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 서문 ..해즐릿이 쓴 에세이의 베일은 매우 얇아서 그것을 벗기면 다름 아닌 그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것은 콜리지가 본 그대로 "이마를 아래로 드리우고, 신발을 관조하는 듯한 기이한" 사람의 모습이다....
47p. ..우리는 누군가의 기지에 당황하고 경계하는 처지에 놓이는가 하면, 누군가의 아둔함은 죽도록 지겹다. 전자의 재치 있는 말은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복되면 진부해지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효과를 상실한다. 한편 후자의 무미건조함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재미있거나 지식을 주는 친구는 기껏해야 얼마 뒤에는 그냥 책장에 꽂아 두고 싶은 애독서와도 같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들은 책장에 꽂히기를 꺼려하고, 그러다 보면 친구들과의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싹튼다....
48p. ...지금까지 말한 모든 또는 그 가운데 어떤 이유는 점점 커져 머잖아 냉정이나 노여움에 이른다. 그러다가 냉정이나 노여움을 오래 억눌러 온 것에 대해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으로서, 현재의 감정과 어긋난 과거의 친절에 대한 기억을 털어 버리기에 손쉬운 수단으로서 마침내 공공연히 폭력성을 띠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주물러 변조하거나, 사멸한 우정의 잔해를 주워 맞추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자는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할 테고, 후자는 잔해에 향유를 발라 방부 처리하는 수고를 들일 가치가 없다!
57p. ...내가 왜 이처럼 부드럽고 기분 좋은 그림을 떠올려서 불운과 나 사이를 영원히 가로막는 차단막으로 쓰지 않을까? 그 이유는 고통보다 즐거움을 유지하는 데 더 큰 정신적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되이 조금 시간을 낭비한 뒤 사랑하는 것에서 미워하는 것으로 주의를 돌린다!
60p. ...나처럼 이 모든 것을 보고, 인생의 직물을 풀어 비열함과 악의, 비겁함, 감정의 결핍, 이해의 결핍, 타인에 대한 무관심,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다양한 실로 구분하고, 관습이 모든 우수성을 압도하고 악행에 길을 내주는 것을 보고서, 타인을 내 관점에서 평가하되 잘못해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품은 희망이 와오되었어도, 우정에 속는 얼간이이자 사랑에 우롱당하는 바보인 내가 가장 의지하던 것에 낙담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충분히 혐오하고 경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68~69p. ..왜냐하면 할 수 있는 동안은 현재를 소유하고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를 빼앗기고 현재가 있던 방이 텅 비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별의 아픔, 움켜쥔 것을 놓는 아픔, 단단한 인연을 끊어 버리는 아픔,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죽음에 격렬히 반발하고 "오래 사는 불행을 겪는다."
83p.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저 억제할 수 없는 기분과 견디기 괴로운 격정을 만족시키려고 인생의 무대에 머물고자 할 뿐이라면 우리는 즉시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편, 삶에서 얻는 좋은 것 때문에 존재에 애착할 뿐이라면 떠날 때의 고통은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94~95p. ..그렇다면 질투는 정의감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 질투는 사칭과 엉터리에 대한 방어책인 것이다. 우리는 허식적이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숨겨 놓은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쉽게 내주지 않지만, 정당한 명성을 날릴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 그런 가치와 자격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이 제거되어 우리에게 방해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숭배와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모든 의혹과 분분한 의견이 죽음으로 일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혀에는 자유가 있어서 죽은 자들을 칭찬하는 데는 방종해진다....
136p. ..이와 달리 학교에서 빈둥거리는 아이는 건강하고 쾌활하다. 자유롭게 행동하되 주의깊은 아이는 자신의 피의 순환과 심장의 움직임을 느낀다. 웃다가도 금방 울 수 있고, 케케묵은 철자 교본을 보다 졸고 만다. 이런 아이는 선생님이 불러 주는 외국어 구절을 따라 말하고 수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 붙박혀 앉아 있기보다는, 학기말이나 연말에 즐거움을 누리지 않은 대가로 하찮은 상장이나 받기보다는, 공을 차고 나비를 쫓아다니고, 얼굴 한가득 자연의 공기를 느끼고, 들이나 하늘을 바라보고,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다니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온갖 소소한 갈등이나 이해관계에 기꺼이 끼어든다.
142p. ..문제는 간단하다. 사람이 정말 이해하는 것은 모두 매우 작은 범위(일상사, 경험, 우연히 알게 된 것, 공부나 연습을 할 동기)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는 꾸밈과 속임이다....
160p. ..물질은 나를 얼마나 압박하는가! 사실이란 얼마나 완고한가! 자연과 예술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언젠가 리치먼드 씨가 "여러 다양한 걸 봐두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닭싸움이 유익한 구경거리라는 말이었다. 도덕에 관한 논문이라도 같은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것보다 이런 실용적인 것을 단편적 방식으로 고찰하는 것이 사물의 (마땅히 어찌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됨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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