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삼성과 관련된 기고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나 퍼왔다. 

 

삼성해체가 답인가. 

김상봉 교수의 글을 반박한다.

 김상봉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를 읽었다. 김 교수는 이 칼럼에서 국가기구마저 사유화하고 있는 삼성을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삼성 독재, 자본 독재를 끝장 내기 위해 삼성을 해체해야 하며 그 첫걸음으로 삼성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에 삼성 문제가 있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김 교수의 칼럼 안에는 꽤 많은 오류들이 담겨 있으며 이 같은 오류들이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우선 김 교수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기업'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김 교수는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장경제 질서 아래 존재하는 기업 일반 및 기업들의 이윤 창출 행위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극히 부정적이다. 기업들이 이윤 창출만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식의 김 교수의 인식은, 자본이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수취하기 위해 임노동자를 고용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활동하는 기업들이 제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경영을 하고 고용을 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이윤을 창출한들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기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인 듯 싶다.

그런데 김 교수는 자신이 쓴 칼럼 안에서 갑자기 기업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바꾼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라고 쓴 것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분명치 않거니와 김 교수의 논리대로 하자면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이더라도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 안에 있는 한 '인간'이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일텐데 그런 기업을 '사랑'하겠다는 표현을 어떻게 김 교수가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김 교수가 생각하는 사랑받는 기업상(像)은 이윤 창출에 대한 추구는 자제한 채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인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시장경제 질서 아래에 있는 기업들은 이윤 창출에 대한 추구를 자제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윤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윤 창출이라는 결과를 통해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한다. 고용, 투자, 기술 및 경영기법 개발 등의 기업활동이 모두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독과점을 형성하지 않는 한, 지대추구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기업들의 이윤 추구 행위는 권장해 마땅하다.


▲ 삼성그룹 사옥. ⓒ프레시안

또한 김 교수는 삼성과 이건희 일가 및 이건희 일가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가신그룹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삼성 문제의 본질은 이건희 일가가 얼마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고 순환출자 등을 통해 시가총액 200조 원짜리 그룹을 사유물로 삼았고, 계열사들을 동원해 이건희 일가만을 위한 불법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이 비자금으로 국가기관들을 매수해 제 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재용에 대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온갖 불법과 탈법과 위법 행위들은 이같은 삼성문제의 본질에서서 파생된 사건이다. 물론 이학수와 김인주 등의 가신그룹은 이건희의 의중을 받들어 비자금 조성 및 사용, 경영권 불법승계 등을 설계하고 집행했다. 김 교수가 삼성 특권 혹은 독재의 사례로 든 태안 기름 유출사건, 삼성생명보험의 행태 같은 경우도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독단과 전횡 탓일 가능성이 높다.

즉 김 교수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까지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삼성 문제의 실체는 삼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다. 물론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삼성을 공고히 장악하고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를 삼성그룹 전체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은 사실판단의 측면에서도, 전술적 차원에서도 옳지 않다. 김 교수가 삼성 문제의 해법으로 '삼성 해체'라는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도 삼성문제를 진단하면서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과 삼성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데서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김 교수는 삼성문제의 해법으로 '삼성 해체'를, '삼성 해체'를 실현할 첫걸음으로 삼성 제품에 대한 '소비자불매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국가가 삼성 문제를 해결할 힘은 가지고 있으되 의지가 없으므로 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성을 해체해야 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성 제품에 대한 구매를 거부하자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를 삼성그룹의 문제로 등치시키는 오류를 저지른 김 교수는 삼성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엉뚱하게 제시하고 있다.

기실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저지른 행위들은 법치주의와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그러나 금감원,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시장감시기구와 사법기관(검찰 및 법원)이 제 역할을 했다면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거나 적어도 최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저지르고 있는 패악질의 본질은 '법치주의'의 실종에 연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성문제의 해법은 법치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국가의 구성에 있는 것이지 삼성그룹 해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삼성 문제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를 조직해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에게 제 몫을 찾아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성원, 소속 임직원들의 노력 등을 통해 글로벌 기업이 된 삼성을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의 문제로 해체하자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 이상의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김상봉 교수의 지적처럼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다스리는 삼성이 한국사회 모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삼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삼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삼성 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김 교수의 칼럼에는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사실적, 논리적 오류들이 적지 않다.
 

