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6>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CLG)를 들추기 시작하다 이야기가 번역 쪽으로 번지며 기다란 에움길을 걸었습니다. 어떤 이름을 자주 들어 귀에 익숙해지면 그 실재를 아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칸트의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은 처진데, 그 이름을 하도 거듭 듣다 보니 칸트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CLG도 독자들에게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CLG라는 책이 그간 너무 자주 거론됐으니까요.

실상 우리가 CLG에 관해 얘기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 곧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포놀로지 따위의 개념을 훑고 그 말들을 예로 들어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살핀 것뿐이지요. 이대로 CLG를 떠나려니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서 오늘 하루만 CLG 얘기를 더 하려 합니다.

맨 첫날, CLG의 지성사적 의의는 언어를 하나의 구조로 파악함으로써 구조주의의 시동을 건 데 있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세요? 또 거기서 구조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를 뜻한다는 말씀도 드렸죠? 그렇지만 이 정도 가지곤, 언어가 구조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잡히지 않을 듯합니다. 게다가 이미 말씀드렸듯, 소쉬르가 CLG에서 '언어는 구조다'라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요. 소쉬르의 후배 언어학자들, 그리고 인접과학 연구자들은 CLG의 어떤 대목에 홀려 그 책을 구조주의의 수원지로 여겼을까요? 이 책을 내처 들춰봅시다.

CLG 중간쯤에서, 소쉬르는 뒷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문장을 발설합니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La langue est une forme et non une substance)."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쉬르는 이 점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서양장기(체스)에 비유합니다. 동양장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장기말끼리의 상호관계(예컨대 포ㆍ砲는 포를 넘을 수 없다거나 졸ㆍ卒은 후진할 수 없다거나)를 통해 결정되는 각 장기말의 기능이나 가치(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象)이 가는 길('상'의 가치)과 마(馬)가 가는 길('마'의 가치)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대립합니다. 물론 규칙(그러니까 형식)만으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를 두려면 장기판이나 정해진 수의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기판이 크든 작든, 장기말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활동은 말소리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하지만, 소리 자체가 언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생각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로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 대립이 낳는 가치들의 체계(그것을 소쉬르의 후배들은 '구조'라고 고쳐 불렀습니다)가 언어입니다.

머리의 앞면을 표현하려고 한국인들은 [ㅓ] [ㄹ] [ㄱ] [ㅜ] [ㄹ]이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합니다. ('얼굴'의 'ㅇ'이 소릿값 없는 장식품인 건 아시죠?) 그러나 소쉬르에 따르면 이것 자체는 언어가 아닙니다. 똑같은 목적으로 영국인들은 [f] [ei] [s]라는, 전혀 다른 음향적 실체를 사용합니다. 언어는 그런 음향적 실체가 아니라, {얼굴}이나 {face}라는 기호들의 가치들로 이뤄진 체계입니다. 그것은 규칙의 세계 곧 형식의 세계입니다.

{얼굴}이라는 기호의 가치는 예컨대 이 기호가 {낯}이라는 기호와 맺는 관계, 정확히는 차이나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한국어 '얼굴'과 '낯'의 가치는 다릅니다. "볼 낯이 없다"라는 숙어에서 '낯'을 '얼굴'로 바꾸면 자연스러움이 덜합니다. 만약에 한국어 어휘목록에서 '낯'이 사라진다면, '얼굴'이 '낯'의 가치를 남김없이 빨아들일 겁니다. 그 땐 "볼 얼굴이 없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쓰일 테지요.

또 한국어에서 /t/와 /th/와 /t'/는 서로 대립하며 제 나름의 가치를 지닙니다. '달(月)'과 '탈(假面)'과 '딸(女息)'에서처럼 말이죠. 그래서 한국어에선 이 세 소리들이, 서로 다른, 다시 말해 대립하는 음소들을 이룹니다. 영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style'의 둘째 자음을 /t/로 소리내든 /th/로 소리내든 /t'/로 소리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물론 /t'/로 내는 것이 표준발음에 가깝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t/와 /th/와 /t'/가 대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음소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 소리들의 실체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여기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대립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이것이 대략 소쉬르의 설명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체스놀이가 상이한 말(馬)들의 결합 안에서 전적으로 이뤄지듯, 언어도 체계라는 특성이 있으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

'상이하다' '대립'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다름으로써 대립해야만 가치가 생산되고(그것이 소쉬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가치들의 집합, 그 가치들을 낳은 내적 관계들의 그물이 곧 형식이고 체계이고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할 때의 '언어'가 일상용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의 사회적 측면을 가리키는 소쉬르 특유의 '언어', 곧 '파롤'과 대립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또렷이 하기 위해, 소쉬르의 저 유명한 선언을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 행위인 '파롤'은 다분히 실체일 수밖에 없지요.

