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옮긴다. 이제 교육에 대한 문제이다.  

 10)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말미암아 오늘에서야 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제는 교육입니다만시절이 시절이니만큼노 전 대통령 죽음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그것은 한국 교육의 병리현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람이 또한고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신문에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한 시대의 종말이라고 표현하고, 뜻을 다 말하지는 못했는데, 먼저 그 ‘시대’에 대해 몇 마디 보태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는 이 나라에서 민족이 탄생한 시대였습니다. 해방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국민으로 훈육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부마항쟁으로 유신이 끝나고 광주항쟁으로 새시대가 시작된 뒤에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민이 탄생한 시대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시민의 시대가 만들어낸 시민대통령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치가에 의한 시민의 지배는 동등한 시민들 사이의 지배라는 점에서 주인의 노예에 대한 지배나 가부장의 가족에 대한 지배와 다릅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 이전의 대통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왕적 대통령이었습니다. 왕처럼 행세하지 못하면 조직 폭력배의 보스처럼 굴었고, 그도 아니면 최소한 선생님이라 불렸더랬지요.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만이 한 사람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처신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그는 시대정신의 상징이며 시민의 시대가 그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학교 교육은 황국신민 교육이었으며 해방 뒤에는 국민을 기르는 교육이었다. 황국신민이든 국민이든,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이긴 마찬가지인데, 일제시대 황국신민서사나 박정희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은 노예 교육의 지침이었다. 지금 한국 교육도 식민지 시대의 노예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1968년 12월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 행사 모습





지난해 11월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고교생들. 경향신문자료사진

박정희시대까지 ‘국민’훈육 盧 전대통령 시민시대 다져
시민이란 국가나 민족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고 동원되는 객체가 아니라 욕구와 행위의 주체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인간입니다. 우리 시대는 그런 시민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김동길씨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을 혼내주라고 했다는데, 가엾게도 그 사람은 자기가 어떤 시대에 사는지 전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시민의 시대는 말 그대로 부르주아의 시대요, 자본의 시대입니다. 시민은 욕망의 주체요, 자본은 그 욕망이 객관적으로 사물화된 것으로서, 시민이 지배한다는 것은 자본이 지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칠게 말해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민의 시대인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치명적인 한계였던 바, 그것이 또한 노 전 대통령의 한계였습니다. 그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그는 스스로 자기 한계를 확실히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에는 비약이 없으니 한 시대가 완성되지 않으면 다음 시대는 올 수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에 의해 시민의 시대가 확고히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의 시대가 지양되었습니다. 짐작컨대 이후로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냐고 물으면 교양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박정희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려면 경제발전을 핑계로 개, 돼지처럼 훈육되던 국민의 시대보다야 자유롭게 자기 욕망에 충실할 수 있었던 시민의 시대가 더 좋을 터이니 박정희보다는 노무현이 더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대답하겠지요. 게다가 윤리적, 미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박정희는 비극적 아우라를 남기고 떠난 노무현의 경쟁자가 되지 못할 것이니, 저는 시민의 시대에 시대착오적이게도 대를 이어 내려온 그 지긋지긋한 박정희의 망령을 쫓아버린 것이야말로 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는 단순히 외적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는 오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통해서만 역사는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도 아니고 단순히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시민도 아니라면 과연 지금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바로 이 물음이 교육의 근본물음이라 생각합니다.