  

 

 

 

 

 

 

 


김 교수가 그와 같은 오류를 저지른 이유 중의 하나가 구좌파적 상상력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삼성 문제 해결에 기업 및 자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삼성 문제는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과 삼성을 분리하는 사고, 법치주의를 철저히 구현하고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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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19특집 기사가 나오는가. 

한국일보에서 퍼왔다. 

 4·19는 조선 말부터 꿈틀대던 민주주의의 정치 패턴을 만든 사건"
[4·19 50년을 말하다] <7>김우창-최장집 대담 '4·19의 현재적 의미'

'이승만 독재'는 사회 배경 고려해 재연구 필요
김승옥 소설·김수영 詩는 4·19 문학의 업적
자유와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을 폭넓게 다뤄
5·16은 민주주의 주체인 시민이 탄생할 기회 뺏어
4·19 엘리트들이 체제에 순응… 386세대서 되풀이
민주정부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 개선에 공 들여야


한국일보의 4ㆍ19혁명 50주년 특별기획 시리즈 '4ㆍ19 50년을 말한다'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 '4ㆍ19의 현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을 마련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최장집 교수의 개인 연구실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김 교수는 한국 사회의 겉과 속을 두루 살피는 섬세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최 교수는 한국 현대사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통찰을 통해 4ㆍ19의 기원과 성격, 정치사회적 파급력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문학과지성사와 공동 주최로 열린 이번 대담의 진행은 문학평론가 우찬제 서강대 교수가 맡았다.

내가 겪은 4ㆍ19

▦김우창= 4ㆍ19가 일어났을 때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에서 유학 중이어서 4ㆍ19를 직접 겪진 않았다. 하지만 그 파장을 실감할 일이 있었는데, 그곳 지역 신문에서 한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다루고자 나를 인터뷰해서 1면에 기사를 게재했다. 워낙 작은 동네여서 내가 거의 유일한 한국인 거주자였다. 

▦최장집= 나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대학생이 아니었으니 엄밀히 따져 4ㆍ19 중심 세대는 아니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최연소 4ㆍ19세대'랄까. 물론 데모에는 참여했고 도심에서 경찰 발포가 있을 때도 현장에 있었다. 개인적으론 물리학과에 진학하려다가 4ㆍ19를 거치면서 정치학과로 진로를 정한 터라 의미 깊은 사건이다.

▦김= 대학생을 비롯, 고교생들에게 4ㆍ19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시위 참여를 종용하는 사람은 없었나. 현장에 없었던 터라 궁금하다.

▦최= 외부인이 데모 참여를 강제하진 않았다. 당시 중앙고, 보성고, 서울고 등 서울 시내 고3 학생회장들끼리 정치적 문제의식을 교환하는 서클이 있었고, 나도 거기에 소속돼 있었다. 4ㆍ19 당시 이 서클을 통해 학생 조직 방안 등을 논의하고, 일부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과격한 고교생들은 평소 공적(公敵)으로 여겨지던 임화수, 이정재 같은 정치깡패들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며 밤길을 나서기도 했다.

▦김= 우리 세대는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대학에 다닐 때도 데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6ㆍ25전쟁 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 광주에서 일본인이 연루돼 발생한 어떤 사건을 놓고 한ㆍ일 정부 간에 협의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일본과 타협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간단히 데모를 했던 것이다. 아직 정치사회적 문제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던 50년대 초에도 민족 문제만큼은 공적인 현안이 됐다.

▦최= 4ㆍ19를 촉발한 것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였다. 특히 3ㆍ15 부정선거, 뒤이은 김주열 사망 사건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그러던 것이 후반기로 갈수록 남북 문제와 민족 문제, 요즘 말로 하면 세계적 냉전과 결부된 분단 문제로 초점이 옮아갔다. 김 선생님 말씀대로 당시부터 일본 제국주의 반대 등 민족주의가 굉장히 강했고, 나 역시 그랬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

▦김= 손세일 전 의원이 쓴 <이승만과 김구>(2008)를 읽어보면 독립운동 세력 안에서의 정치적 문제들이 나와 있는데, 그 중 이승만이 민주정치 체제를 가장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컨대 임시정부 구성ㆍ운영 문제에 있어서 이승만은 민주주의 입장에서 가장 선진적인 관점을 보여줬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4ㆍ19를 통해 독재자라는 누명을 쓰고 타도 대상이 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됐을까.
 

