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p. ..그래서 현대인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무력감을 느낀다. 고대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고대인에게는 시스템이 없었고, 대신 변덕스러운 신과 정령, 광포한 자연과 폭군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들은 세상이 이치에 맞게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품지 않았다. 사방을 향해 생존을 빌며 살았다. 폭력적인 죽음과 신비로운 현상들이 너무 많았기에 역설적이게도 짜릿한 투쟁과 영광, 환희, 영적 충만의 순간을 현대인보다 더 자주 경험했다.
68p. ..그러므로 직관을 검증하는 이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동조자가 많다고 해서 이 단계를 통과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느끼기에 불편하니까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은 유아적이다. ‘우리가 느끼기에 불편하니까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얼마나 집단적 오류에 빠지기 쉬운 동물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80~81p. ..과학적 태도란 무엇인가 듣기에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라도 실험을 통해 입증되기 전까지는 전폭적인 지지를 미루는 건강한 회의주의다. 서로 다른 설명이 맞설 때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절차에 따라 어떤 가설이 더 설득력 있는지 가린 뒤 합의할 수 있다는, 진보와 평화에 대한 믿음이다. 그 검증 과정에서 자존심과 진영 논리, 때로는 정의감조차 내치는 엄격함과,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겸손함이다. 어제 작동했던 법칙이 오늘도 작동하고,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 너에게도 작용한다는 일관성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기반성 능력이다.
121~122p. ..현실을 살피자는 목소리를 낼 때 ‘타협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면 현실과 타협하지, 무엇과 타협하라는 말인가. 이상과 타협하라는 건가? 이상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의 반대말은 이상이 아니라 구호와 아포리즘이다. 물론 이런 말들은 어떤 층위에서는 진실을 담기도 한다. ‘초고층 빌딩은 하늘을 찌르는 페니스‘라는 서술은 공격적인 성공 야심으로 가득한 현대문명의 한 속성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그런데 저 표현을 몇 층 아래로 그대로 가지고 내려와 ‘그러므로 저 빌딩의 건축가는 남근 콤플렉스가 있다‘고 이어가면 얘기가 우스워진다. ..세상을 그렇게 보는 이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고심했는데, 모이제스 나임의 『권력의 종말』(김병순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5)을 읽다가 적당한 용어를 발견했다. ‘단순주의자‘라는 단어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단순주의자가 이쪽저쪽에 너무, 너무 많다.
123p. ..‘고요히 진리를 기다리며 물음표의 존재 안에서 앉아 숨쉬는 것.‘ ..성공회 신학자이자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언 윌리엄스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저 문장을 두고 ‘심오롭다‘고 놀린다. 심오한profound 것 같지만 사실은 별 뜻 없지 않으냐는 야유다. 데닛이 심오로움deepity의 다른 예로 드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단어일 뿐이다.‘
126p.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모든 형태의 차별에 맞서겠다는 결의보다는 그 차별이 어떤 형태냐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차별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들은 차별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벌이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차별인가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하는 사람들이 벌이고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을 찬성하는 이들은 소수자를 우대하지 않는 것이 차별이라고 주장하고, 반대편 진영은 소수자 우대가 차별이라고 반박한다. ..이런 때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심오로운 선언은 어떻게 쓰이나. 특히 SNS에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질문과 토론을 막는 모양새로 쓰인다. 너희와 달리 우리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편은 이렇게나 많다! 그런 느낌이다. 이런 여건에서 숙의熟議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141p. ..다행히 우리는 중증 감염자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사이비종교 교도를 가려내는 일과 기본적으로 같다. 그들은 무오류를 확신하며, 선민사상과 피해의식에 동시에 빠져 있고, 공허한 구호를 기침처럼 콜록콜록 뱉는다. 지식 정보 시대에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병이다.
144p. ...도덕성을 묻는데 불법이 아니라고 반박할 때 그 도덕성은 파산선고를 받는다.
213~214p. ..하지만 나도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은 있다. 어떤 감정들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호기심을 품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지성은 좁은 시야 안에 머문다. 슬퍼하는 사람은 자신을 뽐내지 않는다. 그럴 겨를이 없다. 슬픔을 뽐내는 어떤 사람들은 내 눈에 슬퍼하는 게 아니라 들뜬 것처럼 보이곤 한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애도하지 않는다. 애도는 타인을 향하는 마음인데,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그를 휘감는다. 나는 2022년 10월 29일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참사를 현정부가 애도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은 탄핵될까봐 겁에 질렸다. 그래서 추모의 방식을 통제하려 든다.
274~275p. ..두번째로 내가 깨달은 바는, 외따로 떨어진 장점이나 단점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거대한 빙산이다. 우리는 물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만 본다. 빙산의 봉우리 앞면과 뒷면이 다른 경우는 그나마 이해하기 쉽다. 신중/우유부단이나 겸손/비굴같은. 실제 수면 아래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일 게다. 책임감과 오만함, 공감 능력과 의존성이 한줄기에서 뻗은 두 봉우리일지도 모르고, 더 불가사의한 연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얼음은 물위로 드러난 부분을 깎아도 그만큼 다시 떠오른다. 겉으로 드러난 성격을 모두 ‘교정한다‘ 한들 더 깊은 본성이 다른 형태로 언제든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세상살이와 연결 지어봐도 그렇다. 어떤 개성은 그저 당사자의 주변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평생 흠결이라 여겼던 특질이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떠받치고 들어올리는 지지대이자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지금 내가 파악하는 나의 모습은 심리적, 서사적 총체와는 거리가 먼, 찰나의 파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275p. ..어쩌면 자기혐오 그 자체에 순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절대선이요 불순물 없는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기긍정의 화신들을 TV나 인터넷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 그늘 없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혐오를 넘어서 공포감이 든다. 그럴 때면 인간은 괴물이 되지 않는 대가로 자기혐오라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292p. ..여기서 다시 확실한 명제로 돌아온다. 첫째, 어떤 일이 도덕적으로 옳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 그 일을 한다는 이유로 도덕적 우월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개고기를 먹는 이들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나의 불쾌함, 불편함, 혹은 금욕에 대한 은밀한 열망을 섣불리 도덕과 연결시켜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불편해한다면 잘못된 일‘이라는 주장은 인터넷 시대의 질병이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나. ..우리는 모호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단단한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윤리를 쌓아야 한다. 건강한 논쟁을 통해 그 답을 찾는 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적 과업이라 생각한다. 동물권 이슈뿐 아니다.
394p. ...자신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환대와 폭력이라는 이분법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 어떠한 선입견과 불친절도 받아서는 안 되는 대우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런 인생관을 지니고 살면 삶이 불행해지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지 않을까?
424p. ..선정적인 범죄 보도가 낳을 수 있는 피해가 있다. 악인을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더 유능한 것으로 묘사하며 악행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창작물도 있다(그런데 화려한 스포츠카가 등장하는 갱스터 랩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비서사적 요소도 그런 선망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런 선정성과 도덕적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서사를 막자는 발상은 상투적 범죄물 속 악인의 초상만큼이나 얄팍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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