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p.
...오늘날 가난해지는 사람은 자신만이 실패자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훨씬 더 포괄적인 과정의 일부로 가난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운명은 역사적인 차원을 가진다. 이것에 위로를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25p.
..너도나도 욕심을 부리며 손을 뻗치는 곳에서 포기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척도로 삼지 않는 자주성, 우리의 경제적인 쇠퇴는 전적으로 불행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세련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바로 이런 올바른 태도에 속한다. 막스 프리슈에 따르면 "위기는 재앙의 씁쓸한 맛을 제거하는 경우에 엄청나게 생산적인 상태"이다.

28p.
...뭔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 고백은 이미 항복이나 다름없다. 우리를 맹렬하게 덮치는 저속한 대중문화와의 싸움에서는 오로지 작은 승리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승리는, 예를 들어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 없이 살아가는 데 있다.

40p.
...샤로스트 공작은 단두대로 가는 길에도 책을 읽었으며, 망나니를 향해 계단을 올라가면서는 읽다 만곳에 표시를 했다. 이런 식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기로는 유럽에서 헝가리를 쫓아갈 나라가 없다.

50p.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국인들은 지배자의 민족이다. ‘지배자라는 것‘이 항상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독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헝가리인들과 영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자기 극기‘, 비록 상상의 세계라 할지라도 ‘자기 세계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지배자이다.

69p.
..놀이를 즐기는 소질은 여유를 부리는 능력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유가 신성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여유를 부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오직 여유를 부리거나 재미 삼아 뭔가를 할 때에만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75p.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오로지 일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분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이 본연의 삶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여겼다. 일의 의미와 목적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데 있었다. 이제 다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수중의 돈은 줄어들지라도 일을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일이 인류의 역사상 오랜 기간 영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정말로 영예로운 것은 인간을 도와주고 치료하고 가르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부득이하게 필요하거나 아니면 돈을 탐하는 마음에서 일을 했을 뿐이다. 종교개혁 이후에야 처음으로 일은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직업‘이라는 말을 ‘일‘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사람도 바로 루터였다.

79p.
...그러나 편안함에 대한 생각을 조금 포기할 경우, 그런 작은 집이 고층 건물 옥상의 아주 넓고 천박한 집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편안함은 소파 세트를 요구하고, 우아함은 벽에 세워진 의자를 지정한다. 편안함은 양탄자를 사랑하고, 우아함은 비록 원목 마루 아닌 래미네이트일지라도 맨바닥을 사랑한다. 편안함은 늘어놓는 것을, 우아함은 치우는 것을 사랑한다. 편안함은 비좁음을, 우아함은 공간의 여백을 사랑한다.

113p.
...니클라스 마크는 우리가 차량의 대량 보급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자동차의 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동차의 진실한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자동차를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니라 특별한 향락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페트루스나 슈발 블랑 포도주를 날마다 마시지 않듯이, 자동차도 가끔 그리고 의식적으로 타야 하네. 그것도 인적 없는 해변 도로나 산악 도로에서 말일세." 니클라스 마크는 이렇게 설명했다. 마세라티나 애스턴 마틴은 분명히 향락 수단이며, 문제는 이러한 자동차들이 아니라 우리의 도로를 정체시키는 수백만 대의 오펠 코르사, 폭스바겐 골프, BMW 3시리즈라는 것이었다.

118p.
..오로지 여행을 위한 허무맹랑한 여행은 영국 부잣집의 하릴없는 셋째 아니면 다섯째 아들들의 발상이었다. 시민계급은 상류층의 모험가들이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고원 목장을 이리저리 기어오르고, 손에 안내서를 펴들고 무너진 유적지를 배회하는 것을 보고 흉내 내었다. 오늘날 관광 여행이라 불리는 것은, 겉으로는 고상해 보였지만 사실은 기괴했던 영국 속물들의 세계 일주 여행이 발전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젠틀맨 체험을 모방하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짓이다.

