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 «줄 서기»
..인류의 적응력은 유명하지만, 향상된 생활 형편만큼 인간이 빨리 적응하는 것은 없다....

57~58p. «줄 서기»
..푸시킨은 망설임 없이 줄 끝으로 가서 자리를 차지했다. 그 와중에도 너덜너덜한 외투를 입은 남자 한 명이 가까운 골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푸시킨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 알려주었다. ‘여기예요. 이쪽이에요, 친구.‘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 남자가 와서 줄을 서면, 푸시킨은 더 이상 줄의 맨 끝이 아닐 것이다. 아니, 사실 그 무엇의 끝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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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서문
..해즐릿이 쓴 에세이의 베일은 매우 얇아서 그것을 벗기면 다름 아닌 그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것은 콜리지가 본 그대로 "이마를 아래로 드리우고, 신발을 관조하는 듯한 기이한" 사람의 모습이다....

47p.
..우리는 누군가의 기지에 당황하고 경계하는 처지에 놓이는가 하면, 누군가의 아둔함은 죽도록 지겹다. 전자의 재치 있는 말은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복되면 진부해지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효과를 상실한다. 한편 후자의 무미건조함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재미있거나 지식을 주는 친구는 기껏해야 얼마 뒤에는 그냥 책장에 꽂아 두고 싶은 애독서와도 같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들은 책장에 꽂히기를 꺼려하고, 그러다 보면 친구들과의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싹튼다....

48p.
...지금까지 말한 모든 또는 그 가운데 어떤 이유는 점점 커져 머잖아 냉정이나 노여움에 이른다. 그러다가 냉정이나 노여움을 오래 억눌러 온 것에 대해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으로서, 현재의 감정과 어긋난 과거의 친절에 대한 기억을 털어 버리기에 손쉬운 수단으로서 마침내 공공연히 폭력성을 띠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주물러 변조하거나, 사멸한 우정의 잔해를 주워 맞추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자는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할 테고, 후자는 잔해에 향유를 발라 방부 처리하는 수고를 들일 가치가 없다!

57p.
...내가 왜 이처럼 부드럽고 기분 좋은 그림을 떠올려서 불운과 나 사이를 영원히 가로막는 차단막으로 쓰지 않을까? 그 이유는 고통보다 즐거움을 유지하는 데 더 큰 정신적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되이 조금 시간을 낭비한 뒤 사랑하는 것에서 미워하는 것으로 주의를 돌린다!

60p.
...나처럼 이 모든 것을 보고, 인생의 직물을 풀어 비열함과 악의, 비겁함, 감정의 결핍, 이해의 결핍, 타인에 대한 무관심,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다양한 실로 구분하고, 관습이 모든 우수성을 압도하고 악행에 길을 내주는 것을 보고서, 타인을 내 관점에서 평가하되 잘못해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품은 희망이 와오되었어도, 우정에 속는 얼간이이자 사랑에 우롱당하는 바보인 내가 가장 의지하던 것에 낙담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충분히 혐오하고 경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68~69p.
..왜냐하면 할 수 있는 동안은 현재를 소유하고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를 빼앗기고 현재가 있던 방이 텅 비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별의 아픔, 움켜쥔 것을 놓는 아픔, 단단한 인연을 끊어 버리는 아픔,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죽음에 격렬히 반발하고 "오래 사는 불행을 겪는다."

83p.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억제할 수 없는 기분과 견디기 괴로운 격정을 만족시키려고 인생의 무대에 머물고자 할 뿐이라면 우리는 즉시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편, 삶에서 얻는 좋은 것 때문에 존재에 애착할 뿐이라면 떠날 때의 고통은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94~95p.
..그렇다면 질투는 정의감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질투는 사칭과 엉터리에 대한 방어책인 것이다. 우리는 허식적이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숨겨 놓은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쉽게 내주지 않지만, 정당한 명성을 날릴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 그런 가치와 자격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이 제거되어 우리에게 방해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숭배와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모든 의혹과 분분한 의견이 죽음으로 일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혀에는 자유가 있어서 죽은 자들을 칭찬하는 데는 방종해진다....