랑그가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 소쉬르는 또 '제네바발-파리행 열차'를 끌어대기도 합니다. 24시간 간격으로 떠나는 제네바발 파리행 저녁 8시45분 급행열차 두 대를 우리는 '같은' 기차라고 말합니다. 승무원들이나 객차가, 다시 말해 그 실체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것을 '같은' 기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발차시각이나 운행노선 등 형식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운행되는 제네바발 파리행 저녁 8시45분 급행열차들은 모두 동일한 랑그인 것입니다.

랑그가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가 끌어온 체스놀이나 제네바발-파리행 급행열차의 비유가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심지어는 랑그가 과연 형식이기만 할 뿐인가에 대해서도 반론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 하나는 앙드레 마르티네라는 프랑스인 언어학자가 거론한 영어 /h/ 소리와 /ng/ 소리의 예입니다. 영어에서 /h/ 소리와 /ng/ 소리는 별개의(그러니까 서로 다른) 음소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영어라는 '랑그' 체계 안에서 /h/ 소리와 /ng/ 소리가 대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h/ 소리와 /ng/ 소리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 두 소리를 서로 교체해서 달라지는 단어쌍이 영어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h/ 소리와 /ng/ 소리는 다릅니다. '대립하지 않는데도' 다릅니다. 이 두 소리는 영어에서 서로 다른 음성(파롤)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음소(랑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어라는 랑그 안에서 '대립하지 않는' /h/와 /ng/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소리의 '실체'가 '너무나' 다르다는 점일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결국 랑그는 때로 실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르티네의 반례가 "랑그는 형식"이라는 소쉬르의 정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겁니다. 모든 규칙이 지니게 마련인 예외 정도로 넘깁시다. 랑그가 형식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가 끌어온 비유들은 '구조'(소쉬르의 용어로는 '체계')라는 것의 개념을 제 나름대로 명료히 드러냅니다.

CLG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러 거론은 하겠지만, 이 책 자체를 소재로 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언어학 개론서로서 CLG가 그리 좋은 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낡은 책이고,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을 담은 위태로운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고전이기도 합니다. 소쉬르는 CLG를 통해, 당대 언어학의 주류였고 그 자신 깊이 개입했던 비교문법과 결별함으로써, 언어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여러분도 짬을 내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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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트워크 자본주의의 천민이여 단결하라

(20) 마누엘 카스텔 Manuel Castells

마누엘 카스텔(Manual Castells)은 1942년에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프랑코 독재 반대운동에 연루돼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뒤 1967년 파리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9년까지 파리대 교수를 거쳐 1979~2003년 캘리포니아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카탈루냐개방대 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대학의 방문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도시문제-마르크스주의적 접근>(1972), <도시, 계급 그리고 권력>(1978), <도시와 민중>(1983), <정보도시>(1989), <정보시대-경제, 사회, 문화>3부작,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1996), <밀레니엄의 종언>(1998), <커뮤니케이션 파워>(2009) 등이 있다.

 

 

 

 


카스텔은 종교적 근본주의,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세계화운동 등 ‘저항적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를 주목한다. 그러나 이들은 상호 소통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네트’와 ‘자아’를 아울러 ‘문화정치’에 기반한 상호 소통의 형태를 띠는 새로운 종류의 정체성 기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두 번째 천년의 끝자락에 일어난 정보기술혁명이 세계를 바꾸고 있다. 반도체와 컴퓨터, 유비쿼터스, 이동통신, 유전공학, 전자적으로 통합된 지구적 금융시장…. 이것이 곧 우리의 세계이며 ‘정보시대’의 세계다. 마누엘 카스텔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연구 주제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정보시대의 정보적 환경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 마누엘 카스텔
 