 

 

 

 

    


▦최= 우선 이승만 주도로 수립된 남한 단독정부의 정당성, 도덕성이 취약했다. 1950년 6ㆍ25전쟁으로 권력 기반이 튼튼해지기 전까지, 이승만 정부는 극심했던 좌우 이념 투쟁의 여진 속에 놓여 있었다. 또 이승만 정부가 민주주의 제도 운영에 있어 독단적이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당초 이승만은 김성수 등이 주도한 한민당과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고도 집권 후 인사, 권력을 독점했다. 권력의 유지, 연장을 위해 비정상적 개헌을 거듭했고, 선거 때마다 행정 관료를 대거 동원해 부정선거를 치렀다.

▦김= 개인적 책임과 집단적 책임을 분명히 가를 수는 없지만 부정선거에 있어 이승만이 사전에 알고 지지한 증거가 있는지, 아니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이권 확보 등을 위해 획책했는지를 따져보는 연구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주목할 것은 이승만이 4ㆍ19가 일어나자 비교적 순탄하게 정권을 내놨다는 점이다. 정권을 확실히 장악할 생각이었다면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 하지 않았다. 그가 절대권력을 갖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나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최= 이승만 하야로 4ㆍ19로 인한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을 향한 비판에 과도한 측면이 있을 것도 같다. 아무래도 분단ㆍ민족 문제를 중시하는 좌파 민족해방(NL) 계열이 80년대 운동권 중심 세력이었고, 이들로부터 이승만은 충분한 합의 없이 분단 정부를 구성한 인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아왔다.

▦김= 다들 '일본놈은 모두 죽일 놈이다'라고 성토하는 당시 분위기 속에서도 이승만은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구분 지어 생각했다. 그처럼 선구적 측면이 있던 사람이 이후 어떻게 독재자가 됐는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보태고 싶은 말은 개인은 시대가 가진 여러 가능성 속에서 움직이며, 개인적 동기를 넘어 어떤 사건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최= 이승만 정부가 권위주의로 흐른 이유를 알려면 이승만 개인의 리더십,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분단 정부가 만들어졌던 정황부터 살펴야 한다. 거의 내란 직전에 건국된 탓에 남한 정부는 국가 체제 구축뿐 아니라 북한에 맞서 군대, 경찰 등을 강화해야 했다.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 제도의 구색은 갖췄지만, 실제 그 제도를 움직일 만한 조건은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 견제가 없다보니 자연히 권위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봐도 민주주의 제도가 이식됐지만 작동이 잘 안되고 있다. 이들 나라를 보면서 한국의 해방기를 생각하게 된다.

▦김= 4ㆍ19 때 희생자가 생긴 것은 말할 수 없이 비극적이지만, 이승만이 하야해 하와이에서 숨을 거둔 것도 비극적인 것 같다. 우스개로 얘기해 보면 학교 다닐 때 북악산 길로 통학하면서 중앙청(지금의 청와대) 앞을 맘대로 지나다녔다. 대통령 집무실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웃음)

▦최= 그렇다. 한때 청와대에 매일 드나들었는데 정문 통과할 때마다 얼굴을 보여줘야 했다. 권위주의가 체제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유신체제라고 생각한다. 강한 정보부가 있었고, 잘 짜여진 제도로서 독재가 시행됐던 것이다. '이승만 독재'는 독재할 국가 체제 자체가 엉성한 상황이었던 것만큼 구별해서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

▦김= 최근 한 일본 기자가 "한국에는 왕당파가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왕조 정치의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식민지 치하 때 왕정 복귀를 꾀하는 정치 파벌이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19세기 말부터 이 땅의 민중 사이에선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것이 독립협회 등을 통해 표출됐다고 본다. 그런 희망이 대중적 표현으로 드러난 것이 4ㆍ19다. 4ㆍ19가 국가 발전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할 사실이다.

▦최= 나 역시 4ㆍ19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패턴을 만든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 규모와 중요성은 한국을 도시 사회로 탈바꿈시킨 산업화에 비견될 만하다. 특이한 점은 한국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제도보다는 가치로서 수용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가치들이 죄다 몰락한 가운데 모든 대안적, 이상적인 것을 민주주의라는 말에 투영했기 때문인데, 그렇다보니 대의민주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것까지 민주주의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측면이 있다. 4ㆍ19는 그런 환상을 축소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김= 4ㆍ19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영웅적 인간인 동시에 비극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윤봉길 의사는 독립을 향한 의기(意氣)를 발휘해 독립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그가 젊은 날에 죽었다는 것은 비극적 사건임이 분명하다. 왜 이런 얘길 하냐면, 희생자의 비극을 기억하지 않을 경우 4ㆍ19와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이 전부 실현된다는 착각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 예를 들면 어떤 집단에겐 테러리즘도 영웅적 사건으로만 기억된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영웅적 행위에선 그 비극을 무시하면 안된다. 영웅적 사건이 없는 시대가 가장 좋은 것이다.

