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 ..저 멀리 떨어진 나선형 성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넘버원의 회색 주름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역사가 과학이기보다 신탁인 것은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야, 한참 지난 뒤에야 역사는 통계표라는 도구로 가르쳐지고 해부학적 절단면으로 보충될는지도 모른다. 선생은 어느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나라에 살던 대중이 처한 삶의 조건들을 보여 주는 대수학 정식을 칠판 위에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자, 시민 여러분, 여기 이 역사적 과정을 있게 한 객관적 요소를 보시오"라고 말하면서.... - P-1
75p. ...만성적인 감옥 몽상가들은 거의 언제나 미래를 꿈꾸었다. 만일 과거를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실제 있던 일이 아니라 자기들이 추측하거나 바라는 대로 각색된 것이었다. 루바쇼프는 자기의 정신 기관에 또 다른 놀라운 일이 저장되어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죽음과의 대면은 늘 사고의 메커니즘을 바꾸었고, 자극에 끌리는 나침반처럼 가장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으로 알았다. - P-1
120p. .."물론이지. 언젠가 한 수학자가 말하길, 대수학은 게으른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더군. x를 풀지 않고서도 마치 아는 듯 조작하기 때문이라네. 우리의 경우, x는 익명의 대중, 즉 인민을 상징하지. 정치란 x의 실제적 본질을 생각하지 않은 채 x로 작업하는 걸 의미하네. 그러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방정식에서 x가 차지하는 의미로서의 x를 인식한다는 것이지." - P-1
137p. ..……궁극적 진리는 끝에서 두 번째 지점에서는 언제나 거짓이다. 결국 옳다고 입증될 사람은 그 전에는 틀린 것으로, 그리고 해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 P-1
209p. .."역사의 가장 위대한 범죄자는 네로와 푸케 타입이 아니라, 간디와 톨스토이 타입이네. 간디의 내면 목소리는 인도의 해방을 막는 데 영국의 총보다도 더 많은 역할을 했지. 은화 서른 닢에 자기를 파는 건 정직한 거래야. 그러나 자기를 자기 양심에 파는 건 인류를 포기하는 것이지. 역사는 선험적으로 도덕과는 무관한 거야. 그건 양심을 안 가졌어. 역사를 주일 학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끌고자 하는 건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놔둔다는 의미이지. 그건 자네도 잘 알 거야. 이 내기에 무엇이 걸렸는지 알고 있는 자네가 보그로프의 울먹임을 얘기하다니……. 뚱뚱한 알로바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니……." - P-1
228~229p. ..인민들이 지배하거나 지킬 수 있는 개인적 자유의 양은 이들의 정치적 성숙도에 달려 있다. 앞에서 언급한 진자 운동은, 대중의 정치적 성숙도가 한 개인의 성장처럼 지속적인 상승 곡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의 성숙도는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품의 생산과 분배의 과정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인민들이 스스로를 민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은 전 사회 조직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비례한다. ..그런데 모든 기술적 개선은 경제 기구에 새로운 분규를 야기하고, 새로운 요소와 결합 관계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현상을 대중은 한동안 꿰뚫어 보지 못한다. 기술적 진보의 모든 도약은 상대적으로 대중의 지적 발전을 한 걸음 뒤처지게 한다. 그로 인해 정치적 성숙도의 온도계는 하강 국면을 맞이한다. 인민들의 이해 수준이 변화된 상황에 점차 적응하기까지는, 곧 그것이 문명의 낮은 단계에서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자기 통치 능력을 회복할 때까지는, 때로 수십 년 혹은 여러 세대가 걸린다. 그러므로 대중의 정치적 성숙도는 하나의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적으로, 즉 그때그때 문명의 단계에 비례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 ..대중의 의식 수준이 상황의 객관적 상태를 따라잡을 때 평화적으로든 폭력에 의해서든 민주주의의 정복이 불가피하게 이어진다. 그것은 기술적 문명의 다음 도약(예를 들면 베틀의 발명과 같은)이 대중을 상대적인 미성숙 상태로 되돌려 놓고 어떤 형태의 전제적 통치의 출현을 가능케 하거나 필요하도록 만들 때까지 그렇다. - P-1
251p. ...루바쇼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사람은 허영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태워 버려야 한다. 자살이 허영의 뒤집힌 형식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P-1
283~284p. ..루바쇼프는 기소된 자의 육체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이런 방법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보통 두 명 혹은 세 명의 조사 책임자가 교대로 대질 심문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글레트킨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교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바쇼프만큼이나 자기 자신도 혹사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는 루바쇼프에게서 마지막 심리적 안식처, 즉 학대받는 자의 비애나 희생자의 도덕적 우월성 같은 것마저 박탈했다. - P-1