카스텔은 창조성과 소통의 무한 지평을 연 정보기술혁명이 우리의 자아와 경험들을 관통하는 구조적인 사회 변화의 중심에 있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등장과 발전에 따른 광범위한 역사적 전환의 맥락에서 경제 재구조화에 관한 분석에서부터 정보시대의 사회운동과 정치, 문화변동, 자아정체성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특징적인 것은 세계 도처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교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총체론자이면서 경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많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카스텔 역시 초기의 사상적 지반은 마르크스주의였다. 초기 저작인 <도시문제>(1973)를 펴낼 당시 그는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와 풀란차스의 국가론을 바탕으로 도시문제를 분석했다. 그러나 <도시와 민중>(1983)에 와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사회운동을 계급적 관점이 아닌 정체성·젠더·자기 확신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데,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법론과 주제 모두에서 큰 변화를 보이는 <정보도시> <정보시대> 3부작에 이르러서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저작에서 카스텔은 <도시와 민중>에서 보여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한층 정교화한다. 그러나 그가 창안해낸 개념들에서, 그리고 총체적인 연구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의 사고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보사회’ 또는 ‘지식사회’를 ‘네트워크 사회’로

카스텔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사회’ 또는 ‘지식사회’라는 용어를 ‘네트워크 사회’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과 정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생산성과 권력의 필수적인 근원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중요성이 우리 시대만의 특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에 대한 접속이 필수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 네트워킹 능력은 조직과 기관, 사회적 행위자의 생산성·경쟁력·창조성과 연결되고, 궁극적으로는 권력과 권력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핵심 조건이 된다. 따라서 ‘정보시대’는 생산·경험·권력, 그리고 문화적 과정이 네트워킹 논리에 따라 작동되고 조정이 일어나는 네트워크 사회라는 게 카스텔의 주장이다.

그런데 네트워크 사회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보다 새로운 정보기술의 능력이다. 특히 인터넷의 창조는 전자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모든 활동 영역과 맥락, 장소에 네트워킹 논리가 적용될 수 있게 했고, 무한한 소통의 지평을 열어젖힘으로써 기업뿐 아니라 조직·제도·노동 과정 등 사회 전반이 거대한 변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이런 네트워크 개념을 카스텔은 “상호 연결된 노드들(nodes)의 집합”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지점에 있는 노드들이 상호소통을 통해 새로운 노드들을 통합해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구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네트워크는 개방성·유연성·종합성·복잡성·네트워킹의 특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상호소통성과 다중노드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네트워크 발달에 핵심적 동력을 제공한 정보기술은 위기에 처한 산업 자본주의를 재구조화하는 데 강력한 도구로 활용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곧 정보화 자본주의의 출현을 야기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블랙홀, ‘제4세계’의 출현

자본주의의 재구조화와 정보기술 패러다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신경제는 산업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것이 카스텔의 입장이다. 지구적 정보화 경제에 기반을 둔 정보화 자본주의는 그 어느 시기보다 한층 자본주의적인 체제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과거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작동 범위가 전 지구적이란 점이 한 가지 이유라면, 자본의 축적과 가치의 창출이 정보네트워크에 의해 운영되는 지구적 금융시장을 무대로 이뤄진다는 점이 둘째 이유다.

결국 정보화 자본주의는 네트워킹 능력에 기반하면서 유연하고 적응력 있는 노동력에 의존하는데, 이때 정보를 특정한 지식으로 가공할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은 가치 창출의 핵심 요건이다. 문제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다수의 일반 노동자들은 역할이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다수 노동자들은 기업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거나, 기계 또는 대체 노동력에 의해 해고를 당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 십상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가치 창출의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소수의 ‘정보 노동자’들의 주변을 전전하면서 근근히 생존하는 하층계급, 새로운 배제계급이 되는데, 이들은 생계를 위해 유랑하는 ‘잡 노마드’(job nomad)로 전락하거나 때로는 범죄경제의 사슬에 연루되기도 한다. 카스텔은 이를 ‘제4의 세계’인 새로운 세계의 출현으로 개념화하고, 지구적 정보화 자본주의의 블랙홀이라 일컫는다.


‘정보정치’의 새 공유지, 미디어 공간 디자인하기

카스텔에 따르면 정보화 자본주의의 형성은 단순한 기술 변화의 결과가 아니다. 다양한 문화적 조건들과의 상호 작용의 결과이며, 그것의 ‘정치적’ 결과다. 카스텔은 이런 관점에서 새롭게 등장한 사회운동을 검토하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세계화운동 등과 같은 공동체의 출현이다. 이들은 자율적인 정체성 구축의 형태를 취하는 ‘저항적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들인데, 카스텔이 볼 때 이 ‘저항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들은 저항만 할 뿐, 상호 소통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정체성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이때의 정체성 기획은 ‘네트’와 ‘자아’를 아우르면서 ‘문화정치’에 기반한 상호 소통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카스텔은 역설한다.