▦최= 한국 현대사가 압축적 근대화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부터 민주화까지 반세기도 안돼서 한 국가가 겪을 수 있는 모든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서양 역사를 보면 17~18세기에 걸쳐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이 도래하고, 19세기에 산업화가 일어나는 등 한 세기 이상에 걸쳐 단계적 변화를 보인다. 헤겔이 말한 '시대정신'도 이런 장기적 변화에서 추출된 개념이다. 반면 한국에선 가치가 합의될 만한 수준에서 전개되기 힘들다. 역사가 각 부문별로, 짧은 간격으로 변화하다보니 전체 역사의 인식틀이 없고, 한 시대의 중심 그룹과 그들의 가치가 뒷세대와 충돌하면서 극심한 이념 갈등을 빚고 있다.

새로운 문학의 탄생

▦김= 4ㆍ19 이후 문학에선 김승옥 소설, 김수영 시 등을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 눈여겨볼 것은 4ㆍ19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들이 이후의 문학보다 이념적 측면에서 훨씬 폭이 넓은 것 같다는 점이다. 자유,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 등 특정 이념에 묶이지 않는 주제들이 4ㆍ19 문학에서 다뤄졌다. 이는 4ㆍ19가 사회적 혁명의 의미가 약했고, 당시 사회의 소망을 반영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 나는 당시 유행하던 전쟁 소재의 문학보다 4ㆍ19 이후 막 나온 김승옥, 김수영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특히 대학 때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을 읽으면서 느낀 감동은 굉장했다. 우리 세대 전체에게 세례를 준 작품이다.

▦김= 우리 세대는 서기원, 하근찬의 소설이나 <청록집> 같은 시집을 읽었다. 김현 등 4ㆍ19세대 평론가들이 동세대 문학을 적극 옹호하면서, 50년대 문학이 다소 뒤떨어지는 듯한 인식이 형성된 측면이 있는데 꼭 그렇진 않다. 예컨대 50년대 작가들이 종군 작가로 활동하며 남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작품을 썼다는 지적이 있는데, 염상섭 조지훈 모윤숙 등이 그렇듯 사상보다는 생계를 위해 종군 작가로 일한 측면이 크다.

4ㆍ19가 남긴 것

▦최= 4ㆍ19는 당대 엘리트 집단이던 학생을 비롯한 민간 세력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5ㆍ16으로 인해 좌절됐다. 당시 군은 사회 계층상 엘리트 축에 못 끼는 하급 집단이었는데, 군사정부가 국가주의, 발전주의의 기치를 걸고 추진한 산업화에 4ㆍ19혁명 엘리트들이 산업 역군으로 통합돼 부수적 역할을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시대에 맞서 정치적 행위를 일으킨 집단이 다시 체제에 순응되는 패턴이 이때부터 만들어져 386세대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김= 4ㆍ19의 이념을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옮길 만한 정치적 지도자가 없었다. 군사정권은 정치적 동원의 기제로 민족주의를 내세웠는데, 민족이란 구호가 막강한 것이 누구도 "민족, 그까짓 게 뭐냐"고 감히 무시할 수가 없다. 물론 민족주의가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고 중요한 과업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면 좋겠지만, 이것이 단지 정치적 동원을 위한 구호로만 쓰일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민족이란 구호의 이중성을 잘 살펴야 한다.

▦최= 4ㆍ19와 87년 민주화운동 모두 대학생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학생은 아직 생계를 전담하지 않는 가운데 높은 자율성과 자유를 누리는 집단이다. 그렇다보니 이들의 급진성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접맥되지 않는, '중산층 급진주의'라고 부를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 정당체제가 사회경제적 문제보다는 추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 동의한다. 세종시 문제만 해도 구체적으로 다뤄야 할 정책 과제를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접근하는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현상이다. 토목이라는 것은 일종의 독재 정치다. 몇 사람이 그린 도안에 맞춰 국민 세금을 들여 사람이 버젓이 살고 있는 땅을 뜯어고친다는 발상이 그렇다. 정치나 정책은 구체적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최= 선생님 말씀에 덧붙이면 4ㆍ19부터 87년 민주화까지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념과 가치로 추구돼 왔는데, 막상 그런 기반 위에 선 민주 정부가 보통 사람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하는 것보다 되레 그것을 뒤흔드는 거대 토목 공사를 벌이는 것은 매우 역설적 현상이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개개인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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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7) 월터 미뇰로

