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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2015년 7월. 페스트를 읽었다.
사실 한 10여년 전에 영 미덥지 못한 번역본으로 보다가 때려치운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읽게 된 건 메르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전염병이란 우리와 먼 얘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은 그 때보다 훨씬 더 잘 다가왔고 / 물론 더 읽기 편해진 번역도 한 몫 했다.
고전이 영원한 이유 중 하나는 보편성의 확보인데
이 소설 역시 언제 읽어도 이질감 없는 인간의 여러 군상들이 잘 그려져있다.
그리고 시체를 나르던 열차나 격리자들을 가뒀던 경기장, 무엇보다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시대와 맞물려 나치와 유대인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다고 하는데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딱히 그렇게 보진 않았다.
그 때, 나는 왜 이 책을 선택했었을까?
페스트란 막연하게나마 다들 무서운 전염병이라고 알고 있고 그런 끔찍한 비극은 내 일이 아닌 이상 자극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 이 기록에도 자신만의 특징, 즉 노골적으로 가혹하지 않고 구경거리 보여 주듯 비열하게 흥미를 유발시키지도 않는 감정들, 즉 선의라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기록이 지녀야 할 개성이 부여 될 것이다. (p.179)
이런 일차원적인 흥미로 접근했던 나에게 카뮈는 일침을 놓는다.
그러니까 지옥을 방불케하는 곳에 영문도 모른 채 빠져든 인간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이 책 대신 가상의 스토리이긴 하지만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자들의 도시> 를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소설은 한 항구 도시에 페스트가 돌고
의사 리유를 중심으로 페스트의 시작과 끝까지 그가 지켜봤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자가 등장하지만 위로부터 압박을 받는 언론을 비난하는 데 할애를 하지 않고
정부의 대처가 미흡하다고 그들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게 아니라
그냥 의사 리유가 환자를 치료하면서 봤던 사람들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
그래서 평범한 독자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비출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여러 인물이 나오는 만큼 읽는 독자에 따라 와닿는 사람이 다를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엔 파늘루 신부와 오통판사와 그의 아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시체를 매장하고 화장터로 옮기던 장면의 기록은 그 서늘함에 나도 모르게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었다.
# 누가 감히 신에 대한 증오를 선택하겠는가? 파늘루 신부.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와 같을 수 없으며...> 라는 대목이 나오듯이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통해 이 시대에서 신은 과연 뭘까, 신은 왜 인간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인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설의 거의 끝부분을 보면 왜 시종일관 조금은 시큰둥하고, 가끔 딴 생각도 할 만큼 종교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지만
...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에 호소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 인간만으로,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으나 경이로운 사랑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이따금씩 기쁨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p.384-385)
이 소설에서 신부가 등장하고 그의 설교가 두 번이나 나오는 까닭은 분명 있을 것이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유신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작가의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인간에겐 원죄가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정말 아무 죄 없어 보이는 어린 아이- 오통 판사 아들의 죽음은 신을 부정하고 싶고, 있다면 원망하고 싶게 만들 정도다.
그 여린 아이가 페스트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다 신부에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리유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바로 사과를 하고 신부는 너그럽게 받아주지만 생각할 수록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파늘루 말이 맞아요. 타루가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두 눈을 잃었을 때, 기독교 신자라면 신앙을 잃거나 혹은 두 눈을 잃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고 싶지 않은 거고, 그는 끝까지 갈 겁니다. 그가 하려던 말이 바로 이거죠. (p.293)
# 시체를 가득 실은 열차가 달리는 밤
죽음보다 삶이 앞서는 풍경은 당연한 것일 수도, 어떻게 보면 참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화장터의 연기를 불쾌해하며 동네를 떠나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주민들 때문에 연기방향을 바꾸는 일이나 죽은 환자를 지체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 공동묘지에 도착해 매장해버리는 모습.
차량 통행 금지 때문에 밤에 열차를 통해 시체를 화장터로 옮기는 <승객 없는 전차 객차들의 기이한 행렬> 등은 읽으면서 묘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나은 것을 원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으며 늘 이겼다.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의 서글픈 최후와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 비록 도시가 대합실로 여겨질 정도로 생기는 없었지만...
나는 숨죽인 밤의 공동묘지부터 거리마다 군림하고 있는 위인들의 동상이 부질없어 보이는 불 꺼진 도시까지 이 곳을 헬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상상을 해봤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기 어려워보이지만 결국은 그 도시에 축제가 찾아온다.
# ... 그리고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p.395)
이 소설은 나올 당시 보이스카웃 소설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윤리적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인상이 들기도 한다. 라고 김영하 작가가 팟캐스트에서 이 소설을 읽어주며 말했다.
반독투쟁을 했던 알베르 카뮈가 얼마나 악, 이라는 것에 고통을 받고 이 세상 모순에 염증을 느꼈을지 내가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아마 타루의 모습과 그가 하는 말이 그의 마음을 조금은 대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페스트를 윤리적 문제와 결부시킨 것은 이 소설의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만들고 독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지만 그래서 고전으로 영원히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확 다가와 밑줄 그은 부분이 많다. 10여년 전에는 몰랐던 이 책의 매력을 10년 후엔 아마 지금보다 더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