153~154p.
..더 많은 것, 더 나은 것, 더 새로운 것을 향한 충동은 겔렌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느끼는 깊은 만족을 향한 욕구처럼 우리 본성의 일부이다. 타고난 본성을 거스르며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이것에 저항하는 사람은 불행해진다. 깊은 만족의 비결은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고—금욕주의자처럼 억누르거나 부정하려고 하는 대신—알맞게 제한하는 것이다. 라틴어에는 이것을 표현하는 산뜻한 낱말 temperantia가 있다. 이 낱말은 지나친 억제와 훈율보다는 올바른 배합의 기교를 암시해 산뜻하다....

155~156p.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용기를 내 자녀 교육의 한 가지 규칙을 제시하려 한다. 우리는 자녀들을 자주적인 인간으로 키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주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것은 바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우는 것을 뜻한다. 그 목적은 아이들이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딸은 이를 ‘꼭 닦아야‘ 하거나 아니면 ‘누구나‘ 닦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닦지 않으면 입 안에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를 닦는다. 올바르게 행동하기가 더 쉬울수록 더 행복해진다! 보통 뛰어난 음악가라고 말하면, 즉석에서 ‘악보를 보고‘ 실수 없이 연주할 뿐 아니라 힘들이지 않고서 가볍고 능란하게 연주하는 음악가를 일컫는다. 그것이 바로 애를 쓰며 노력해야 하는 초보자와 다른 점이다. 특별히 애쓸 필요 없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사실 이미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이해를 통해서만 도달 가능하다.

204p.
...부는 욕구의 문제이다. 이른바 우리의 욕구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우리 본래의 욕구를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누구나 부를 누릴 수 있다. 다만 광고 업계가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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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나는 남자와 여자가 아이를 만드는 행위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습니다. 젊은 동료들은 "저런 남자하고 끌어안는 것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며 싫어하는 남자를 매도하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나지도 않습니다. 섹스라고 하는 남자와 여자의 행위에 대한 상상은 건너뛰고, 태어날 아기의 모습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는 약간 비정상인 인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70p.
..가즈에도 그랬지만,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부 학생을 흉내 내는 학생에게는 여유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부 학생이 발산하는 부의 음탕함이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었거든요. 부富라는 것은 항상 과잉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음탕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자연스럽게 줄줄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 음탕함은 설사 겉모습이 평범하더라도 그 학생을 특별한 존재로 꾸밀 수 있는 것입니다. 부유한 학생들은 모두 음탕하고 향락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고에서 부의 본질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116p.
..나는 외할아버지와 생활하면서 절약을 몸에 익혀왔기 때문에 퍼뜩 감이 왔습니다. 그런 집은 빈틈이 없고 꽉 차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절도 없이 문란한淫靡‘ 공기가 감돌게 마련입니다. 절약하는 바지런함, 그 자체가 ‘절도 없는 문란‘ 입니다. 절약하여 무엇인가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실은, 절도 없이 문란한 것입니다.

135~136p.
..내가 주택가의 모퉁이를 돌 때까지 아저씨는 틀림없이 내 등을 노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4년 후, 가즈에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에게는 이때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즈에네 집은 급속히 무너져 내렸는데, 나는 붕괴 직전에 가즈에네 집의 무상한 행복을 목격한 셈입니다. 내 등에는 아직도 그때의 아저씨의 시선이 총탄처럼 깊이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아저씨가 대변하는 사회로부터 저격당한 상처가.