월터 미뇰로(1947~)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 고등연구원(Ecoles des Hautes Etudes)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듀크대 교수이다. 기호학을 전공했으나 점차 연구 영역을 넓혀 문학이론, 문화인류학, 문화연구 등을 넘나들었다. 전 지구적 식민성, 지식의 지정학, 경계사유, 탈식민주의 등이 주요 관심사로, 대표적인 저술로는 <르네상스의 어두운 측면>(1995), <지역의 역사/전 지구적 설계>(1999), <라틴아메리카, 그 이름 뒤에 감춰진 현실>(2005) 등이 있다. 마지막 책은 번역 작업이 끝나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며, 이에 맞춰 내한하여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미뇰로는 직접적인 식민통치 시대는 갔지만 지식의 지정학을 통한 식민지배는 오히려 강화됐다고 본다. 최근 탈식민주의 담론이 주목받는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배태한 서구 중심 지식이 결국은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한 현실에 대한 반성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 월터 미뇰로
 



나는 무식하다. 그래서 들뢰즈, 네그리, 하트, 라캉, 지젝 등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이미 ‘포스트-’가 붙은 이론들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던 터에, 마침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유학 시절 페루, 스페인, 칠레, 아르헨티나 등으로 떠돌아다니던 내게 위험을 경고한 이가 있었는데도 깨닫지 못했으니 다 내 불찰이다. 그 사람은 그저 며칠 미국에 들렀을 때 만난 교포 택시기사였다. 그는 내게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중남미에서 뭐 배울 게 있느냐고.

나는 정말 몰랐다. 지식에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줄을. 중심에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듣고, 또 믿는다. 하지만 변방에서 이야기하면 시큰둥하다. 중심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표절이라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 한다. 아니 보통은 듣지도 않는다. 세계사회포럼이 파국을 그렇게 경고했건만 사람들은 오직 다보스포럼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국제 금융위기였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은 스위스만 바라보며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지식에서 왕후장상의 씨는 ‘무엇을 말하는가’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직 ‘어디서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지식의 진실 여부보다 발화 위치가 더 중요한 셈이다. 그래서 지식은 지정학적이다. 지식도 지정학적 요충지가 있는 것이다.

월터 미뇰로는 이런 현실을 단호히 거부한다. 지식의 영역에서 식민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뇰로는 직접적인 식민통치가 대세였던 제국주의 시대는 갔지만, 지식의 지정학을 통한 식민통치는 오히려 강화되어 정치나 경제 등의 영역에서 실효적인 식민통치를 뒷받침하고 작동시킨다고 본다. 미뇰로가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식민성, 즉 직접적인 지배 없는 식민통치를 타파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억압하는 서구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을 해부, 비판했다는 점에서 미뇰로는 사이드의 식민성 비판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미뇰로가 보기에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옥시덴탈리즘이다. 서구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거니 하면서, 비서구를 기술하고 개념화하고 서열화해도 되는 특권이 있다는 인식인 옥시덴탈리즘이 있었기에 오리엔탈리즘도 발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이드 예찬론자들은 수긍하지 못하겠지만, 미뇰로에게 옥시덴탈리즘은 모든 사유의 범주와 세계를 분류하는 지정학적 담론인 반면, 오리엔탈리즘은 그 결과 파생된 하나의 연구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미뇰로는 사이드의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대신 포스트옥시덴탈리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아가 탈식민주의(decolonialism)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포스트-’가 ‘후기’인지 ‘탈’(脫)인지는 논란거리겠지만 아무튼 포스트식민주의보다 더 완벽한 식민성 극복이 탈식민주의의 꿈이다. 1990년대 엔리케 두셀, 아니발 키하노, 월터 미뇰로 등이 탈식민주의 논의에 중요한 구실을 했고, 이로부터 근대성/식민성/탈식민성 연구 그룹이 탄생되었다. 미뇰로는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포함하는 국제적인 탈식민주의 네트워크 구축에 힘쓰면서 그룹의 좌장 구실을 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이 그룹의 비판은 그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월러스틴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기원이 1450~1640년이며, 이때부터 작동한 체제를 근대 세계체제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이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작동원리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지식(월러스틴은 이를 지문화 geoculture라고 부른다)이 18세기 프랑스혁명 즈음에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대성/식민성/탈식민성 연구 그룹은 1450년이라는 기점, 지문화의 18세기 정립론, 근대 세계체제라는 명칭 등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월러스틴을 비판한다.  