교육은 자기실현, 사람됨의 길 자유·만남의 능력 길러줘야
교육이란 인간성의 자기실현 과정, 곧 사람됨의 길입니다. 다른 모든 동물은 양육되면 충분하지만, 사람은 교육받지 못하면 아무리 잘 먹어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교육이 사람됨의 길인 까닭에, 좋은 교육을 받으면 그만큼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지고 나쁜 교육을 받으면 그만큼 더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중요한 까닭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모든 시대는 이 물음에 스스로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적 인간의 이념으로부터 현실의 교육체계를 수립해야 합니다. 한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물음에 대한 아무런 숙고도 대답도 없이 교육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저 역시 이 물음에 대해 충분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육이 사람됨의 과정이라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노동자가 된다는 것도 아니고 농부가 된다는 것도 아니며 교수가 되는 것도, 의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삶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능력이 바로 자유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결핍된 상태가 바로 노예상태로서, 아무리 많은 권력과 부를 쥐고 있더라도 자유의 능력이 결여되면 노예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고립된 홀로주체로서 자기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너와의 만남 속에서 내가 되는 것이니, 자유 역시 너와의 만남 속에서 실현되는 서로주체성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체를 기르기 위해 교육이 자유의 능력과 함께 가장 먼저 길러주어야 할 능력은 만남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너와 내가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더불어 우리가 되는 능력입니다. 지식과 정서와 도덕 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이처럼 자유와 만남의 능력을 도야하기 위해 기여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교육의 문제는 이미 시민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제 그 완성과 극복을 고민해야 할 지금도 식민지 시대의 노예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일제시대 이 나라 학교교육은 황국신민 교육이었으며 해방 뒤에는 국민을 기르는 교육이었습니다. 황국신민이든 국민이든,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이긴 마찬가지인데, 일제시대 황국신민서사나 박정희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은 그런 노예교육의 지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예교육이 우리 시대에 와서도 요지부동이라는 데 있습니다. 민족이 국민이 되고 국민이 비록 불완전하나마 시민이 된 시대에도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춥니다. 학생이 공부를 못한다고 교사가 때리고 여학생의 치마를 벗기는 엽기적인 나라가 한국입니다. 한국의 학교는 감옥이나 수용소와 같아서 자유와 자발성 그리고 주체성의 무덤입니다. 자발성과 주체성이 억압된 곳에 참된 만남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살인적인 학업경쟁이 모두를 적대적인 경쟁관계 속으로 밀어 넣는 까닭에 교육이 협동과 소통에 기초한 참된 만남의 능력을 길러주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살인적 경쟁·인권 없는 학교 더불어 살줄 아는 시민 못키워
그렇게 맹목적인 경쟁교육을 통해 차라리 사람들이 믿듯이 무슨 영재라도 길러낼 수 있다면 위로가 되겠습니다만, 부질없는 망상입니다. 영재의 본질은 창의성에 있는데, 교육이 온통 획일적이므로 창의성이 계발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창의성은 부적응의 소산이요, 천재성은 불균형의 산물입니다. 두드러진 비범함은 언제나 모자람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웃사이더가 아니고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고, 어리석지 않으면서 천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은 획일적 잣대로 모든 분야에서 천재가 될 것을 강요함으로써 천재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한국사회가 학벌사회라는 데 있습니다. 학벌사회란 학교교육이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재생산장치가 된 사회를 가리킵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의 학벌은 현대판 문중으로서, 거기에는 서열이 있어 높은 서열의 대학일수록 더 높은 신분계급에 속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아예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성씨도 족보도 없는 천민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노 전 대통령이 증명해줍니다. 이른바 일류 대학 나온 이 나라 세도가들은 노무현이라는 천민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는데, 그 맹목적인 감정적 반발이 노 전 대통령의 원만한 국정 수행에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한국교육의 문제에 대해 온갖 진단과 처방이 분분하지만, 학벌사회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육에 미래는 없습니다. 학벌사회는 서열화된 대학의 위계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학벌체체를 극복한다는 것은 대학서열을 없애고 원칙적으로 모든 대학을 평준화시켜, 서열과 경쟁 대신 협동과 다양성을 교육의 지도 원리로 삼을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바뀐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육이 정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노예교육인 까닭에 우리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데 정말 서툽니다. 하지만 다른 것을 꿈꿀 줄 모르면 다른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현대판 문중’ 학벌·서열 없애고 특권계급 욕망 버리는 결단을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다른 삶을 결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학벌경쟁에서 승리하여 특권계급이 되겠다는 욕망을 내려놓고 스스로 낙오자가 되겠다고 결단할 때 세상은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육이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의 재생산 장치가 되어버린 학벌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낙오의 공포에 사로잡혀 맹목적인 학벌경쟁에 몰입해왔습니다. 특히 자기 자식을 일류대학 보내겠다고 학벌경쟁을 극단화시킨 것은 우리 세대의 가장 큰 과오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부질없는 경쟁을 거부하고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모든 낙오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더불어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저는 이 물음이 학벌이 없다는 점에서 영원한 낙오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남은 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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