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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ㅣ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0. 5월 말 즈음부터 한 소설의 제목과 일부 내용이 인터넷 상에서 매일같이 눈에 띄었더랬다. 이런 추세는 메르스가 창궐하면서 그 빈도수가 높아졌다. 심지어는 내가 구독하는 신문에서 한 문화평론가가 이 책을 소재로 칼럼을 쓰기도 했다. ‘제목이 자극적이네. 흥미 끌기 딱 좋구만.’ 난 이 책이 이슈가 되는 이유를 자극적인 제목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동시에 난 이 열렬한 반응과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오히려 이 소설에 거부감이 들었다. 비문학이 아닌 이상, 난 좀 더 은은하고 담담해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무릎을 탁!치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이 늘 최고의 제목이라고 생각해 왔다. 줄거리를 노골적으로 밝히는 소설 제목에 거부감이 들었던 이유다. 게다가 매일 같이 인용되는 내용들을 보니 분명 재밌고 공감이 가긴 한데 너무 ‘직설적’이고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1. 오후 1시쯤 택배가 왔다. 박스를 열어 책의 물성을 느껴봤다. 음... 책 표지도 예쁘고 표지 질감도 좋은데? 이렇게 생각하고 책의 첫 장을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난 그냥 한 챕터 정도 대충 읽고 책상 위에 올려둘 생각이었다. 그날의 난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2. 택배 상자를 풀던 자리에서 그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 책을 읽어가던 나는, 내가 목표한 한 챕터를 다 읽고는 책을 내려놓기는 커녕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선호하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는 휴지까지 구비해 놓으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읽어 내려갔다. 분명 이 소설은 ‘신파’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쩌다 신파조로 흐를라치면 애써 목을 가다듬으며, “아 됐고,”라고 말하는 듯한 소설을 보면서 이렇게나 펑펑 울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3. 내가 가장 동요했던 부분은 주인공의 비극적으로 가난한 환경이라는 설정이나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 내가 직접 겪어온/겪고 있는 날 것의 삶에 대한 묘사였다. 막상 내가 울었던 부분은 연인이나 가족과의 이별과 같은 ‘대놓고’ 슬픈 부분이 아니다. 계나의 직장생활 이야기, 필기시험 통과 경험이 없어 스터디마저 지원하기 힘든 지명의 취업준비생 시절 이야기와 같은 부분들. 부조리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버텨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훌륭한 것이라고 주입받으며 살아온 나를 토닥여주는 기분에 울컥하는 감정이 솟았다.
4. 이 소설이 그렇게나 화제가 된 것도 마치 거울같이 우리를 비춰주는 ‘현실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여기에는 적당한 판타지가 곁들여져 있다. 작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굉장히 현실적이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적이라 찝찝하진 않은, 적당히 위안 받을 수 있는 조미료로 기능하는 약간의 판타지. 몇 년이 지난 뒤에, 그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충분히 나아졌음에도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하고 기다려줄 연인의 존재가 너무 판타지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사랑에 대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좋았던 건, 이런 판타지가 주인공의 삶에 결정적 ‘결말’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도구’로써 활용됐다는 점이다.
나는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좋은 점, 안 좋은 점들을 생각했어. 좋은 점은 사랑받는다는 느낌, 그리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두 가지. 어떤 애들한테는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지. 하지만 난 ‘사랑의 감정’에 흠뻑 젖는 스타일은 아니었어. 시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사랑의 도주 같은 걸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리고 경제적 안정이 제일 중요했다면 아마 리키랑 결혼했을 거야.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안 좋은 점은, 일단 걔랑 있으면 내가 너무 슬퍼질 거 같더라.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가 없다는 거. 전업주부가 아니라 내가 직장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독립하긴 어려울 거 같더라고. 전에 한 번은 지명이한테 “너는 왜 매일 퇴근이 늦냐, 평생 그렇게 야근을 해야 하는 거냐?”라고 따지니까 걔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있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
“호주에선 안 그래.”
내가 반박했지.
“호주에서도 그럴걸. 너도 호주에서 제대로 된 사무직 일은 해 본 적 없잖아. 호주에서도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은 정신없이 바쁠걸?”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2015), 민음사, 158-159 pp.
‘여성이 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구분이 있고 ‘살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는 건 결국 이런 사고 때문이 아닐까. 여자는 ‘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직업이 더 ‘적합하다’는 인과 관계가 생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보다 ‘살림’을 더 해야 한다, 어떻게 남편/아버지가 겪는 바깥일의 고됨을 알겠느냐 같은 생각이 나오는 것이겠지. 지금은 지명이 자신을 사랑할지라도 지명과 결혼한다면 자신에 대한 존중보다는 보살핌에 가까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계나가 이별을 결심하는 이 부분이 좋았다. 관계를 지속시키고 서로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관계는 누가 누구를 ‘보살핀다’고 여겨지는 관계(사실 여부를 떠나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생각'한다면)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5. 노출된 정보만으로 봤을 때 ‘1등 시민’으로 살아왔으리라 여겨지는 작가가(실제 인터뷰에서도 작가는 “저는 계나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 많은 기회를 받았고, 부채의식을 강하게 느낍니다.” 라고 말했다.) 한국과 호주의 다양한 2등 시민들, 혹은 3등 시민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꾸준히 전개하는 것도 인상 깊었다. 타자는 자신의 이익과 반하더라도 주류의 시선을 내면화해야 사회에 적응하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주류의 시선을 익혀나간다. 하지만 주류는 타자의 시선을 애써 이해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타자의 관점 따위를 접하기조차 힘든 구조일뿐더러 알아봤자 정체성에 혼란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높은 감수성이 인상 깊었다.
6. 하지만 책 말미의 허희 평론가의 말처럼 계나는 결코 행복하지만은 못할 것 같다. “나도 지잡대 나왔어. 같은 처지야.”라고 말하는 재인에게 굳이 “난 홍대 나왔는데?”(44p.)라며 나와 너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모습이나, 친구인 은혜, 미연, 경윤과 언니, 동생, 동생의 남자친구를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모습에서 결국 지명의 부모, 지명이 하던 행동이나 사고와 계나의 모습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낀다(언뜻 아주 약하게 ‘나빼썅’ 전법이 느껴지기도……. 심지어 위에 인용된 부분에서도 그런 계나의 모습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오마이갓.).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통찰이 아쉬웠다. 서로의 모습을 조금 더 이해하고 존중하는 주인공이었다면 너무 계몽적인(그래서 읽기에 불쾌한) 이야기가 되려나?
7. 이러나저러나 이 소설의 강점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낸 20대, 30대의 삶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글 중에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라는 칼럼이 있다. 쉬운 글은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져 아무 노동(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기에 쉬울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이렇게나 재밌고 쉽게 읽은 것도 결국은 나의 삶,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직접 읽기 전 인용된 부분을 보면서 ‘가볍다’고 느꼈던 것도 결국은 그래서였겠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아무튼 그럼에도 내가 별 다섯을 준 것은 그 쉬운 ‘재미’가 정말 끝내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