290~291p. ..루바쇼프는 코안경을 소매에 문질렀다. 그 대화가 자신이 애써 믿으려는 것처럼 정말로 무해한 것이었을까? 물론 그는 분명 ‘협상‘도 하지 않았고, 어떤 합의점에 이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Z 역시 그럴 만한 어떤 공식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대화 전체가 기껏해야 외교적 용어로 ‘수심 측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수심 측정은 그 당시 그의 생각을 연결하는 논리적 사슬의 한 고리였다. 게다가 그것은 당의 일정한 관례들과 일치했다. 혁명 직후 옛 지도자도 망명에서 돌아와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 나라의 장군 참모로서 복무하지 않았는가? 나중의 첫 평화 조약에서 그는 평화에 대한 대가로 특정 영토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옛 지도자는 시간을 얻기 위해 공간을 희생시킨 거지." ..루바쇼프의 재치 있는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 P-1
305p. ...이바노프는 최후까지 자신의 과거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무슨 말에나 장난기 어린 우수의 빛이 서려 있었다. 글레트킨이 그를 두고 냉소주의자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글레트킨의 무리에게는 지워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과거도 안 가졌기 때문에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탯줄도 없이, 경쾌함도 없이, 우울도 없이 태어났다. - P-1
330~331p. .."세상이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영리함과 품위가 서로 싸우기 때문이야. 한쪽 편만 드는 사람은 다른 쪽은 없이 지내야 해. 사람이 여러 생각을 다 말하면 좋지 않은 거야. 그래서 『성경』에도 이렇게 적혀 있는 거야.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오는 것이니라." - P-1
338~339p.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바쇼프에게 다가갈 길은 아직 있었다. 가끔 그는 예기치 않게 어떤 가락 혹은 어떤 가락에 대한 기억에, 아니면 <피에타>의 구부러진 손이나 어린 시절의 어떤 장면에 대한 기억에 반응했다. 마치 소리굽쇠를 친 것처럼 응답하는 진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시작되면 신비주의자들이 ‘황홀‘이라고 부르거나 성자들이 ‘정관‘(靜觀)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되곤 했다. 현대 심리학자들 중 가장 위대하고 진지한 사람들도 이런 상태를 하나의 사실로 인정했고, 그걸 ‘대양적 감정‘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한 인간의 존재는 바닷가의 소금 한 알갱이처럼 녹아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한 바다는 소금 한 알갱이에 모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알갱이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놓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건 사고가 그 방향을 잃고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돌기 시작하는 상태와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마침내 그 축에서 벗어나 공간 속에, 마치 밤하늘의 빛 무리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상과 모든 감정, 심지어 고통과 기쁨 자체도 의식의 프리즘 속에 분열하는, 그저 같은 빛줄기의 분광인 것처럼 여겨졌다. - P-1
341p. ..당은 개인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발적 자기희생을 강요했다. 당은 개인의 양자택일 능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한결같이 옳은 것을 택하길 요구했다. 당은 선과 악을 분간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죄와 배반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다. 개인은 경제적 숙명성이라는 계시 아래 서 있었다. 개인은 영원히 감기기만 하고 멈추거나 어떤 것에 영향받아 움직일 수 없는 시계 장치 속 한 바퀴였다. 그런데도 당은 그 바퀴가 시계 장치에 반역을 일으켜 그 경로를 변화시키길 요구했다. 어디선가 계산 착오가 있어 방정식은 풀리지 않았다. - P-1
344p. ...역사의 맥박은 느렸다. 인간은 햇수로 계산했지만, 역사는 세대로 계산했다. 아마 지금도 창조의 둘째 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살아남아 대중의 ‘상대적 성숙의 법칙‘을 세울 수 있겠는가! - P-1
345p. ..어쩌면 먼 훗날에야 비로소 새로운 깃발과 함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경제적 숙명성‘과 ‘대양적 감정‘을 모두 아는 새 정신이 일어나리라. 아마도 새로운 당의 당원들은 수도사 옷을 걸칠 테고, 오직 순수한 수단만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전도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한 인간이란 1백만 명을 1백만 명으로 나눈 결과라고 말하는 교리는 틀렸다고 가르칠 것이며, 곱셈에 근거한 새로운 종류의 산수를 도입할지도 모른다. 즉 1백만 명의 개인이 합쳐져 하나의 새로운 실체를 형성하고, 더 이상 무정형의 집단이 아닌 이 새로운 실체가, 무제한적이나 그 자체로 충족된 공간 속에서, 1백만 배로 확대된 ‘대양적 감정‘으로 자기 자신의 의식과 개인성을 펼쳐 나갈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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