전자적 미디어 공간은 현대 사회의 공유지가 되었다. 미디어 공간이 ‘정보화 정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카스텔은 정보를 제공받고, 의도적이고 단호한 사회적 행동을 한다면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단언한다. 전세계 어느 곳이든 능동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언론이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가 되는 것, 정치가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회복하는 것, 인류가 지구상의 인간과 연대감을 갖는 것,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 세대 간에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 자아를 탐구하는 것. 카스텔은 이런 실천들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프로젝트들이라고 단언한다.

김남옥/한국성서대 강사


 




 

» 김남옥/한국성서대 강사
 
김남옥 교수는 고려대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정보기술패러다임과 몸(body)’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대와 배재대에서 강의했고, 지금은 한국성서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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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5> 번역이라는 고역 <下>  

 

방부 처리한 주검에 '파롤'의 한국어 역어 '화언'을 견주며, 저는 번역자의 무성의와 무감각을 탓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정한 비판이었을까요? 부분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소쉬르의 '파롤'이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이었듯, 한국어에서도 특별한 사용을 통해 전문용어 노릇을 겸할 수 있는 일상어를 찾아냈다면 좋았겠지만, 번역자 처지에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적지 않은 (전문용어들의) 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애를 시작합니다. 운이 좋아 거기 생기가 깃들이면 그 낱말이 일상어로 자리잡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말은 전문용어 사전 속에만 숨어있게 됩니다. '화언'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화언'이란 말에서 느끼는 낯섦보다 더 지독한 생경함을 '샤카이(社會)'라는 말에서 느꼈을 겁니다.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영어 낱말 society를 대뜸 '샤카이'에 대응시킵니다. 일본사람들을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society를 즉시 '사회'에 대응시킵니다. 그렇지만, 일본어에서 '샤카이'가 society의 역어로 정착된 것은 18세기 말 이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의 일입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큰 것 하나는 일본 전통사회에 society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동료들끼리의 결합을 뜻하는 society는 전통 일본에도 있었지요. 그러나 가장 넓은 범위의 서로 모르는 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을 뜻하는 society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이 단어의 번역은 쉽지 않았고, 최후의 승자로 남은 '샤카이'조차 처음엔 '방부 처리한 주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생기를 얻은 것은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 말을 society라는 의미로 사용한 덕분입니다. '샤카이'가 운이 좋았던 거지요. 현대 일본의 정신적 초석을 놓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ㆍ1835~1901)만 해도, 1868년 영어로 된 경제학 교과서를 <세이요지조 가이헨(西洋事情 外篇)>이라는 표제로 일역하며, society를 '닌겐고사이(人間交際)' '고사이(交際)' '구니(國)' 따위로 옮겼습니다. 세이후(政府)나 세조쿠(世俗), 소타이진(總體人) 같은 낱말도 그 시절 '샤카이'의 경쟁어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한국어 문장이나 현대일본어 문장은, 심지어 그 문장들이 한국학이나 일본학을 논하고 있을 때조차, 압도적으로 '번역된 유럽'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에는 한두 세기 전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주로 한자어)이 많은데, 그 말들은 대개 유럽 사회에서 태어난 개념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번역의 주체는 18세기의 란가쿠샤(蘭學者ㆍ네덜란드어 문헌들을 통해서 유럽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와 19세기 중엽 이래의 에이가쿠샤(英學者ㆍ영어 문헌을 통해 서양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를 비롯한 일본인 번역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두 세기 남짓 기간에 걸쳐 유럽(아메리카까지 포함한) 문화 전체를 한자로 옮겨내 제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된 유럽'은, 19세기 말 이래 반세기 이상 한국이 일본문화권의 일부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한국어에 이식됐습니다. ('란가쿠[蘭學]' 이래 일본인들이 수행한 번역활동을 비롯해 번역행위의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그 양상은 졸저 <감염된 언어>[1999]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에 비교적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번역된 유럽어'로 독자 여러분과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란가쿠샤 이래의 일본인 번역가들은 유럽을 한자어로 옮기면서,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비슷한 개념어를 가져다 쓰기도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신조어들은, 대체로, 우리의 '화언' 같은 주검 상태로 일본어 세계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어 세계에)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조어들 가운데 수많은 말이 살아남아 지금 현대일본어와 현대한국어 어휘부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야나부에 따르면 수많은 신조어들이 처음엔 빈 보석상자였다가 나중엔 보석이 담긴 상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끝내 빈 보석상자에 머물러 사람들의 손길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많지요. 영어 단어 'society'의 역어 자리를 놓고 '샤카이'와 경쟁하던 '닌겐고사이'나 '소타이진'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샤카이'라는 카세트에 보석을 담았던 것입니다. '파롤'의 역어 '화언'은 아직 빈 카세트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안에 보석이 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보석을 담게 될 카세트는 차라리 '파롤'이라는 외래어 같군요. '카세트 효과'는 신조어에서만이 아니라 외래어에서도 나타납니다. 처음 듣는 외래어는 빈 카세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 매혹된 사람들이 자꾸 쓰다 보면 언젠가 보석을 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시나브로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란가쿠 이래 일본인들의 번역활동이 일본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에) 유럽 전체를 들여놓아 일본인들의(그리고 이내 한국인들의) 세계인식을 크게 확장시켰듯 말입니다.