157p.
...나는 카알의 눈빛 속에 있던 경외나 동경이 관계한 뒤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나와 관계한 남자들은 누구나 다 뭔가를 상실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때였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새로운 남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내가 창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8p.
..요컨대,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노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의 인내 끝에, 일시적인 자기만족을 얻는 것. 나는 노력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230p.
..그렇습니다. 괴물 같은 미모를 지닌 유리코와 우리는, 여자라는 같은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믿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모습과 외모가 이 정도로까지 다르다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되면 미추美醜라는 상대적인 판단은 아무래도 좋게 되고,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미와 평범한 그밖의 것이라는 상황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유리코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하잘것없어,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존재하는 여자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괴물은 본인 이외의 인간을 전부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288p.
..나와 미쓰루가 살아남기 위해서 각자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으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서, 가즈에는 자신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르는 여자는 타인의 가치관을 거울로 삼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망가지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598p.
...이면의 인간은 양지 바른 곳에서 사는 인간이 만드는 그림자에는 민감합니다. 누구나 은밀히 숨기고 있는 검은 생각이 나를 공명케 하는 것은 내가 이면에 있어서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양지 바른 곳에 있는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를 양식으로 먹고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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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p.
..아이를 업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아기가 아닌 딸이 무거워 힘에 부쳤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허리를 겨우 펴고 일어서니 순간 눈앞이 핑 돌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빠가 해줘야 할 일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빠 되기 연습이라는 다짐과 함께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주의하며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딸은 다시 꾸벅꾸벅 잠이 든 건지, 내 등이 뜨듯했다. 무겁고 예쁜 혹이었다.

156p.
..처음부터 오래 탈 생각이었다고 여기고 싶지만 역시 불편한 마음을 지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칸에 타고 있는 누군가에게 지금이라도 곧 내 부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내가 먼저 내리려 하지 않는 이상 전철은 언제까지고 계속 달려 나를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런 당연한 일들을 생각하면서도 전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는 나 스스로가 다른 승객들과는 달리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조금 더, 조금만 더 버티며 어느 때보다 피곤하다는 듯이, 난방이 잘 된 좌석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158p.
..아직 어려 아빠의 죽음에 대한 현실감각이 없었던 시절, 꿈을 꾸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빠가 쓰던 방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인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태어난 아이였다. 마치 아빠와 삶을 교환이라도 한 듯.

186p.
...내 주변서 이어지던 연쇄적인 죽음이 내게 고하고 싶은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빛의 뜨거움과 힘. 내 안에도 뜨거움과 힘이 차 있었다. 지난밤, 어떤 죽음도 떠올리지 않고 그저 붉게 빛나는 하늘을 깊이 바라보기만 했던 나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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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p.
..그러던 어느 날 역 빌딩에 입점한 플라자 Plaza(구 소니플라자)에 다양한 색상의 수건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브랜드명은 ‘리틀 선샤인‘LITTLE SUNSHINE. 팝업 광고의 설명에 따르면 쓸수록 촉감과 닦는 느낌이 좋아진다고 한다. 과거 미국에서 유행한 ‘육성형 타월‘을 재현하고자 일본의 타월 메이커 핫맨Hotman과 플라자가 공동 개발했다고 한다.

77p.
..사는 건 간단하지만 버리는 것은 어려운 세상. 그렇기에 버리지 않고 현명하게 처분했을 때의 상쾌함이 세일로 좋은 물건을 건졌을 때의 기쁨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97p.
...무슨 옷을 입을지는 본인의 자유지만 화학 섬유의 얇은 재질과 더 이상 젊지 않은 피부결의 상성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야시 마리코林眞理子 선생님의 명언 "대미지 가공된 청바지는 얼굴에 대미지가 있는 사람이 입으면 안 됩니다"에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멋 내기는 나이를 고려해 가며 하는 게 기본이다.

145p.
..나 역시 오랫동안 얼토당토않은 잡화를 사는 것으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해 온 사람 중 한 명이다. 잠깐 역 빌딩을 지나치면서도 머리끈이나 메모장이나 파우치 등을 꼭 산다.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는 옷이나 가방만 한 게 없겠지만 옷을 매일 살 수는 없다. 잡화는 이런 수요에 훌륭하게 맞아떨어진다. 액자도 좋고 다람쥐나 고슴도치가 그려진 마그넷도 좋다. 일단 가슴 설레게 하는 물건을 사지 않으면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의 구멍이 채워지지 않는다....