136p.
..이와 달리 학교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건강하고 쾌활하다. 자유롭게 행동하되 주의깊은 아이는 자신의 피의 순환과 심장의 움직임을 느낀다. 웃다가도 금방 울 수 있고, 케케묵은 철자 교본을 보다 졸고 만다. 이런 아이는 선생님이 불러 주는 외국어 구절을 따라 말하고 수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붙박혀 앉아 있기보다는, 학기말이나 연말에 즐거움을 누리지 않은 대가로 하찮은 상장이나 받기보다는, 공을 차고 나비를 쫓아다니고, 얼굴 한가득 자연의 공기를 느끼고, 들이나 하늘을 바라보고,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다니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온갖 소소한 갈등이나 이해관계에 기꺼이 끼어든다.

142p.
..문제는 간단하다. 사람이 정말 이해하는 것은 모두 매우 작은 범위(일상사, 경험, 우연히 알게 된 것, 공부나 연습을 할 동기)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는 꾸밈과 속임이다....

160p.
..물질은 나를 얼마나 압박하는가! 사실이란 얼마나 완고한가! 자연과 예술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언젠가 리치먼드 씨가 "여러 다양한 걸 봐두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닭싸움이 유익한 구경거리라는 말이었다. 도덕에 관한 논문이라도 같은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것보다 이런 실용적인 것을 단편적 방식으로 고찰하는 것이 사물의 (마땅히 어찌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됨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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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p.
...그래도, 그렇게 뜰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샌드위치 반쪽씩을 먹고 있노라니 무언가를 함께 나눈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경찰들이 내게 달리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29p.
...돈은 종이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눈에 띄지 않는다. 대체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 때문이다. 돈이 공중에 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걸이나 그런 것과도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때에는 꺼내서 그중 일부를 내준다. 목걸이를 내주는 일은 없다. 그렇다 해도 목걸이는 돈이 있다는 신호다. 그냥 그렇다. 사람들은 숨겨놓은 것이 있다는 신호를 내비친다. 그것도 대화처럼 오고 간다.

41p.
..당신이 젊고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마도 60세, 70세, 80세, 혹은 90세가 된 여성의 눈에 떠오른 반짝임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 여자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그 여자에게 당신은 그저 소녀일 뿐이니까. 아기와 신발과 섹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그저 삶을 장난처럼 즐기는 소녀일 뿐이다.

93p.
...그래, 그렇게 작고 빛나는 눈으로 부드럽고 안전하게 쉬고 있는 머리는 마치 아기가 되어 다시 살아 돌아온 듯하고, 그럼 나는 그들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으리라. 그 아기의 머리를 나의 사유 재산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정말로 나는 그렇게 여긴다.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유가 점점 외로워지고, 지루해지고, 겁을 먹고는, 또 다른 머리와 합류하기를 바라게 되는 일도 무척 잦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머리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자신의 머리를 소유하는 일이 다른 이의 머리를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 커져가는 일도 잦아진다. 사랑과 소통을 향한 완벽히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우러난 채로 말이다. 그러나 탐욕에서, 통제와 권력을 향한 욕망에서 괴물이 자라나기도 한다. 되도록 많은 머리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란다....

129~130p.
...어쩌면 작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하인이다. 누가 그런 하인을 고용하는지는 모르지만, 세계는 고용될 준비를 갖춘 그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각 가정이 작가 하인을 고용하여 자리에 앉힌 뒤 우리가 견뎌야 하는 인간적인 골칫거리에 집중하도록 한다면, 모든 가정은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집에 앉아 있을 작가를 고용하는 건 실용적이라고 할 수 없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할 것이고, 작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과 동물들을 조용히 시킬 하인이 한 명 더 필요할 것이며, 작가에게도 모든 생물들처럼 음식을 먹여야 할 테니까. 그리하여 세계는 상대적으로 집에 더 데려가기 쉽고, 공간도 더 적게 차지하며, 먹여 살릴 필요도 없는 책을 이용하는 천재적인 계획을 생각해낸 것이다. 각각의 책 속에는 손가락에 못이 박인 하인, 즉 작가가 들어앉아 우리가 세상의 걱정거리를 떨쳐낼 수 있도록 우리 대신 그런 것들에 집중한다....

