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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기대가 너무 높았던 건지 막상 읽어보니 좀 실망스러웠다. 서론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마치 앞으로 글쓴이의 뛰어난 통찰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헌데 본론도 딱 서론만큼이다. 통찰이 더 진전되지 않고 서론 정도의 통찰을 보이는 여러 글들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일관성을 보이지도 않는다. 서론에서 글쓴이 스스로가 말했듯(이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다) 잡문같다는 느낌이다. 물론 당연히 잘 쓴 잡문이긴하다. 문장도 깔끔하고 쉽다.
내 말은 내용적인 면에서 그랬다는 거다. 특히 젠더감수성은 내가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했다. 한겨레에 문유석 판사가 연재하는 소설보면서 크게 기대했는데 이분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뭔가를 가진 것은 아닌듯 하다.
예컨대,
역시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사모님들이 더 적극적으로 화제를 이끌었다. 하프를 전공한 어느 사모님이 수학과 교수인 부군을 제치고 자녀 수학 선행학습 스케줄을 짜고 있었고, 발레를 전공한 어느 사모님은 미국 박사 출신인 부군을 제치고 애들 영어 웅변대회 수상경력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들. ˝그래도 공부 하나만 불균형하게 잘하는 애가 되지 않도록 이것저것 많이 시키고 있어요.˝ (중략) ˝우리나라도 이제 안정된 사회인데 더이상 평지돌출로 상고 출신 대통령이 나오고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인성이 불균형할 수밖에 없죠.˝
공부 하나 달랑 잘해서 먹고살고 있는 불균형한 인성의 나는 그 우아하고 세련된 분들 사이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2015)』, 문학동네, 84p.
물론 이 글에 나오지 않은 부분이 있었겠지. 하지만 직업이 수학 교수라는 것이 자식의 중고등 수학 교육법에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난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게 사실이라면 그럴 역량이 충분함에도 오히려 자녀교육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방관만하는 그 "부군"들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녀교육에 무관심한 '고학력 엘리트 아버지'는 아예 논외로 두면서 모든 사교육 병폐의 화살이 '(상대적) 저학력 어머니'의 과한 자식 공부열에 쏠리도록 쓰여진 글이다. 굳이 어머니의 전공이 "하프"며 "발레"라고 언급한 것은 그 자신이 300여 페이지에 걸쳐 누누히 말한 수직적 가치관에 따른 공부지상주의, 엘리트주의기도 하다.
비판을 할 것이라면 그들의 비이성적인 공부집착, 또는 그들의 공부법은 사실 이 사회에 이롭지 않다,는 쪽으로 갔어야지 부모 각자의 전공을 운운한 것은 참으로 저열했다.
게다가 위플래시를 자기계발의 중요성으로 독해하는 젊은층을 비판하면서도 그뒤에서 송옥렬 교수와 자신의 공부담을 이야기하며 결국 자기계발 서사와 맞닿아있는 말을 한다. "세상은 정직한 것, (스스로 즐기며 열심히 공부하던) 송교수는 대학 3학년 때 이미 사법고시에 패스했고..." 78p. 이는 앞서 "'나는 저만큼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걸까?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데……' 라는 식의 자기계발 강박증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고 유해한 감상법" 44p. 이라던 말과 묘하게 모순적으로 겹쳐진다.
이외에도 이러다 인생 막장이 될것같아 막판에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사시에 붙었다거나... 앞서 한 말들이 공부나 지위에 연연하지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라는 것들이었기에 "사시를 위해 열공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 막장이 됐을 것"이라는 전제가 엿보이는 서술들도 불편했다.
사실 내가 오랜만에 북플에 접속해서 글까지 쓰고 있는 것은 109쪽의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꽂혀 있는 책이 모두 고시 서적이라는 것이었다. <민법><형법><행정법> 서적이 가득한 우아한 북 카페였다."는 문장을 보고 배알이 뒤틀려서다. 맥락상 북 카페의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우아했다는 것(책 선정도 인테리어의 일부라면 이것도 맞는 말일 수 있겠다)은 아닌것 같고. 법 서적, 그것도 고시 서적이 꽂혀있으면 우아한 것인가?? 으아. 당신도 결국 똑같잖아요...
이런 말들이 다양성을 존중해야하고 수직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수평적 가치관을 지닌 사회가 돼야한다는 앞선 본인의 주장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이책에선 이런 식의 자기분열적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띈다. 사실 나 역시 요즘 스스로의 이런 자기분열, 자기모순적 모습을 많이 느끼기에 이것이 경험의 폭이 협소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단점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되는 부분마저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읽는 내내 조금씩 불편했던건, 다양성을 존중하자고, 자기는 사실 냉소적 개인주의자일 뿐이라고 겸손을 내보이면서도 은연중에 내뿜고 있는 도덕적 우월감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