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p.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앞으로 영화처럼 특별한 사랑이 뚝 떨어질 일도, 이제껏 감춰져 있던 눈부신 재능을 발견해 뮤지컬 배우가 될 일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부자로 살아갈 일도 없다는 사실이다. 1LDK 거실과 110센티미터짜리 2인용 소파. 에이코의 행복은 그 위에 수납된 셈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지만.
..소파 위에 있을 때, 에이코는 선명한 행복감을 느낀다. 다만 그 행복감에는 우울이라는 베일이 늘 덧씌워져 있다.

63p.
..에이코는 알고 있었다.
..신경을 팽팽하게 곤두세우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손 내미는 친절에 긴장의 끈이 확 풀려버리는 그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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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p.
...즉 공허한 단어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인상을 주입하기 때문에 낮은 가격과 연결된다고 의심한다는 가설이다. 실제 음식에 뭔가 빠진 것이 있을 때 게crab나 포터하우스porterhouse처럼 정말 가치 있는 재료를 대신해 그 음식을 표현하는 데 채워 넣는 어떤 것 말이다. 《괴짜경제학Freakonomics》을 쓴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스티븐 더브너Stephen Dubner는 바로 이 원칙이 부동산 광고에도 똑같이 쓰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환상적인fantastic이나 매력적인charming 같은 단어가 쓰인 부동산 광고에는 더 낮은 가격이 붙는 반면, 단풍나무maple라든가 화강암granite 같은 단어가 쓰인 집 광고에는 더 높은 값이 매겨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의 가설은 부동산 중개인이 그 집에 어떤 구체적인 긍정적 특성이 없는 부족함을 은폐하기 위해 ‘환상적인‘처럼 모호하고 긍정적인 단어를 쓴다는 것이다. 사실 레스토랑에서 높은 가격과 상관관계가 있는 단어는 ‘환상적인‘ 같은 공허한 단어가 아니라 바닷가재, 송로버섯, 캐비아caviar처럼 가치 있는 내용물을 제대로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63p.
...또 손님들이 그냥 빈 식탁만 봐서는 어떤 음식을 대접받을지 알 수 없으므로, 앞으로 나올 음식 이름을 적은 작은 목록표가 각 좌석 앞에 놓이게 되었다. 이 목록의 이름은 ‘작고, 세심하게 나뉘었거나 자세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minūtus의 축약형에서 빌려온(처음에는 프랑스어에, 다음에는 영어에) 것이었다. 그것이 메뉴menu라 불렸다.

146p.
..어쨌든 히브리어의 셰커는 ‘도수가 높아진 맥주‘라는 의미를 간직한 채 꾸준히 생명을 이어갔고, 모든 종류의 도수 높은 술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했다. 4세기에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인 불가타 성경에서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그 단어를 시케라sicera라는 형태로 라틴어에 도입하여, 시케라를 맥주, 벌꿀술, 종려술 또는 과일사이다로 규정했다. 중세 초기에 셰커는 이디시어에 도입되어 술에 취한 상태를 뜻하는 시커shikker라는 단어가 되었고, 프랑스어에서는 시세라sicera라는 단어가 되어 지금은 시드르sidre라 불리며, 특히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서 대중화한 발효 사과주스 이름이 되었다. 1066년 이후 노르만인들은 이 음료와 새로운 영어 단어인 사이다cider를 영국에 가져갔다.

188p.
..긍정적인 견해보다 부정적인 견해를 서술하는 데 쓰이는 단어 유형이 더 많고 의미도 더 많이 구별된다는 사실은 여러 언어에서, 그리고 더 많은 종류의 단어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부정적 차별화negative differentiation라 불린다.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은 저마다 아주 다르며, 그 때문에 서로 다른 단어를 적용해야 한다고 느끼는 듯하다. 그와 반대로 행복한 느낌이나 좋은 상황은 서로 더 비슷해 보이고, 단어 종류가 더 적어도 처리될 수 있는 것 같다.

227~229p.
..빵은 중세 영국인들의 식단에서 워낙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식품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미드홀mead hall에 사는 앵글로색슨족의 통치자를 지칭하는 말이 바로 빵 보관자hlaf-weard(loaf-keeper)였다. 이는 알곡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예속민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방앗간을 관리하는 그의 역할에서 나온 호칭이었다. 이 단어는 진화한 현대식 형태로 말하면 아마 좀 더 친숙할 것이다. 그것이 ‘lord‘다. 영어의 ‘lady‘도 이와 비슷하게 앵글로색슨의 ‘빵 반죽하는 사람hlaf-dige(loaf-kneader)‘에서 나온 단어다.