번역이 늘 인식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욕망에서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번역은 때로 일종의 배타적 종족주의, 문화적 국수주의를 연료로 삼기도 합니다. 모국어 순화운동이 그 전형적 예입니다. 일본인들이 '메이시(名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noun을 우리 역시 '명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이름씨'로 번역합니다. 일본인들이 '도시(動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verb를 우리 역시 '동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움직씨'로 번역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이중번역에 커다란 뜻이 있을까요?

물론 개인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민족 수준에서도 자존감은 매우 커다란 심리적 자산입니다. '명사'나 '동사'라는 말이 '메이시'나 '도시'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베낀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언짢아 '이름씨'나 '움직씨'라는 말을 만들어내 쓰고 싶어하는 마음을 깔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씨'나 '움직씨'가 '명사'나 '동사'보다 '혈통적으로' 한국어에 가까워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이름씨'나 '움직씨'는 한자로 표기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명사'와 '동사'가 '메이시'와 '도시'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이라면, '이름씨'와 '움직씨'도 '명사'와 '동사'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번역을 통해서 인식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졌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이름씨'와 '움직씨'는 지적 작업의 결과라기보다 말놀이의 결과입니다. '메이시'와 '도시'가 지적 작업의 결과인 것과는 크게 다르죠. 지적 작업에 이르지 못하는 이 말놀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낱말의 생명력이 반드시 '혈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야나부의 말투를 빌려오자면, '명사'와 '동사'는 이제 보석을 가득 채운 카세트입니다. '이름씨'와 '움직씨'는 민족주의자들의 수십 년 열정을 비웃듯 아직도 빈 카세트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언젠가 보석이 담길 거라 자신할 수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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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4> 번역이라는 고역 <中> 

소쉬르 용어의 번역 문제를 조금 더 짚어봅시다. 언어활동('랑가주')의 개인측면과 사회측면을 각각 '파롤'과 '랑그'라고 부르면서, 소쉬르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가 자신의 일반언어학 용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어 논한 뒤, 얼른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사물이지 낱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언어에 따라서 몇몇 용어들이 모호해져 서로 깔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립한 구별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고 나서 소쉬르는 독일어와 라틴어의 예를 듭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지요. "가령 독일어 Sprache는 '랑그'와 '랑가주'를 뜻한다. Rede는 '파롤'에 얼추 대응하지만, 거기에 '디스쿠르'(discoursㆍ담화)라는 특수 의미를 보탠다. 라틴어 sermo는 외려 '랑가주'와 '파롤'을 의미하는 한편, lingua는 '랑그'를 가리킨다. 어떤 낱말도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개념들 중 하나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낱말에 내려진 모든 정의(定義)는 헛되다.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 낱말에서 출발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다."

<일반언어학강의>(CLG)의 라틴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CLG가 출판된 20세기 초는 라틴어가 이미 유럽 지식사회의 공용 문어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니 그럴 만합니다. 독일어 번역본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닌 것은, 헤르만 로멜(Herman Lommel)이라는 사람이 옮긴 <그룬트프라겐 데어 알게마이넨 슈프라흐비센샤프트(Grundfragen der Allgemeinen Sparchwissenschaft)>입니다. 1967년 베를린에서 나온 책이군요. 원본 표제의 '강의'(Cours)가 로멜의 독일어 번역본에선 '근본문제'(Grundfragen)로 바뀐 게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로멜은 소쉬르의 '랑그' '파롤' '랑가주'를 뭐라 옮겼을까요? 독일어에 능숙했던 소쉬르의 조언을 따랐을까요? 곧이곧대로 따르진 않았습니다. 로멜은 '랑그'를 '슈프라헤(Sprache)'로, '파롤'을 '슈프레현(Sprechenㆍ말)'으로,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menschliche Rede)'로 옮겼습니다. 독일어 감각이 무디니, 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을 삼가겠습니다.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 곧 '사람의 말'로 옮긴 데서, 로멜이 겪었을 고충이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의미적으로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 대응하는 낱말을 제 어휘목록에 지닌 자연언어들(지난번에 살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그랬지요) 이외의 언어(영어가 그랬지요)로 이 두 용어를 구별해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가 그럴진대, 일본어로 이 둘을 구별해 옮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그것들을 '겐고(言語)'와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두 역어는, '랑그'와 '랑가주'처럼, 형태적 공통인수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랑그'가 '랑가주'의 부분집합이듯, '겐고'가 '겐고가쓰'의 부분집합임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가주'보다 일상 일본어의 '겐고가쓰도'가 조금 무거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번역이라는 병치레가 수반하는 발열(發熱) 증상 정도로 생각합시다. '파롤'을 '겐(言)'으로 옮긴 것도 잘된 번역 같습니다. "겐(言) 오 마타나이"(말할 것도 없다, 자명한 일이다) 같은 예에서 보듯, 일상 일본어 '겐'은 일상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합니다.