 

 

 

 

이 그룹이 보기에 근대 세계체제의 1450년 태동론은 근대성이 서구 고유의 것이라는 서구 중심적 시각의 산물이다. 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근대성 자생론은 서구가 만든 신화일 뿐이며, 사실은 복수의 근대성이 소통하는(trans) 전 지구적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지문화의 18세기 정립론에 대해서도 두셀은 2단계 근대성론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아메리카 정복으로 1단계 근대성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등으로 18세기에 2단계 근대성이 발현되었다는 것이 요지이다. 월러스틴의 18세기론을 배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 지식의 우월함만 부각시키고, 그 지식이 원주민 수탈을 정당화시켰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뇰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톨릭, 서적, 판화, 지도 등이 어떻게 인종 차별과 정복 등을 정당화시키는 지식을 구축했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식이 오늘날까지도 작동함으로써 식민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세계체제라는 명칭에 대한 비판에는 사회학자 키하노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아메리카 정복을 서구 근대성의 기원으로 본다. 이를 계기로 인종차별에 입각한 국제적인 노동분업 시스템, 즉 오늘날과 같은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잉태되고 가동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특별히 수탈 구조를 부각시키는 것은 근대성의 뒤에 감추어진 식민성을 직시하라는 주문이다. 키하노가 보기에 근대성과 식민성은 동시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양자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근대 세계체제라는 명칭은 식민성을 누락시킴으로써 진실을 호도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이에 키하노는 근대/식민 세계체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에서 연구 그룹이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중심의 발전과 주변의 저발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을 비유하기 위해 종속이론가인 군더 프랑크가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연구 그룹은 페루의 마르크스주의자 마리아테기, 프란츠 파농, 종속이론, 해방철학 등으로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유를 계승하고 있다. 실제로 두셀은 해방철학의 대표적 학자이고, 키하노도 저명한 종속이론가였다. 1980년대의 경제위기와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이념의 시대가 갔을 때 학계의 중심에서 당연히 밀려났어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건재,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두셀과 키하노가 과거의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유연한 연구물을 산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문제의식이 옳다고 믿는 이들을 다시 증가시킨 현실 때문이다. 몇 년 전 <고삐 풀린 현대성>이라는 책이 번역된 적이 있다. 세계화를 긍정적으로 볼 것을 주문한 대목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재작년 탈식민주의 그룹이 다수 참여한 <고삐 풀린 식민성>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세계화가 사실은 식민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물론 필자들이 염두에 둔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이다. 신자유주의를 배태한 서구 지식이 결국은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만 오늘날의 현실에서 식민성이 고삐가 풀려 미쳐 날뛰고 있다는 진단은 설득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우석균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페루 가톨릭대에서 석사, 스페인 콤플루텐세대에서 중남미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잉카 IN 안데스>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를 말하다>(공역),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마술적 사실주의>(공역) 등이 있다.



Walter Mign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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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8) 엔리케 두셀


엔리케 두셀은 1934년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태어나 철학을 공부했다. 스페인 콤플루텐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대학에서 인류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던 중 1973년 극우집단의 살해 위협을 받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윤리학, 정치철학, 라틴아메리카사상사 분야의 저술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지금도 건축중인 해방철학의 기본 골격을 마련했다. 카를 오토 아펠, 잔니 바티모, 위르겐 하버마스, 리처드 로티, 에마뉘엘 레비나스 등과 지속적으로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으며 50여권의 저서와 400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해방철학>(1977), <말년의 마르크스(1863~1882)>(1990), <타자의 은닉>(1992), <철학을 넘어서-역사, 마르크시즘, 해방신학>(2003), <정치학에 관한 20개의 명제>(2006), <해방정치학- 비판적 세계사>(2007) 등이 있다
  

 

 

 

 

 

현재 진행중인 세계화가 근대·식민 자본주의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권력의 식민성’은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두셀은 해방철학이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적 해방의 특성을 실재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며 은폐되었던 타자성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엔리케 두셀
 