229p.
..1066년 노르만족이 침입해온 뒤에도 음식과 주군계급의 연상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새 지배계급이 쓰던 프랑스어가 앵글로색슨어 대신 쓰이기 시작하여, 현대 영어에서도 계속 쓰이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pork, veal, mutton, beef, venison, bacon(고대 프랑스어인 porc, veal, mouton, boeuf 등등에서 나온 것) 등이 그런 예다. 그런데 규칙적으로 고기를 먹을 여유가 있는 것은 노르만인 군주들뿐이었지만, 고기를 제공하는 소와 돼지를 키우는 것은 앵글로색슨어를 쓰는 농노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돼지에서 나온 고기에는 프랑스어인 pork를 쓰지만 동물 그 자체는 여전히 옛날식 앵글로색슨어 단어인 pig(그리고 hog, sow)를 쓴다. 소를 가리킬 때는 지금도 앵글로색슨어인 cow, calf, ox를 쓰지만, 그 고기는 프랑스어 출신인 beef와 veal이라 부른다.

244p.
..소금은 콘비프corned beef에도 들어간다. 콘비프는 염장쇠고기로, 고대 켈트족의 현대 후손인 아일랜드인들의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콘비프는 옥수수와는 상관이 없다. corn이라는 단어는 본래 옥수수가 아니라 고대 영어에서 어떤 것의 ‘부분‘이나 ‘알맹이‘를 뜻하는 단어(사실 그것은 어원학적으로 grain과 kernel의 사촌이다)였기 때문에, 여기서 콘은 쇠고기를 저장하는 데 쓰인 소금 알갱이를 가리킨다.

302p.
..줄리엣은 우리가 관례주의conventionalism라 일컫는 이론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은 그저 관례에 따라 합의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국인이 egg라고 하는 단어를 광둥인들은 daan(蛋)이라 부르고 이탈리아인들은 uovo라 부르지만, 우연히 그런 이름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고 해도 모두가 동의한다면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달리 어떤 단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에 본성적으로 들어맞는 어떤 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 어떤 이름이 다른 이름보다 본성적으로naturally "더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본성주의naturallism라고 한다.

335~336p.
..중국식 식사에는 마지막의 달콤한 음식 코스가 없지만, 조금 다른 종류의 구조는 있다. 재료와 구성에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일례로, 광둥식 식사는 전분 음식(쌀·국수·죽)과 비전분성 음식(채소·고기·두부 등등)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요리 한 가지에 한데 섞일 수도 있고(차우멘, 차우펜, 볶음밥 등등), 흰쌀밥이 각각 나오고 비전분성 음식이 다른 접시에 따로 담겨 나와 저마다 먹을 만큼씩 쌀밥 위에 덜어 먹을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을 영어로 설명하려면 ‘비전분성nonstarch‘이라는 어색한 단어를 써야 한다. 광둥어에는 이것을 가리키는 ‘성餸, sung‘이라는 단어가 있다. 광둥어로 ‘식료품 장보기‘를 뜻하는 단어는 ‘마이 성买餸, mai sung‘(전분은 이미 집에 있는 기본재료니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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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p.
..두덴이 독일 파더보른대학에서 한 시학 강좌 내용을 읽어보면 Schrei(슈라이, 외침)와 Schreiben(슈라이벤, 쓰다)이 나란히 있다. 소리를 봐도 뜻을 봐도 외침과 쓰기는 복잡한 관계에 있다. 하지만 실제로 외치는 소리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조금은 유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뿐이다. 자기가 받고 싶은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소설과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드물다. 많은 사람은 소리 지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눈만 크게 뜬 채 인간이 부서지는 모습을 목도하며 들리지 않는 외침 속에서 죽어가기만 한다. 또 글로 쓰는 대신 정말로 소리를 질러대면 주위에서 정신병 환자로 취급한다. 글이 곧 외침은 아니다. 그러나 글이 외침과 완전히 떨어져버리면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글과 외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두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어원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과정에서 이제는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결합된 것이다.

