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 ..렌소이스 사막의 생명체는 마치 아베 코보가 <모래의 여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일 것이다....
34~35p. ..물과 공기를 제외하면 인류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천연자원은, 모래다. 건축용 자재나 유리뿐 아니라 반도체 칩, 스마트폰 액정, 실리콘 등 모래의 변신이 너무나 신묘하기에 잊고 지낼 뿐. 컴퓨터, 콘크리트,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대도시를 상기하면 인류가 이룩한 현대 기술문명 자체가 사막과 다를 바 없는 ‘사상누각‘이다.
95p. ..배낭여행자들이 통상 ‘천국‘이라 부르는 곳은 산천이 아름답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냥 좋은 곳이다. 처음엔 히피들이 하나둘 머물기 시작하고, 이어서 배낭여행자 무리가 오가고, 나중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이쯤 되면 숙박업소, 식당, 클럽들이 우후죽순 골목마다 들어선다. 그렇게 해서 ‘심심한 천국‘이 ‘신나는 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3년에 걸쳐 볼리비아의 사마이파타를 세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사마이파타는 ‘배낭여행자들의 천국‘ 초창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13~114p. ..인류는 오랜 세월 대지의 길을 따라 서로의 풍습과 문화를 주고받았다. 한 달을 35~36일, 1년을 10개월로 계산했던 켈트족은 한 해의 끝으로 여겼던 동지에 ‘귀신을 피하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속을 파낸 ‘순무 안에 불을 켜고‘ 밤새 돌아다녔다. 켈트족의 ‘송년 의식‘은 1년을 12개월로 계산하던 기독교로 흡수되면서, 10월 마지막 밤에 열리는 ‘핼러윈‘이 되었다. 이란에서도 동지 때면 변장한 아이들이 이웃집 앞에서 접시를 두드려 견과류를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에선 아이들이 이웃집 문 앞에 바구니를 두고 나무 뒤에 숨어 사탕을 기다렸다. 배달족 또한 동지를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여기던 시절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 팥죽을 뿌리고‘ ‘밤새 등불을 켜고‘ 마을을 쏘다니며 놀았다. 동지, 핼러윈, 카니발, 홀리, 삐마이 등 송년 혹은 새해맞이 축제를 부르는 이름만 저마다 달랐을 뿐이다.
168p. ..나는 악사라이 소재 카라반세라이로 들어섰다. 현존하는 카라반세라이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했다. 수용 인원 3,000명, 짐 실은 낙타가 들고 날 수 있을 13미터 높이의 정문, 닫으면 그 자체로 요새였다. 안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낙타가 머물던 방으로 들어갔다. 유적을 방문할 때마다 나만의 관습이 있다. 첫 번째 유물이나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아가 ‘환청‘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낙타를 묶던 돌기둥 사이를 걷노라니 환청이 차츰차츰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낙타 울음소리, 각기 다른 부족어로 떠드는 짐꾼들의 대화, 나는 환청을 따라 햇볕 내리쬐는 마당으로 다시 나왔다. 나무 위에선 새들이 짹짹거렸고, 상인들이 피로를 달래기 위해 저마다 자기 고장의 악기로 연주하고 합주를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경험한 최고의 환청이었다.
182p. ..무더운 나라, 외딴 오지에서 지내다 보면 차가운 맥주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맥주는 ‘문명의 맛‘이다. ‘냉장고‘가 돌아가지 않으면 시원한 맥주 맛을 볼 수 없으니까. 차가운 맥주가 그리우면 도시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신호다. 아이들에겐 ‘칫솔‘을, 어른들에겐 ‘의약품‘을 드린 후 마을을 떠났다. 오지 부족민의 호의에 사탕이나 초콜릿으로 답례하면 그들의 치아를 망치고, 티셔츠로 답례하면 그들의 고유문화를 망친다.
194p. ..십승지지(十勝之地) 같은 마을이었다. 전쟁, 흉년, 전염병 같은 환란이 온 나라를 뒤덮을지라도 안심할 수 있는 곳. <정감록> 등 예언서에 등장하는 십승지지는 첫째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급자족 가능하고, 둘째 물이 풍부하고, 셋째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야 한다....
267~268p. ..중남미 전설에 따르면 세계는 원래 까만색과 흰색밖에 없는 흑백이었다. 그러다 신이 바라보기에 너무 지루해서 여러 사물들로부터 빛을 뽑아내 다시 색을 칠했다고 한다. 그중 ‘소년들의 웃음‘에서 추출한 색깔이 노란색이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색이다. 노랗게 칠한 건물과 노랗게 담벼락이 연이은 골목들. 그래서 마르케스의 소설에선 노란 나비가 그토록 자주 날아다녔던 걸까?
301p. ...그런 사실을 떠올리면, 고대, 중세, 근대, 현대, 그 어느 시대에나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가 동시에 존재했으며, 지금도 동시에 존재한다.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 두 무리를 가르는 기준은 ‘현재, 이곳에 적응하는 능력의 차이 ‘일 수도 있고, ‘현재, 이곳보다 미래,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기질의 차이‘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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