혁명 사상에 치명상을 입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인류는 혁명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있지만, 그 후 20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월가의 파산은 혁명 이후를 생각하기에도 너무 성급한 시점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의 범람은 옛것은 사라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시대적 불안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다. 마르크스에게 혁명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면, 베냐민에게 혁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역사를 멈추게 하는 제동장치였다.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는 사회적 불의와 생태계의 파괴는 좌우를 불문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부를 만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베냐민의 새로운 혁명 개념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새로운 혁명 개념은 1960년대 말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 근대성의 본산인 유럽에서는 탈근대적 비판이, 서구 바깥에서는 라나지트 구하를 중심으로 포스트식민주의운동이 태동했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두셀을 중심으로 해방철학이 등장했다. 해방철학 연구자들의 글을 모아 놓은 첫번째 책(1973)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 형식의 글이 실려 있다. “해방철학은 ‘에고’(ego)로부터, ‘나는 정복한다’, ‘나는 생각한다’ 혹은 ‘권력의지로서의 나’로부터 사유하지 않는다.… 해방철학은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변화된 사람의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종속국가의 위치에서 사유한다.… 해방철학은 타자의 외부성으로부터 사유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철학은 레비나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주체와 가치, 진리와 형이상학을 붕괴시키기 위해 고투했던 니체와 현존재(Dasein)를 통해 주체의 주체성을 비판했던 하이데거가 완고한 내부성의 철학의 외부를 탐색하는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면, 레비나스는 이성의 외부가 타자임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레비나스는 외부를 근대적 범주(예컨대 이성의 외부로서의 광기)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푸코의 타자와도 달랐다. 그러나 해방철학은 레비나스가 유럽 내부에서 사유하고 타자에 대한 순수한 윤리적 책임만을 요구하는 지점에서 레비나스와 갈라진다.  

 

 

 

 

   

두셀은 해방철학이 객관적이고 탈정치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체계의 희생자, 가부장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 황폐화된 지구를 상속받을 미래의 세대 등 가능한 모든 부류의 타자성을 위해 투쟁할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철학은 자기비판적 자세로 주변부에, 서발턴(하위주체)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두셀의 주장에는 비판철학자로서의 결기가 드러난다. “체계 안에서, 체계 앞에 서 있는 타자를 위한 책임은 모든 우선성보다 앞서는 우선성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 능동성이다. 그것은 세상의 시작보다 앞선 시작이고, 세상을 있게 한 시작이며, 세상의 선험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해방의 영웅은 체계의 반(反)영웅이고 위험에 자신의 삶을 던진다. 따라서 (억압받는 타자에 대한) 책임은 최상의 용기이고, 부패하지 않는 요새며, 총체성의 구조를 드러내는 진정한 통찰력이자 지혜다.”

해방철학의 비판적 범주가 근대적 주체성을 겨냥한다면, 비판의 구체적 실천은 역사적 접근으로부터 얻는다. 역사적 접근이란 ‘장기 16세기’에 시작된 세계체제(world-system)를 뜻한다. 해방철학을 (푸코, 데리다, 바티모, 레비나스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데카르트가 163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말하기 훨씬 이전에, 스페인 국왕이 서류에 서명할 때 사용했던 ‘나’는, 코르테스가 1521년에 ‘나는 정복한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했던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프랑스 ‘고전 시대’의 인식론을 탐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난 500년 동안 근대성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체제 분석은 근대성, 식민주의, 세계체제, 자본주의, 아메리카의 발견·정복이 동시적이고 상호구성적 사건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계몽주의 근대성은 15세기 말 식민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성을 은폐하는 근대성의 신화다. 이런 맥락에서 두셀은 근대성의 신화가 독자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유럽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유럽을 마치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메리카의 발견·정복으로 시작된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대성 신화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전지구적인 중심-주변 구도의 출발이었다. 아메리카 정복 초기에 ‘인디오 전쟁의 정당한 명분’을 주장했던 세풀베다가 최초의 옥시덴탈리즘 이데올로그였다면,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했던 라스 카사스는 중심-주변의 구도에서 근대성에 대한 대항담론을 설파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한 현재 진행중인 세계화가 근대·식민 자본주의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식민주의가 종식된 이후에도 ‘권력의 식민성’은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철학이 단지 라틴아메리카사상의 한 가지 양상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면서 동시에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착취 구조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셀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럽중심적 ‘거대서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체계 외부의 타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하기 위해 단지 작은 이야기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리고베르타 멘추, 사파티스타, 아메리카의 흑인, 미국에 거주하는 라티노, 페미니스트, 주변인, 전지구화된 초국적 자본주의의 노동계급 역시 그들의 기억을 재건하고 그들의 ‘인정 투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서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두셀이 경계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환원론적인 방식으로 적용되는 이원론(중심-주변, 발전-저개발, 종속-해방, 총체성-외부성 등)이다. 다시 말해,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전통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전근대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주의자, 포퓰리스트, 파시스트 집단이 추구하는 반근대적 지향도 아니며, 파편화된 순수한 차이만을 긍정하는 탈근대적 비판도 아니라는 점이다. 두셀은 해방철학을 트랜스모던(transmodern)적 기획, 즉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적 해방의 특성을 실재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며 근대성이 저질렀던 희생제의적·신화적 특성을 부정함으로써 은폐되었던 타자성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화→문명화→근대화→세계화’라는 근대성의 신화와 수사학에 가려진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폭력과 불의를 비판할 수 있을 때 칸트가 설파했던 계몽의 이성은 비로소 해방의 원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계몽적 이성을 앞세운 유럽중심주의와 발전주의의 오류가 드러날 때 추상적 보편주의에 가려져 있는 현실의 다채로운 풍경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다. 두셀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완의 기획은 근대성이 아니라 탈식민성이다. <끝> 