91~92p.
..유럽도 오래전부터 유럽 문명 밖에 있는 인간, 소위 ‘야만인‘에게는, 잔혹하고 무서운 이미지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평행으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어느 쪽도 아님을 확인하고 ‘문명인‘의 도장을 스스로에게 찍는다. 지금 일본인이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아시아인을 ‘일찍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따뜻한 인간미를 아직 가지고 있는 뒤처진 사람들‘로 단정지으며 사실은 자신들이 차가운 선진국 인간이 됐음을 확인하고 싶을 뿐인 건 아닌가. 나아가 자신들이 했던 식민지 침략, 파괴, 살해의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그들의 ‘따뜻한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슬며시 죄의식을 진정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106p.
..문학을 쓰는 건 항상 귀에 들어오는 말을 이어 붙여서 계속 똑같이 쓰는 것과 반대다. 언어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극한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러면 기억의 흔적이 활성화되어 모어의 오래된 층이 지금 쓰는 언어를 변형한다.

128p.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은 외국어는 언어와 뇌의 관계가 다르다는 점, 시적 발상이라면 일부러 언어의 분류와 배치를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나에게 독일어는 외국어라서 ‘Zelle‘(세포)와 ‘Telefonzelle‘(공중전화 박스)가 같은 장소에 있다. 어원이 같으므로 별로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독일어가 모어인 사람은 대체로 ‘세포‘는 생물학 분야에, ‘공중전화 박스‘는 일상생활 분야에 분류된다. 따라서 뇌에서 둘 사이에 연결선이 없다. 어린 시절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생활에 쫓기고 세상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어른이 되면 연결선이 사라지고 없다.

164p.
..문학이 원본이라 해도 오역처럼 뒤틀림과 공백이 가득하고, 그 공백이 문학을 유동적으로 만든다. 만약 번역이 필요악이라면 문학 역시 필요악이다. 아니, 번역은 필요하지도 않은 악, ‘불필요한 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마노가 쓴 대로 악은 악만의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은 때로는 선 이상이다. 불필요한 악이라면 더욱 좋다.

192p.
...모어 관용어는 레스토랑에서 나온 식사 같은 것이라서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외국어 관용어는 말이 만들어진 과정이 생생히 보이기에 재료가 다 보이는 반찬 같은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무를 넣을 수도 있고 후추를 뿌릴 수도 있다....

197p.
...물론 지금도 해와 달은 있지만 시간을 알리는 도구는 아니므로 때를 뜻하는 ‘나날‘은 일종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나날‘을 ‘해와 달‘로 풀이하듯, 오역으로 느낄 정도로 직역을 하는 것은 우리를 말의 원점으로 되돌린다. 또 오랫동안 비유로만 쓰여서 원점에서 멀어진 노쇠한 말을 다시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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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p.
..곁에 누구도 없는 사람은 나이를 먹기는 하지만 세월을 헤아리지는 않는다.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나이를 먹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의 탐정은 나이를 잊었고, 나 역시 그의 나이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206p.
..두 사람 다 교코를 껄끄럽게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교코를 위해 기뻐했다. 교코는 무척 민감하기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수많은 밤에 발생한 불행한 정전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부드럽게 대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이나 자신이나 상처를 입고 만다.

346p.
..요즘의 가즈야 모습을 보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 생각이 난다. 합성피혁으로 된 지갑인데, 자기가 진짜 가죽으로 만들어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다. 자기 가격이 잘못되어 있다, 부당하게 싼 가격이 매겨져 있다—. 이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 지갑은 자기가 합성피혁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걸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모르는 척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진짜 가격표를 무시하려 했다는 사실을.
..가즈야가 하는 일, 가즈야의 행동에도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355p.
..그 말을 들었을 때 쓰카다 가즈히코의 표정은, 그랬다—. 달이 웃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창백한 죽음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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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p.
...부모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발상은 국가가 있기에 국민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직결되는 최대 악이다.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맹독이다.

15p.
..부모들의 무심함에는 그저 기가 찰 따름이다. 관찰력도 사고력도 없는, 거의 동물에 가까운 생물이 인간의 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판단력이라는 것을 약간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런 잔혹한 세상에 자식을 내보내는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겠는가.

24~25p.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2의 탄생을 뜻한다.
..제1의 탄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부모 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제2의 탄생은 그 전권을 자식이 쥔다.

