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누가 끝이 딱 떨어지는 금액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주의하는 편이 좋습니다. 숫자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빌리는 사람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주먹구구식이라는 게 뻔히 보이죠.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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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26p. «세 번째 남자»
..부모님의 과거를 돌이켜보니 마리코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수수께끼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지갑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혹은 지갑을 다른 사람이 주웠다면, 부모님은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어머니가 다른 사람과 맺어져 아이를 낳았다면 그건 ‘내‘가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나‘를 낳게 한 우연한 만남은 부모님에게만 찾아오지 않았다. 조부모와 그보다 윗세대에서도 면면히 반복되어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더욱이 그 기적은 ‘나‘에게만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길에서 스쳐 지나갔던 아이에게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기적이면서도 굉장히 진부한 일이기도 했다. - P-1

204p. «아마기 산장»
..이런 곳에 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별안간에 믿기 어려웠다. 이치에 맞지 않는 장소에 세워진 건물은 비석보다 더 으스스하다는 사실을 하야미는 처음 알았다. 시옷 자를 그리는 지붕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요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 P-1

236p. «아마기 산장»
..하야미는 수긍한 뒤 술잔을 입으로 옮기면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이매망량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의 모습을 띤 괴물들이 시대와 이름을 바꾸어 언제 다시 이 나라에 발호할지, 그걸 감시하는 것이 펜을 쥔 자의 소임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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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도 여러분, 나의 그 고집스러움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당신네들이 과연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가장 불쾌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사실은 짓궂은 인간이 못 될뿐더러 세상에 원한을 품을 만한 위인도 아니며, 다만 부질없이 참새 같은 작자들을 혼내주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시도 쉴새없이, 심지어는 무섭게 울화통을 터뜨린 순간에도, 수치감과 함께 자각한다는 바로 그 점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리다가도, 만약에 누구든 나한테 장난감 인형 같은 것이라도 내밀든가, 차에 설탕이라도 곁들여 갖다주든가 한다면, 나는 금세 얌전해질 수 있는 그런 인간이란 말이다. 아니, 얌전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환희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이를 갈듯이 화를 내면서 부끄러움 때문에 몇 달 동안이나 두고두고 불면증에 시달려야 하지만 이게 나의 고질적인 버릇이니 어쩔 수도 없지 않은가. - P-1

..나는 짓궂은 인간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위인이다. 악인도 될 수 없었고 선인도, 비열한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내 방구석에서 최후의 나날을 보내면서 슬기로운 인간은 제정신으론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오직 바보 같은 자들만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부질없는 자위로 스스로를 우롱하고 있다. 그렇다, 19세기의 인간은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 반면에 성격을 지닌 인간, 즉 실무적인 활동가는 천박한 존재일 수밖엔 없다. 이게 나의 40년에 걸친 지론이다. - P-1

..그건 그렇고, 의젓한 인간이 진심으로 만족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답—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럼 나도 내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다. - P-1

...당신들은 웃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도 유쾌하다. 물론 나의 익살은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데다가 자신감도 없어 보일 테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어찌 자기를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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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태웠다. 이 대답을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어디선가 울리는 듯했다. - P-1

..다현이 죽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준후는 조금 놀랐다. - P-1

...아들을 살인자로 만드느니 살인자의 자식으로 만드는 편이 나았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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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p.
...어쩌면 결국 그거야말로 어린 시절의 가장 강력한 힘일지 몰랐다. 그 절대적인 잠. 그렇게 잘 때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런 능력을 잃는 걸까? 아마 14세나 15세쯤일 것이다. 사춘기의 위기는 어쩌면 거기서, 그러니까 완벽한 휴식을 잃는 데서 온다. 존이 그렇게 자본 지는 너무나 오래됐다. 이제 그는 낮에 겪었던 일을 모두 잊고, 고요한 밤에 잠겨드는 평온함을 더 이상 즐길 수 없었다. - P-1

71p.
...마틴도 분명 아버지와 비슷했다. 다른 곳에 정신이 가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대신 꿈꾸는 성향이 있었다. 그를 해리 포터와 닮았다고 보는 것도 당연했다. 마틴은 현실에서 어색해하고 상상의 세계에서 편안해하는 기질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를 붙들었고, 마틴은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등을 쓰다듬는 남자의 손 이미지가 계속 눈앞에 맴돌았다. 아무것도 아닌 몸짓이지만, 그 단순한 몸짓을 통해 마틴은 과거가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이 됐음을 깨달았다. - P-1

72p.
..의도한 것도 아닌데 완벽하게 행동하게 되면 언제나 불안하다. - P-1

89p.
..그토록 사소한 것으로 이토록 크게 어긋난다면 미쳐버릴 수 있다. - P-1

98p.
...모든 인간의 삶은, 언제가 됐든, 다른 인간의 삶 때문에 망가진다. - P-1

155p.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은밀하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 어쩌면 그거야말로 가해자에겐 최고의 성과일 것이다. - P-1

195p.
..이런 식의 논리는 이상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마틴은 그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었다. 기억하지 않고 산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종종 명석함이 감퇴한 상태를 일종의 낙원에 비유했다.... - P-1

202p.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목표와 가까운 곳까지 이뤄낸 여정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빛을 스치기만 하느니 차라리 어둠 속에 남아있는 게 나았다.... - P-1

211p.
..폴란드의 시골 마을 몇 군데를 거치며, 그는 잠시 여기 ‘정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건 전형적인 현대의 슬로건이다. 생 자체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야 할 필요성이 이토록 생의 강력한 자양분이 됐던 시기는 없었다. 이전까지 운명은 거의 대체로 직선처럼 흘러갔다.... - P-1

217p.
...그는 호감을 산다는 기분, 심지어 인기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냥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정반대였다. 이 가짜 호그와트에서 가는 곳마다 흥분을 일으키는 경험을 하니 진짜는 어느 지경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곳에 머무름으로써 그는 자기 것이 아닌 동화의 조각을 구경하게 됐다. - P-1

222p.
...이제 그가 말할 차례였다. 소피는 "그럼 너는? 넌 무슨 일을 해?"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언제나 스스로를 규정해야 하고,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있어야 하고, 현재를 받으려면 과거를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구체적인 문제에도 좌우되지 않는 만남을 꿈꿨다. 플로베르가 루이즈 콜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만남이었다.
.."내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 내가 쓰고 싶은 것은, 그 문체의 내면적 힘으로 유지되는 아무 주제도 없는 책입니다."
..그거야말로 그의 바람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만남, 오직 자기 스타일의 내면적 힘으로 유지되는 만남을 경험하는 것.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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