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4> 번역이라는 고역 <中>
소쉬르 용어의 번역 문제를 조금 더 짚어봅시다. 언어활동('랑가주')의 개인측면과 사회측면을 각각 '파롤'과 '랑그'라고 부르면서, 소쉬르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가 자신의 일반언어학 용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어 논한 뒤, 얼른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사물이지 낱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언어에 따라서 몇몇 용어들이 모호해져 서로 깔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립한 구별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고 나서 소쉬르는 독일어와 라틴어의 예를 듭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지요. "가령 독일어 Sprache는 '랑그'와 '랑가주'를 뜻한다. Rede는 '파롤'에 얼추 대응하지만, 거기에 '디스쿠르'(discoursㆍ담화)라는 특수 의미를 보탠다. 라틴어 sermo는 외려 '랑가주'와 '파롤'을 의미하는 한편, lingua는 '랑그'를 가리킨다. 어떤 낱말도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개념들 중 하나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낱말에 내려진 모든 정의(定義)는 헛되다.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 낱말에서 출발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다."
<일반언어학강의>(CLG)의 라틴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CLG가 출판된 20세기 초는 라틴어가 이미 유럽 지식사회의 공용 문어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니 그럴 만합니다. 독일어 번역본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닌 것은, 헤르만 로멜(Herman Lommel)이라는 사람이 옮긴 <그룬트프라겐 데어 알게마이넨 슈프라흐비센샤프트(Grundfragen der Allgemeinen Sparchwissenschaft)>입니다. 1967년 베를린에서 나온 책이군요. 원본 표제의 '강의'(Cours)가 로멜의 독일어 번역본에선 '근본문제'(Grundfragen)로 바뀐 게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로멜은 소쉬르의 '랑그' '파롤' '랑가주'를 뭐라 옮겼을까요? 독일어에 능숙했던 소쉬르의 조언을 따랐을까요? 곧이곧대로 따르진 않았습니다. 로멜은 '랑그'를 '슈프라헤(Sprache)'로, '파롤'을 '슈프레현(Sprechenㆍ말)'으로,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menschliche Rede)'로 옮겼습니다. 독일어 감각이 무디니, 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을 삼가겠습니다.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 곧 '사람의 말'로 옮긴 데서, 로멜이 겪었을 고충이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의미적으로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 대응하는 낱말을 제 어휘목록에 지닌 자연언어들(지난번에 살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그랬지요) 이외의 언어(영어가 그랬지요)로 이 두 용어를 구별해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가 그럴진대, 일본어로 이 둘을 구별해 옮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그것들을 '겐고(言語)'와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두 역어는, '랑그'와 '랑가주'처럼, 형태적 공통인수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랑그'가 '랑가주'의 부분집합이듯, '겐고'가 '겐고가쓰'의 부분집합임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가주'보다 일상 일본어의 '겐고가쓰도'가 조금 무거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번역이라는 병치레가 수반하는 발열(發熱) 증상 정도로 생각합시다. '파롤'을 '겐(言)'으로 옮긴 것도 잘된 번역 같습니다. "겐(言) 오 마타나이"(말할 것도 없다, 자명한 일이다) 같은 예에서 보듯, 일상 일본어 '겐'은 일상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합니다.
그러나 '파롤'의 한국어 번역어 '화언(話言)' 앞에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군요. 물론 이 말을 표제어로 올린 한국어사전도 있긴 합니다. 예컨대 이희승 국어대사전엔 '화언'이 "말을 함. 이야기함. 또, 그 말이나 이야기"라 풀이돼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한국어에서 '화언'은 죽은 낱말, 없는 낱말입니다. 반면에 '파롤'은 일상 프랑스어에서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낱말입니다. 그 두 말 사이의 거리는, 일상 독일어 '페어슈탄트(Verstand)'나 일상 영어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한국어 '오성(悟性)'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어 보입니다.