38p.
..자식은 우선 자신이 어떻게 키워졌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성격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하려 하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고 외면하려 한다면, 이후에는 어떤 것도 설계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생긴 균열이 점점 커져 종국에는 와르르 무너지고 정신도 잃을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그것이다. 냉정하게 자기라는 인간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다.

47p.
..세상이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도, 그렇기에 재미있게 하기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도해 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세상을 사는 확실한 의미 따위가 존재한다면 또 그 의미의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유로운 의지로 나만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77p.
..그러니 자립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자립에 반하는 삶의 방식은 곧 명석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립이란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곱씹은 후, 강한 인간을 지향하면서 과감하게 분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독서와 우애, 교양만으로는 그 왕도를 터득할 수 없다. 혼자 힘으로 이 가혹한 세상을 끝까지 살아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강하고 굳은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몇 번이나 말하는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런 시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렇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생겨난 얄팍한 환영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긴장하고, 그 긴장감에서야말로 살아 있음과 사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82~83p.
..인간은 분에 넘치는 두뇌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데에는 저항감과 고통을 느낀다. 반면 본능을 관장하는,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파충류와 별 차이 없는 가장 원초적이며 밑바닥에 있는 뇌 부위에 의지하려는 관성은 몹시 강하다.

129p.
..자기 신뢰의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전 생애에 걸친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기만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 매진하면서 충만감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독립한 인간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175p.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 보석이 하나뿐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몇 개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평생을 들여 그 보석의 원석을 갈고닦을 수 있느냐에 삶의 진가가 있다. 그 외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다.

180p.
..직관만 의지할 뿐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셈이다.
..헤치고 들어가기 어려운 뇌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그 무한한 힘을 최대한 가동해, 지울 수 없는 자아와 자아를 둘러싼 세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곧바로 지적인 기능은 쇠퇴해 결판나고 만다. 끝내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아주 당연한 자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또 세상과 떨어져 있고, 진심이 변치 않는 성실하고 훌륭한 인물과 만날 수 없다. 따라서 경청할 가치가 있고, 생각하며 살도록 도와주며, 유익하고 위엄에 찬 말과도 조우할 일이 없다.

181~182p.
..생애를 다 바쳐도 좋을 만큼의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은 환영 따위가 절대 아니다. 차분히 기다리고 말없이 시시각각 관찰하는 끈질김만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고 언젠가 만날 수 있는 현실 자체이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적을 향해 길 아닌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온갖 장소는 보고일 수 있다.
..또한 목표 중의 목표, 목적 중의 목적은 온 정력과 인생을 쏟아 부어도 발전과 진보가 멈추지 않을 만큼 심오한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아무도 발을 내딛지 않은 미지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번 그것을 발견하고 그 길에 발을 디딘 자는 거짓 삶과 진정한 삶을 구별할 수 있다. 나아가 수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추구하는 행복, 즉 단순히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공허한 충만감 따위는 상대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결정되는 이른바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자기 삶을, 또는 자신의 죽음을 위로하는 태도에서도 단숨에 벗어난다.
..그런 후에야 청춘 시절이 열리면서 시작된 ‘바람직한 정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확고한 해답을 얻을 수 있고, 비애와 쾌락의 황홀한 한순간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실은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게 깨닫는다.

185p.
..진정한 목적을 지닌 자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성가셔 한다.
..투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생긴 순간 시간이 귀중해져 인간관계를 꼭 필요한 범위로 좁힌다.
..고독하고 암담한 쪽은 이들이 아니라, 타인과 맺은 끈끈한 관계를 끊지 못하는 목적 없는 인간들이다. 타인과 불필요하게 교제하면서 유난히 밝은 척하거나 오기를 부리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인간들이다.
..만약 태어나기 이전에 태어날 확고한 의미와 흔들림 없는 목적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사람은 그 의미와 목적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그것들을 잃고 말 것이다.
..의미도 목적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즉,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의지의 자유로움이 존중된다는 뜻이며, 의지의 세계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스스로 그것들을 발견하면서 멋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영원한 암시인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렇게 멋진 조건과 권리는 없다.

196p.
..삶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좇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이어 온 삶을 무시하고 찰나에 불과한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생명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삶이지 결코 삶에 부수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쟁취하는 것이고, 죽음은 가능한 한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악전고투와 고생에야말로 생명의 가치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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