고, 그도 아니면 최소한 선생님이라 불렸더랬지요.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만이 한 사람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처신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그는 시대정신의 상징이며 시민의 시대가 그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학교 교육은 황국신민 교육이었으며 해방 뒤에는 국민을 기르는 교육이었다. 황국신민이든 국민이든,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이긴 마찬가지인데, 일제시대 황국신민서사나 박정희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은 노예 교육의 지침이었다. 지금 한국 교육도 식민지 시대의 노예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1968년 12월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 행사 모습





지난해 11월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고교생들. 경향신문자료사진

박정희시대까지 ‘국민’훈육 盧 전대통령 시민시대 다져
시민이란 국가나 민족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고 동원되는 객체가 아니라 욕구와 행위의 주체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인간입니다. 우리 시대는 그런 시민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김동길씨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을 혼내주라고 했다는데, 가엾게도 그 사람은 자기가 어떤 시대에 사는지 전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시민의 시대는 말 그대로 부르주아의 시대요, 자본의 시대입니다. 시민은 욕망의 주체요, 자본은 그 욕망이 객관적으로 사물화된 것으로서, 시민이 지배한다는 것은 자본이 지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칠게 말해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민의 시대인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치명적인 한계였던 바, 그것이 또한 노 전 대통령의 한계였습니다. 그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그는 스스로 자기 한계를 확실히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비약이 없으니 한 시대가 완성되지 않으면 다음 시대는 올 수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에 의해 시민의 시대가 확고히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의 시대가 지양되었습니다. 짐작컨대 이후로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냐고 물으면 교양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박정희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려면 경제발전을 핑계로 개, 돼지처럼 훈육되던 국민의 시대보다야 자유롭게 자기 욕망에 충실할 수 있었던 시민의 시대가 더 좋을 터이니 박정희보다는 노무현이 더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대답하겠지요. 게다가 윤리적, 미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박정희는 비극적 아우라를 남기고 떠난 노무현의 경쟁자가 되지 못할 것이니, 저는 시민의 시대에 시대착오적이게도 대를 이어 내려온 그 지긋지긋한 박정희의 망령을 쫓아버린 것이야말로 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는 단순히 외적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는 오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통해서만 역사는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도 아니고 단순히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시민도 아니라면 과연 지금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바로 이 물음이 교육의 근본물음이라 생각합니다.

교육은 자기실현, 사람됨의 길 자유·만남의 능력 길러줘야
교육이란 인간성의 자기실현 과정, 곧 사람됨의 길입니다. 다른 모든 동물은 양육되면 충분하지만, 사람은 교육받지 못하면 아무리 잘 먹어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교육이 사람됨의 길인 까닭에, 좋은 교육을 받으면 그만큼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지고 나쁜 교육을 받으면 그만큼 더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중요한 까닭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모든 시대는 이 물음에 스스로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적 인간의 이념으로부터 현실의 교육체계를 수립해야 합니다. 한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물음에 대한 아무런 숙고도 대답도 없이 교육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저 역시 이 물음에 대해 충분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육이 사람됨의 과정이라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노동자가 된다는 것도 아니고 농부가 된다는 것도 아니며 교수가 되는 것도, 의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삶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능력이 바로 자유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결핍된 상태가 바로 노예상태로서, 아무리 많은 권력과 부를 쥐고 있더라도 자유의 능력이 결여되면 노예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고립된 홀로주체로서 자기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너와의 만남 속에서 내가 되는 것이니, 자유 역시 너와의 만남 속에서 실현되는 서로주체성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체를 기르기 위해 교육이 자유의 능력과 함께 가장 먼저 길러주어야 할 능력은 만남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너와 내가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더불어 우리가 되는 능력입니다. 지식과 정서와 도덕 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이처럼 자유와 만남의 능력을 도야하기 위해 기여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교육의 문제는 이미 시민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제 그 완성과 극복을 고민해야 할 지금도 식민지 시대의 노예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일제시대 이 나라 학교교육은 황국신민 교육이었으며 해방 뒤에는 국민을 기르는 교육이었습니다. 황국신민이든 국민이든,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이긴 마찬가지인데, 일제시대 황국신민서사나 박정희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은 그런 노예교육의 지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예교육이 우리 시대에 와서도 요지부동이라는 데 있습니다. 민족이 국민이 되고 국민이 비록 불완전하나마 시민이 된 시대에도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춥니다. 학생이 공부를 못한다고 교사가 때리고 여학생의 치마를 벗기는 엽기적인 나라가 한국입니다. 한국의 학교는 감옥이나 수용소와 같아서 자유와 자발성 그리고 주체성의 무덤입니다. 자발성과 주체성이 억압된 곳에 참된 만남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살인적인 학업경쟁이 모두를 적대적인 경쟁관계 속으로 밀어 넣는 까닭에 교육이 협동과 소통에 기초한 참된 만남의 능력을 길러주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살인적 경쟁·인권 없는 학교 더불어 살줄 아는 시민 못키워
그렇게 맹목적인 경쟁교육을 통해 차라리 사람들이 믿듯이 무슨 영재라도 길러낼 수 있다면 위로가 되겠습니다만, 부질없는 망상입니다. 영재의 본질은 창의성에 있는데, 교육이 온통 획일적이므로 창의성이 계발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창의성은 부적응의 소산이요, 천재성은 불균형의 산물입니다. 두드러진 비범함은 언제나 모자람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웃사이더가 아니고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고, 어리석지 않으면서 천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은 획일적 잣대로 모든 분야에서 천재가 될 것을 강요함으로써 천재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한국사회가 학벌사회라는 데 있습니다. 학벌사회란 학교교육이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재생산장치가 된 사회를 가리킵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의 학벌은 현대판 문중으로서, 거기에는 서열이 있어 높은 서열의 대학일수록 더 높은 신분계급에 속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아예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성씨도 족보도 없는 천민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노 전 대통령이 증명해줍니다. 이른바 일류 대학 나온 이 나라 세도가들은 노무현이라는 천민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는데, 그 맹목적인 감정적 반발이 노 전 대통령의 원만한 국정 수행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한국교육의 문제에 대해 온갖 진단과 처방이 분분하지만, 학벌사회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육에 미래는 없습니다. 학벌사회는 서열화된 대학의 위계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학벌체체를 극복한다는 것은 대학서열을 없애고 원칙적으로 모든 대학을 평준화시켜, 서열과 경쟁 대신 협동과 다양성을 교육의 지도 원리로 삼을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바뀐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육이 정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노예교육인 까닭에 우리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데 정말 서툽니다. 하지만 다른 것을 꿈꿀 줄 모르면 다른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현대판 문중’ 학벌·서열 없애고 특권계급 욕망 버리는 결단을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다른 삶을 결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학벌경쟁에서 승리하여 특권계급이 되겠다는 욕망을 내려놓고 스스로 낙오자가 되겠다고 결단할 때 세상은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육이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의 재생산 장치가 되어버린 학벌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낙오의 공포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학벌경쟁에 몰입해왔습니다. 특히 자기 자식을 일류대학 보내겠다고 학벌경쟁을 극단화시킨 것은 우리 세대의 가장 큰 과오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부질없는 경쟁을 거부하고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모든 낙오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더불어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저는 이 물음이 학벌이 없다는 점에서 영원한 낙오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남은 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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