'오성'이라는 말도, 철학적 맥락 바깥에선 쓰지 않는 탓에, 부적절한 역어의 대표적 예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사실 일본사람들이 '고세이ㆍ悟性'로 옮긴 것을 그냥 베껴온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화언'은 '오성'보다 더 굳어있는 말입니다. '파롤'을 '화언'으로 옮기는 것은 그 말을 아무 의미 없는 소리뭉치로, 예컨대 '비디비디'나 '쿵빠짜'로 옮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비디비디'나 '쿵빠짜'가 한국어 공간에서 생명 없는 말이듯, '화언' 역시 방부제로 처리한 주검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파롤'을 차라리 '말'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 말이 소쉬르 언어학의 맥락에선 언어활동의 개인측면을 가리킨다는 것이 어차피 명시될 테니 말입니다. '말'이라는 말이 영 내키지 않았다면(도무지 학술용어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사실 이건 커다란 편견이지요. 학술어는 흔히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일 뿐이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그냥 '파롤'이라고 놔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예를 따르려 합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아가려 합니다. '파롤'은 물론이고 '랑그'나 '랑가주'라는 말도, 소쉬르의 맥락에서는, 그냥 가져다 쓸 생각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기'와 '소기', '기표'와 '기의'라는 말의 생기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의 생기보다(심지어 한국어 텍스트 안에서도) 덜하다고 여겨서입니다.
소쉬르 번역과 관련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또 있습니다. '음성학'과 '음운론'입니다. 지금의 언어학자들에게 음성학은 '포네티크(phonetiqueㆍ영어로는 phonetics)'의 대응어이고, 음운론은 '포놀로지(phonologieㆍ영어로는 phonology)'의 대응어입니다. '포놀로지'와 '포네미크(phonemiqueㆍ영어로는 phonemics)'를 구별하는 언어학자도 있는데, 말소리에 관한 이 학문들의 분류와 그 내용은 언젠가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선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를 짧게 얘기하고, 이 용어들이 소쉬르 번역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만 살피겠습니다.
음성학은 음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음운론은 음운(이라기보다 차라리 '음소'라고 해야겠네요. 음운과 음소의 구별에 대해선 뒷날을 기약합시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음성은 말소리 일반을 가리키고, 음소는 한 자연언어에서 실현되는 말소리 가운데 의미와 관련이 있는 말소리들을 가리킵니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음성학은 파롤의 언어학에 속하고, 음운론은 랑그의 언어학에 속합니다.
'동물의 살'을 뜻하는 한국어 낱말은 '고기'입니다. 이 단어의 첫 자음과 둘째 자음은 다 'ㄱ'으로 표기됐지만, 서로 다른 소리로 실현됩니다. 즉 첫 자음은 [k]로 실현되고 둘째 자음은 [g]로 실현됩니다. 둘째 자음도 본디는 [k]였지만, 두 모음(두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이 두 소리는 똑같이 들립니다. 한국어 음성학은 이 [g] 소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거기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g]는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고기'에서는 첫 'ㄱ'이 /k'/로 실현됩니다. 이 경우의 /k'/도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g/와는 달리 /k'/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굴'[kul]과 '꿀'[k'ul]의 비교에서 보듯, 한국어에서 {k'}는 {k}와 대립해 의미 차이를 만들어내는 버젓한 음소이기 때문입니다.
CLG 서론의 마지막 장(章)과 그 부록은 'phonologie'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런데 소쉬르가 여기서 실제로 논의하는 것은 (음운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음성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겹칩니다. 소쉬르의 phonologie는 오늘날의 phonologie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 이 'phonogie'를 '음운론'이라 옮겨야 할까요, 아니면 '음성학'이라 옮겨야 할까요? CLG의 한국어판 둘 가운데 한쪽은 '음성학'을 골랐고, 다른 쪽은 '음운론'을 택했네요. 영어로는 이 'phonologie'를 'phonology'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phonetics'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웨이드 배스킨은 'phonology'라 옮겼고, 로이 해리스는 'physiological phonetics'라 옮겼군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