164p.
...앞으로도 영원히 입을 셈이었던 애착 청바지의 유행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의 충격은 크다. 하지만 청바지는 옷장의 중심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으니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그렇다, 새로 사야 하는 것이다!

193p.
..하우스 오브 로제는 주요 백화점이나 역 빌딩에는 꼭 입점해 있어서 지나는 길에 매장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스킨 케어를 중심으로 하는 화장품 메이커지만, 항상 신상품을 개발하고 인기 있는 여배우를 내세워 화려한 광고를 하는 일반적인 회사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다. TV광고는 물론이고 잡지 광고조차 하지 않는데도 점포수는 상당히 많아서 지난 17년간 이사를 다녔지만 어디서나 하우스 오브 로제를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스타벅스가 없던 돗토리현에도 점포가 두 곳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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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p.
..그래서 현대인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무력감을 느낀다. 고대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고대인에게는 시스템이 없었고, 대신 변덕스러운 신과 정령, 광포한 자연과 폭군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이치에 맞게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품지 않았다. 사방을 향해 생존을 빌며 살았다. 폭력적인 죽음과 신비로운 현상들이 너무 많았기에 역설적이게도 짜릿한 투쟁과 영광, 환희, 영적 충만의 순간을 현대인보다 더 자주 경험했다.

68p.
..그러므로 직관을 검증하는 이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동조자가 많다고 해서 이 단계를 통과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느끼기에 불편하니까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은 유아적이다. ‘우리가 느끼기에 불편하니까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얼마나 집단적 오류에 빠지기 쉬운 동물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80~81p.
..과학적 태도란 무엇인가 듣기에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라도 실험을 통해 입증되기 전까지는 전폭적인 지지를 미루는 건강한 회의주의다. 서로 다른 설명이 맞설 때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절차에 따라 어떤 가설이 더 설득력 있는지 가린 뒤 합의할 수 있다는, 진보와 평화에 대한 믿음이다. 그 검증 과정에서 자존심과 진영 논리, 때로는 정의감조차 내치는 엄격함과,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겸손함이다. 어제 작동했던 법칙이 오늘도 작동하고,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 너에게도 작용한다는 일관성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기반성 능력이다.

121~122p.
..현실을 살피자는 목소리를 낼 때 ‘타협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면 현실과 타협하지, 무엇과 타협하라는 말인가. 이상과 타협하라는 건가? 이상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의 반대말은 이상이 아니라 구호와 아포리즘이다. 물론 이런 말들은 어떤 층위에서는 진실을 담기도 한다. ‘초고층 빌딩은 하늘을 찌르는 페니스‘라는 서술은 공격적인 성공 야심으로 가득한 현대문명의 한 속성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그런데 저 표현을 몇 층 아래로 그대로 가지고 내려와 ‘그러므로 저 빌딩의 건축가는 남근 콤플렉스가 있다‘고 이어가면 얘기가 우스워진다.
..세상을 그렇게 보는 이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고심했는데, 모이제스 나임의 『권력의 종말』(김병순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5)을 읽다가 적당한 용어를 발견했다. ‘단순주의자‘라는 단어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단순주의자가 이쪽저쪽에 너무, 너무 많다.

123p.
..‘고요히 진리를 기다리며 물음표의 존재 안에서 앉아 숨쉬는 것.‘
..성공회 신학자이자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언 윌리엄스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저 문장을 두고 ‘심오롭다‘고 놀린다. 심오한profound 것 같지만 사실은 별 뜻 없지 않으냐는 야유다. 데닛이 심오로움deepity의 다른 예로 드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단어일 뿐이다.‘

126p.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모든 형태의 차별에 맞서겠다는 결의보다는 그 차별이 어떤 형태냐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차별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들은 차별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벌이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차별인가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이 벌이고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을 찬성하는 이들은 소수자를 우대하지 않는 것이 차별이라고 주장하고, 반대편 진영은 소수자 우대가 차별이라고 반박한다.
..이런 때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심오로운 선언은 어떻게 쓰이나. 특히 SNS에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질문과 토론을 막는 모양새로 쓰인다. 너희와 달리 우리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편은 이렇게나 많다! 그런 느낌이다. 이런 여건에서 숙의熟議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141p.
..다행히 우리는 중증 감염자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사이비종교 교도를 가려내는 일과 기본적으로 같다. 그들은 무오류를 확신하며, 선민사상과 피해의식에 동시에 빠져 있고, 공허한 구호를 기침처럼 콜록콜록 뱉는다. 지식 정보 시대에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병이다.