141p.
...그게 무엇이든 모기장을 그 위에 쳐놓으면 안에 있는 물건은 부드럽고 신비해 보인다. 언젠가 무척 지적인 불교도였던 여성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여자는 되도록 집에 물건을 안 두고 하얗게 꾸미길 바랐지만, 수천 권이나 되는 책 때문에 그 공간의 활기를 살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여자는 간단하게 책을 세로 기둥으로 쌓아 그 위에 모기장을 씌움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평화가 바람처럼 몰아치는 환경 속에서 사는 효과를....

165~166p. 옮긴이의 말
..나이가 들어가면 분과에 얽매이지 않고 합일된 삶으로 향한다. 이것은 메리 루플이 <Between the Covers>라는 포틀랜드 기반의 문학 팟캐스트에 출연해 《나의 사유 재산》에 관해 나눈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가족 안의 딸로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친밀한 사이에서의 나…. 젊었을 때는 이같이 분화된 영역들에서 살아가지만, 노년에는 이 모든 것이 시접 없이 맞물리고 그 안에서 부드럽게 헤엄친다. 섬세한 차이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것은 아니나, 이를 하나로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노년이 주는 선물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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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p.
..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면도도 잘 안 하고 후줄근해 보이는 이 말라깽이 청년은 자신을 위해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산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에 투자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완고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기술이나 노동을 돈벌이 수단으로 거래하지 않고 부탁받은 모든 일을 당연한 듯 흔쾌히 처리한 후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3p.
...돈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보존하고 수호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55~56p.
..이는 우리 모두에게 언뜻 부끄러운 고백처럼 보인다. 자기 시대에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동시대 사람의 공포와 괴로움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대다수 사람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비난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둘 의향이 매우 강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더 강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자연법칙은 우리의 참여 의지와 공감 능력을 현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제한한다. 강한 흥분이 연속되면 필연적으로 피로가 누적되고,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2000년 전에 이미 그리스 극작가들은 이것을 비극의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극의 길이를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으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이 한없이 길어지면, 그것에 몰두하는 능력이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숙명적 비율을 체감하고 있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장면은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75p.
...그 한 시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이었다.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손님에 대한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고,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위대한 대가 뒤에 숨을 죽이고 주변의 대리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나는 그 한 시간에 이것을 깨달았다.

116p.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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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매사에 리스트를 만들려고 할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리스트를 작성하게 할까? 나는 독서광이 된 뒤로, 애니 서점에서 용돈을 다 탕진한 뒤로 늘 이런 리스트를 작성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열 권. 제일 무서운 책 열 권. 제임스 본드 시리즈 걸작선. 로알드 달 걸작선. 어릴 때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딕 프랜시스가 쓴 소설을 한 권도 빼지 않고 다 읽은 (그리고 그중 최고의 작품 다섯 권을 꼽을 수 있는) 열두 살 소년이었다. 그게 없다면 난 그저 친구도 없고, 사이가 소원한 어머니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아버지를 둔 외로운 소년에 불과했다. 그게 내 정체성이었는데 누군들 그런 정체성을 원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궁금한 점은 왜 아직도 리스트를 계속 작성하냐는 것이다. 이제 나는 보스턴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까지 했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사실 나는—아마 기만을 바탕으로 한 픽션의 왕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편견이 생겼을 테지만—화자를 믿지 않듯이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결코 완전한 진실을 얻을 수 없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 말을 나누기 전에도 이미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은 옷은 몸의 진실을 가리지만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다. 옷은 직조이자 날조다.

...내게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과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 서점에 10분간 머물다가 사이먼 브렛의 중고책을 사 가는 나이 든 독일 관광객에게는 엄청난 애정을 느끼지만, 누군가를 잘 알게 되면 상대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그들 앞에 유리 칸막이가 있고 그 유리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듯하다. 상대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보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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