그러나 '파롤'의 한국어 번역어 '화언(話言)' 앞에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군요. 물론 이 말을 표제어로 올린 한국어사전도 있긴 합니다. 예컨대 이희승 국어대사전엔 '화언'이 "말을 함. 이야기함. 또, 그 말이나 이야기"라 풀이돼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한국어에서 '화언'은 죽은 낱말, 없는 낱말입니다. 반면에 '파롤'은 일상 프랑스어에서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낱말입니다. 그 두 말 사이의 거리는, 일상 독일어 '페어슈탄트(Verstand)'나 일상 영어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한국어 '오성(悟性)'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어 보입니다.

'오성'이라는 말도, 철학적 맥락 바깥에선 쓰지 않는 탓에, 부적절한 역어의 대표적 예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사실 일본사람들이 '고세이ㆍ悟性'로 옮긴 것을 그냥 베껴온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화언'은 '오성'보다 더 굳어있는 말입니다. '파롤'을 '화언'으로 옮기는 것은 그 말을 아무 의미 없는 소리뭉치로, 예컨대 '비디비디'나 '쿵빠짜'로 옮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비디비디'나 '쿵빠짜'가 한국어 공간에서 생명 없는 말이듯, '화언' 역시 방부제로 처리한 주검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파롤'을 차라리 '말'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 말이 소쉬르 언어학의 맥락에선 언어활동의 개인측면을 가리킨다는 것이 어차피 명시될 테니 말입니다. '말'이라는 말이 영 내키지 않았다면(도무지 학술용어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사실 이건 커다란 편견이지요. 학술어는 흔히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일 뿐이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그냥 '파롤'이라고 놔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예를 따르려 합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아가려 합니다. '파롤'은 물론이고 '랑그'나 '랑가주'라는 말도, 소쉬르의 맥락에서는, 그냥 가져다 쓸 생각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기'와 '소기', '기표'와 '기의'라는 말의 생기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의 생기보다(심지어 한국어 텍스트 안에서도) 덜하다고 여겨서입니다.

소쉬르 번역과 관련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또 있습니다. '음성학'과 '음운론'입니다. 지금의 언어학자들에게 음성학은 '포네티크(phonetiqueㆍ영어로는 phonetics)'의 대응어이고, 음운론은 '포놀로지(phonologieㆍ영어로는 phonology)'의 대응어입니다. '포놀로지'와 '포네미크(phonemiqueㆍ영어로는 phonemics)'를 구별하는 언어학자도 있는데, 말소리에 관한 이 학문들의 분류와 그 내용은 언젠가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선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를 짧게 얘기하고, 이 용어들이 소쉬르 번역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만 살피겠습니다.

음성학은 음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음운론은 음운(이라기보다 차라리 '음소'라고 해야겠네요. 음운과 음소의 구별에 대해선 뒷날을 기약합시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음성은 말소리 일반을 가리키고, 음소는 한 자연언어에서 실현되는 말소리 가운데 의미와 관련이 있는 말소리들을 가리킵니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음성학은 파롤의 언어학에 속하고, 음운론은 랑그의 언어학에 속합니다.