144p.
...도덕성을 묻는데 불법이 아니라고 반박할 때 그 도덕성은 파산선고를 받는다.

213~214p.
..하지만 나도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은 있다. 어떤 감정들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호기심을 품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지성은 좁은 시야 안에 머문다. 슬퍼하는 사람은 자신을 뽐내지 않는다. 그럴 겨를이 없다. 슬픔을 뽐내는 어떤 사람들은 내 눈에 슬퍼하는 게 아니라 들뜬 것처럼 보이곤 한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애도하지 않는다. 애도는 타인을 향하는 마음인데,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그를 휘감는다. 나는 2022년 10월 29일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참사를 현정부가 애도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은 탄핵될까봐 겁에 질렸다. 그래서 추모의 방식을 통제하려 든다.

274~275p.
..두번째로 내가 깨달은 바는, 외따로 떨어진 장점이나 단점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거대한 빙산이다. 우리는 물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만 본다. 빙산의 봉우리 앞면과 뒷면이 다른 경우는 그나마 이해하기 쉽다. 신중/우유부단이나 겸손/비굴같은. 실제 수면 아래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일 게다. 책임감과 오만함, 공감 능력과 의존성이 한줄기에서 뻗은 두 봉우리일지도 모르고, 더 불가사의한 연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얼음은 물위로 드러난 부분을 깎아도 그만큼 다시 떠오른다. 겉으로 드러난 성격을 모두 ‘교정한다‘ 한들 더 깊은 본성이 다른 형태로 언제든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세상살이와 연결 지어봐도 그렇다. 어떤 개성은 그저 당사자의 주변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평생 흠결이라 여겼던 특질이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떠받치고 들어올리는 지지대이자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지금 내가 파악하는 나의 모습은 심리적, 서사적 총체와는 거리가 먼, 찰나의 파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275p.
..어쩌면 자기혐오 그 자체에 순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절대선이요 불순물 없는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기긍정의 화신들을 TV나 인터넷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 그늘 없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혐오를 넘어서 공포감이 든다. 그럴 때면 인간은 괴물이 되지 않는 대가로 자기혐오라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292p.
..여기서 다시 확실한 명제로 돌아온다. 첫째, 어떤 일이 도덕적으로 옳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 그 일을 한다는 이유로 도덕적 우월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개고기를 먹는 이들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나의 불쾌함, 불편함, 혹은 금욕에 대한 은밀한 열망을 섣불리 도덕과 연결시켜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불편해한다면 잘못된 일‘이라는 주장은 인터넷 시대의 질병이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나.
..우리는 모호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단단한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윤리를 쌓아야 한다. 건강한 논쟁을 통해 그 답을 찾는 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적 과업이라 생각한다. 동물권 이슈뿐 아니다.

394p.
...자신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환대와 폭력이라는 이분법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 어떠한 선입견과 불친절도 받아서는 안 되는 대우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런 인생관을 지니고 살면 삶이 불행해지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지 않을까?

424p.
..선정적인 범죄 보도가 낳을 수 있는 피해가 있다. 악인을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더 유능한 것으로 묘사하며 악행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창작물도 있다(그런데 화려한 스포츠카가 등장하는 갱스터 랩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비서사적 요소도 그런 선망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런 선정성과 도덕적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서사를 막자는 발상은 상투적 범죄물 속 악인의 초상만큼이나 얄팍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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