 

 

 

 

 

김은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 김은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김은중은 한국외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멕시코국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항, 새로운 연대, 다문화주의>(공저), <세계화와 라틴아메리카 이주와 이민>(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활과 리라>(공역), <흙의 자식들 외>, <라틴아메리카-그 이름 뒤에 감춰진 현실>(근간) 등이 있다.


Enrique Du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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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김에 하나더 강준만의 글을 ..... 생각할 여지가 많은 글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 휴가를 앞두고 읽은 책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고 한다. 1932년에 출간된 책을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읽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한 어느 신문기사 내용이 흥미롭다.

“니버가 이 책을 쓴 것은 1930년대 대공황으로 미국 내 갈등이 극심했던 때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거치며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는 지금의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이 대통령도 이런 점에 착안한 듯하다. 최근 이념과 지역 간 고질적 갈등을 지적하며 ‘근원적 처방’을 찾겠다고 공언했던 이 대통령으로선 니버의 대안에 귀 기울일 만하다.”

그럴까? 영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니버가 이 책을 쓴 주요 목적은 도덕주의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드는 개혁·진보주의자들의 비현실적인 타성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한 사람들은 주로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니버의 주장에 대해 냉소주의, 비관주의, 패배주의 등의 딱지를 붙이며 맹공했다.

이젠 상식이 되었지만, 아무리 도덕적인 개인들이라도 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권한과 책임의 분산’ 때문에 전혀 다른 특성이 나타난다. 집단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논리와 생리를 갖게 된다. 그 집단은 나라일 수도 있고 거대 조직일 수도 있다. 느슨하게 조직된 연고집단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구성된 연고집단일지라도 탐욕과 후안무치의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것이다.

재벌이건 공기업이건 언론사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거대 조직들의 구성원들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매우 예의 바르고 선량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평소 생각이 옳은 것인가 하고 회의하기도 한다. 이게 참 딜레마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평가할 때에 주요 기준으로 삼는 건 명분이나 강령 따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대인관계 태도나 인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시원찮으면 아무리 숭고하고 고상한 명분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라도 증오와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이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도덕적 우월감’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다.

‘도덕적 인간’의 함정도 있다. 니버는 “개인이 하나의 명분이나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경우에도 권력의지(혹은 힘에의 의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명분과 사적인 출세욕(명예욕)은 뒤섞이기 마련인데, 사적인 출세욕이 공적 명분의 성공을 압도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이 개혁·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늘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의심하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이념과 지역 간 고질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 처방’을 찾는다는 건 아무래도 번지수가 안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해석의 자유는 있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진보니 보수니 하고 나눌 것 없이, 어떤 집단의 지도자나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집단이 몹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이기주의와 부패는 모든 조직과 집단의 속성이다. 이 속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완화할 수 있는 길은 있다. 그건 바로 문호 개방이다. 잡다한 것을 뒤섞는 비빔밥 정신의 실천이다. 일사불란한 효율성은 좀 떨어질망정 집단이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는 건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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