'동물의 살'을 뜻하는 한국어 낱말은 '고기'입니다. 이 단어의 첫 자음과 둘째 자음은 다 'ㄱ'으로 표기됐지만, 서로 다른 소리로 실현됩니다. 즉 첫 자음은 [k]로 실현되고 둘째 자음은 [g]로 실현됩니다. 둘째 자음도 본디는 [k]였지만, 두 모음(두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이 두 소리는 똑같이 들립니다. 한국어 음성학은 이 [g] 소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거기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g]는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고기'에서는 첫 'ㄱ'이 /k'/로 실현됩니다. 이 경우의 /k'/도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g/와는 달리 /k'/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굴'[kul]과 '꿀'[k'ul]의 비교에서 보듯, 한국어에서 {k'}는 {k}와 대립해 의미 차이를 만들어내는 버젓한 음소이기 때문입니다.

CLG 서론의 마지막 장(章)과 그 부록은 'phonologie'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런데 소쉬르가 여기서 실제로 논의하는 것은 (음운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음성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겹칩니다. 소쉬르의 phonologie는 오늘날의 phonologie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 이 'phonogie'를 '음운론'이라 옮겨야 할까요, 아니면 '음성학'이라 옮겨야 할까요? CLG의 한국어판 둘 가운데 한쪽은 '음성학'을 골랐고, 다른 쪽은 '음운론'을 택했네요. 영어로는 이 'phonologie'를 'phonology'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phonetics'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웨이드 배스킨은 'phonology'라 옮겼고, 로이 해리스는 'physiological phonetics'라 옮겼군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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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3>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ㆍ1903~1978)라는 일본인 언어학자가 있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 들어본 이름이군!"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바야시 히데오는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아니라 예술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ㆍ1902~1983)이기 쉬울 거예요. 성(姓)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릅니다.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름이 닮은 한 살 위의 평론가만큼 20세기 일본 지성사를 요란스럽게 살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언어학사 책 한 구석에 흐릿한 윤곽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를 일으켜 세워 양지바른 곳으로 불러내 봅시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28년,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CLG)를 일본어로 옮겨 출간했습니다. 고쇼인(岡書院)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 일본어판 CLG의 표제는 <겐고가쿠겐론(言語學原論)>이었습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16년 로잔과 파리에서 초판이 나온 CLG의 첫번째 번역본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로 쓰인 CLG의 첫 번역본은 일본어판이었습니다. 오늘날 CLG는 한국어를 포함한 스물 남짓의 자연언어들로 번역돼 있습니다.

유럽어 번역본이 일본어 번역본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데는 유럽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프랑스어를 읽기가 더 쉬웠다는 사정도 개입했겠습니다만, 그 사실 때문에 고바야시 히데오의 높은 안목을 지나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서가 나오고 10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프랑스어권 바깥의 어느 언어학자도 굳이 번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CLG가 일본인 청년 고바야시의 눈에는 단번에 '고전(古典)'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39년 출판사를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으로 옮겼고, 1972년 고바야시가 직접 개역(改譯)하면서 표제를 원서 제목에 맞추어 <잇판겐고가쿠고기(一般言語學講義)>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히데오 이래 수많은 CLG 번역자들은 소쉬르 고유의 프랑스어 용어들, 곧 우리가 지난번에 살폈던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따위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맞춤한 역어(譯語)를 찾기 힘들다는 핑계로 우리처럼 프랑스어 단어를 그대로 썼을까요?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 대응어를 찾아냈을까요?

역자들 대부분이 그 용어들에 대응함직한 말을 제 모국어에서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그 애씀의 과정은 소쉬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론의 영역을 넓힌 이들이 새로운 개념을 담기 위해서 고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적 복제자'(replicator)라는 개념을 담기 위해 '밈'(meme)이라는 말을 새로 고안해냈습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경우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일상어에 특별한 뜻을 담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랑그'(langue), '파롤'(parole), '랑가주'(langage)가 전형적입니다.

일상 프랑스어에서 '랑그' '파롤' '랑가주'는 평이한 말입니다. '랑그'는 그저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그 마테르넬(langue maternelle)은 '모국어'이고, 랑그 알망드(langue allemande)는 독일어입니다.

'파롤'은 그저 '말'이라는 뜻입니다. 파롤 드 디외(parole de Dieu)는 '하느님의 말씀' 곧 복음(福音)입니다. '랑가주'는, '랑그'보다 조금 무거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시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가주 나튀렐(langage naturel)은 '자연언어'이고, 랑가주 아르티피시엘(langage artificiel)은 '인공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쓰임새가 다르기는 하지만, 본디부터 그 말들에 각각 언어의 추상적 측면, 언어의 구체적 측면, 언어활동 전체라는 뜻이 또렷이 담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 말들에 그 특별한 개념들을 담은 것은 소쉬르지요.

이 때, 프랑스어의 일상어 단어들(여기선 '랑그' '파롤' '랑가주')에 거의 대응하는 일상어 단어들을 갖춘 자연언어로 소쉬르 용어를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해당 일상어를 그냥 가져와도, 어차피 CLG에 소쉬르의 설명이 있으니, 독자들이 오해할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스페인어가 그런 경우입니다. 소쉬르의 '랑그'를 '렝과'(lengua)로, '파롤'을 '아블라'(habla)로, '랑가주'를 '렝과헤'(lenguaje)로 옮기는 데, 스페인어 배경의 언어학자들은 거의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만 해도 일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링과'(lingua)와 '링과조'(linguaggio)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소쉬르의 '랑그'를 '링과'로, '랑가주'를 '링과조'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파롤'에 있습니다. 물론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파롤라'(parola)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그저 '말'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낱말' 곧 '단어'(프랑스어의 mot)라는 뜻으로 더 자주 씁니다.

소쉬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프랑스어 '파롤'과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가치(valeur)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CLG에는 '단어'(mot)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러니, '파롤'을 '파롤라'로 옮겨 버리면, 프랑스어 '모'(motㆍ단어)를 번역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런 혼돈을 무릅쓰고 소쉬르의 '파롤'을 '파롤라'로 번역하는 이탈리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탈리아 언어학자들은 소쉬르의 '파롤'을 고스란히 가져와 그냥 '파롤'이라고 씁니다. 본문의 다른 단어들과 체(體)를 달리해, 외국어 단어라는 것을 드러내줄 때가 많지요.

프랑스어 '랑그'와 '랑가주'의 (형태적) 구별이 없는 자연언어의 경우,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영어가 그렇습니다.(일본어나 한국어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는 둘 다 일상 영어의 '랭귀지'(language)에 해당합니다.

웨이드 배스킨(Wade Baskin)이라는 언어학자는 CLG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랑그'를 '랭귀지'로, '파롤'을 '스피킹'(speaking)으로, '랑가주'를 '스피치'(speech)로 일관되게 옮겼습니다.

로이 해리스(Roy Harris)라는 언어학자의 전략은 전혀 달랐습니다. <소쉬르 읽기(Reading Saussure)>라는 단행본 소쉬르 연구서를 내기도 한 해리스는 CLG를 영어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 할 '랑그'를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달리 번역했습니다.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랑그'는 '랭귀지 스트럭처'(language structure), '링귀스틱 스트럭처'(linguistic structure), '링귀스틱 시스템'(linguistic system) 따위로 옮긴 반면에, 일상적 의미의 '랑그'는 앞의 관사를 변화시켜 가며 '랭귀지'로 옮겼습니다.

'랑가주' 역시 그저 '랭귀지'로 옮겼지요. 해리스는 또 '랑가주'를 '스피치'로 옮긴 것(배스킨이 그랬지요)이 엄청난 오역이라고 공박하면서(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스피치'를 '파롤'의 역어로 삼았습니다. 해리스의 주장과 실천이 그의 옳음을 증명해주지는 못하지만,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증명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런 선례의 혜택도 입지 못한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 용어들을 뭐라 옮겼을까요? 그는 '랑그'를 '겐고(言語)'로, '파롤'을 '겐(言ㆍ말)'으로, '랑가주'를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번역했습니다.

또 '시니피앙'은 '노키(能記)'로, '시니피에'는 '쇼키(所記)'로 옮겼습니다. 고바야시의 선례를 따라 한국어판 CLG(들)도 '랑그'를 '언어'로, '랑가주'를 '언어활동'으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각각 '능기'와 '소기'로 옮겼습니다. 한국어판에서는 '파롤'을 주로 '화언(話言)'이라 옮기는데, 이 말 역시 일본식 조어(造語) 냄새를 풍깁니다.

게다가 고바야시의 '겐'이 일상어인 데 견주어, '화언'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너무나 먼 말입니다. '화언'은 소쉬르가 '랑그'와 대립시켜 거론한 '파롤'의 역어로밖에 쓰지 않는 말이고, 그래서 프랑스어 '파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말입니다.

청각이미지와 개념을 각각 가리키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역어들은 더욱 그렇지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역시 일상 프랑스어치고는 조금 무거운 말이지만, '능기'와 '소기'에 댈 게 아닙니다.

'기표'나 '기의', '기고보(記號母)'나 '기고시(記號子)' 같은 다른 한일(韓日) 역어들도 그렇습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을 그냥 쓰느니만 외려 못하게 돼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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